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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5 – 2016.8.14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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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조각과 영상의 확장영역



포르투갈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 조각가 후이 샤페즈(Rui Chafes) 2인전 <멀리 있는 >  관람객과 평자들 대부분은  전시의지배적인 특징으로 한결같이 어둠을 지적한다. 어둠은 자연스럽게 빛과 그림자를 소환한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샤페즈의 검은강철 조각들을,  조각들을 나타나고 사라지게끔 하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지각하게 된다.  빛과 그림자는 그러나 별도의 직접적인 인공조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빛과 그림자는 코스타가 설치한 다양한 스크린들로부터,  스크린들에 투영되는 프로젝터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시, 특히밝은 곳에서 전시되고 관람 되어야 하는 조각의 영역에서 어둠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둠 속에 조각과 영상이 동시에 배치될   둘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어둠 속의/어둠의 조각


철제 구조물과도 같은 샤페즈의 조각들은  형태들에 따라 추상과 구상, 상징성과 물질성으로 분기되면서도   사이의 엄밀한 구별을 무효화시킨다. 1층에 포진한 <나는 춥다>(2004) 이스라엘의 감옥 문에 대한 샤페즈의 기억을 표현한 것으로 의자 위에 창살과 틈이 새겨진 철문을 올린 것이다. 감옥이 환기시키는 폐쇄성, 비가시성, 고독은 그러나 이것은 감옥 문이다라는  작품의 지시어를 넘어 강철의 물성을,  견고한 물성과 미묘한 대비를 이루는 문의 얇은 두께와 의자의 앙상함을 지각할 때만 체험할  있다.  점은 17개의 철제 의자 구조물 표면에 찢긴 듯한 부분을 하나씩 섬세하게 돌출시킨 < 영혼의 이야기>(2005)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제목이 연상시키는 사라진 자의 들리지 않는 (또는 말하지 않은) 독백, 유령의 비가시적 현전, 그리고 그들의 내적 상처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17개의 구조물이 어우러져 형성하는 육중함의 감각을, 개별 구조물로 가까이 접근하여 주의 깊게 바라볼 때만 간파할  있는 틈새의 질감을 통과해야 한다. 


고해성사가 이루어지는 고백소의 통기구와도 같은 칸막이 구조물인 <내가 어떻게 떠는지 보라>(2005)에서도 비가시성과 가시성의 미적 재배치는 연장된다. 2 전시장 한가운데 놓인  작품은 겉으로는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칸막이들의 폐쇄성을 드러낸다. 통기구의 작은 틈들은 관람자가 칸막이들 안의 ( 사라진 , 영혼, 또는 유령) 바라보기를 요청하면서 비가시적 침묵의 심연에 그를 대면시킨다. 추상과 구상, 