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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Yun, Suk 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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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이라는 고유명

윤석남은 1980년대부터 여성 현실 문제를 다뤄온 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다. 근현대 연이은 사회 격변 속에서도 여전히 유교 가치관이 굳건하게 살아있는 한국사회에서, 다소 사소하게 생각돼 온 ‘여성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하나의 시각 문화 운동으로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힘쓴 것에, 그의 미술사적·운동사적 공이 있다.
● 안대웅 기자 ● 사진 서지연

'그린룸(Green Room)' 2013 혼합매체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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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현주의 말처럼, 이 모든 활동이 그의 나이 40이 넘어 시작되었다는 점은 믿기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그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일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어느날 갑자기 이걸 안 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글도 써보고 서예도 하고 하다가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그림을 해보자,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운도 따랐다고 봐야 할까. 그림을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윤석남은 43세가 되던 해, 친구인 김영자 작가의 소개로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첫 개인전(1982)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를 두 팔에 안고 머리에 커다란 바구니를 이고서 행상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손이 열 개라도>는 당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어머니를 거칠게 그린 유화의 테크닉은 차라리 아마추어에 가까웠으나, 추상미술 일변도의 화단에 충격으로 다가왔으니, 사실은 시대를 앞서간 화풍이었다. 이때부터 윤석남은 어머니를 자신의 화업으로 삼았다. 전통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어머니, 혼자서 6남매를 먹여 살려오신 어머니를 그렸다.


“무엇을 그려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내가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였죠. 제가 관심 있었던 것은 왜 저 여자들이 극성스럽게 살아야 했을까.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어요.” 이후 윤석남은 여성주의 그룹이었던 ‘시월모임’ 활동을 하며, 김인순, 김진숙과 함께 이젠 한국 여성주의 미술사의 기념비적 전시로 잘 알려진 <반에서 하나로>(1986)를 기획, 여성주의 화가로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명백히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의 현실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미술 진영과 상당 부분 통하는 면이 있었다. 민족미술협의회의 젊은 여성 예술가 ‘터 그룹’ 등과 만난 것은 수순이었다. 이들은 민미협의 여성분과(이후 여성미술연구회로 개명)로 활동하며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연례전 <여성과 현실>(1987)과 여성문화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와 함께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해방시와 그림의 만남>(1988)을 기획했다. 정치적 민주화와 남북통일이 민미협 등의 아젠다였다면 여미연 등은 그 속에서 가장 억압된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다.




<꽃잎> 2000 혼합매체 900×500×25cm 

제 2회 광주비엔날레 전시




“미술대학이 있는 대학을 방문해서 졸업생 명부를 얻어왔어요. 그걸 바탕으로 4,000명에게 ‘우리가 이런 전시하고 싶으니 작품을 보내주세요’라고 편지를 썼어요. 전국의 여성 작가를 모아보자는 취지였는데 20여명에게서 답장이 왔어요. 그렇게 첫 번째  <여성과 현실>전이 열리게 되죠...<봇물을 트자>전은 제가 생각했을 때 아주 중요한 전시에요. 여성 현실에 대한 고발 차원에서 ‘여성성’이라는 정체성 탐구와 논의가 시작된 거죠. 저는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도 몰랐다가 ‘또 하나의 문화’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됐지요.” 이후 1990년대부터 윤석남은 공간에 연극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데 관심을 쏟으며, 작업 스타일을 조각-설치작업으로 전환했다. “한 10년쯤 평면을 그렸더니 답답함이 있었어요. 드라마틱한 이야기,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어떻게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고 나에게 개입시킬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90년대 초에 1년간 미국에 연수를 떠나게 되었어요. 뉴욕 브롱스 미술관에서 남미 작가의 설치미술을 보곤 너무나 깜짝 놀랐어요. 나무 조각을 모아서 못질하고 그 위에 칠을 한 작품이었는데 그때 이거구나 했지요.”




<족보> 1993 나무와 종이에 아크릴, 다양한 크기 

250×150×279cm 후쿠오카 미술관 소장




짧은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11년 만에 가진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1993). 이때부터 윤석남은 버려진 목재를 조립하여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고 그 위에 여성의 형상을 그리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주창했는데, 일본의 큐레이터 고카츠 레이코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버려진 목재의 거친 옹이나 구멍, 검은 얼룩과 균열처럼 보통의 조각가들이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결함을 그대로 살려서, 가부장제와 군부독재 하에서 이중으로 억압된 여성들의 마음의 고통과 제한된 행동 등을 표현하는 신체의 상처로 절묘하게 바꾸어놓은 것이다.” (만개한 윤석남의 작업은 1995년을 기점으로 하여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 비엔날레로부터 대량의 러브콜을 받기 시작했으니, 이때를 전성기라고 부르는 편이 옳겠다.) 이렇게 10여년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어머니에 대한 긴 굿”을 치르고 난 후, 윤석남이 다음으로 한 일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으니, 이때가 50대 중후반이었다. “어머니 작업을 끝내고 이제야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사실 중산층 집안의 여성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집안에 내 방이 없었죠. 상징적으로 보자면, 삶에 여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죠. 내 자신의 공간이라고 하는 곳은 부엌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자아는 없고 역할만 있었던 거죠.”




<빛의 파종 - 999> 1997 나무에 아크릴 

999개, 각 3×23cm  작가 및 개인 소장




1996년, 윤석남은 ‘핑크룸’ 시리즈를 선보였다. 히스테릭하게 형광 핑크로 칠해진 벽, 바닥에 촘촘히 깔린 붉은 구슬, 거기에 서 있는 갈고리를 단 화려한 핑크색 의자는 누가 봐도 시각적인 불편함을 주기위한 장치였다. “핑크룸에 선보인 의자는 서양의자에요. 여기에 한국 옷을 입혀보았죠. 한국 것도 아니고 서양 것도 아닌 그 모습이 뭔가 부엌에서도 방에서도 있지 못하는 나의 모습인 것 같았어요.” 중산층 여성의 현실을 은유하고자 했던 핑크룸의 설치 방식은 이후 블루룸(2010), 블랙룸과 화이트룸(2011), 그리고 최근의 그린룸(2011)까지, 다양한 룸 시리즈로 이어지게 된다. “‘여성과 노동’을 주제로 한 전시에 참여한 계기로 블루룸으로 옮겨가게 됐어요. 블루룸에서는 ‘바리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바리데기 이야기 아시죠? 버려진 아이가 죽음의 강을 건너 아버지 생명을 살려주고 떠나는. 전 바리데기가 무당의 시초라고 생각해요. 강을 모티브로 파란색을 생각했죠. 블루룸 작업을 하면서 사람의 일생을 색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블랙룸은 죽음을 표현한 했던 것이고 그 뒤에 화이트룸 작업을 시작했어요. 죽음은 어쩌면 빛이 아닐까. 죽음 이후의 생,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핑크룸 IV(Pink Room IV)> 1995 혼합매체 

가변크기 4개의 에디션 퀸즈랜드 갤러리, 

타이페이 뮤지엄, 경기도미술관, 작가 소장  




그리고 일흔이 넘어서 도착한 그린룸(2011). 그린룸은 녹색 한지를 꽃, 새, 나무 형상으로 오려내 벽 가득 붙인 후, 바닥에 영롱한 구슬을 깐 공간설치작업이다. 녹색 테이블과 의자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연꽃을 그려 넣어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니까 여성, 노동, 삶과 죽음을 고찰한 작가가 도달한 답은 바로 자연과의 화해였다. 이때 윤석남의 나이는 74세였다. (윤석남이 생태주의적 관심을 키워왔다는 사실은 1,025개의 유기견을 형상화한 작품 <사람과 사람없이>(2008)에서 명백히 먼저 드러난다. 작가는 김강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했다.) 올해 나이 75살, 아직 한 번의 회고전 조차 개최하지 않은 윤석남은 역사 속 여성의 이야기에 관한 신작을 준비 중이다. 총 여섯 명의 여성을 주제로 하는 것을 목표로 거상 김만덕, 현대 무용가 최승희, 여류시인 허난설헌, 기생 이매창, 화가 나혜석, 황진이 등을 물망에 올려놓고 있다고 한다. 화업 평생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놓고, 또 다시 여성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주제를 감사히 받아들이겠단다. “평생 페미니스트로 불리고 싶어요.” 윤석남 이 세 글자는 그렇게 여성주의 미술의 역사와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윤석남




윤석남은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40대 늦깎이 화가로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어머니를 주제로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래, 평단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금호미술관에서 가진 <어머니의 눈>(1993) 등 10여회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다수의 단체전과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제 8회 이중섭미술상(1996)과 국무총리상(1997), 제 4회 고정희상(2007)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로서 한국 화단을 이끌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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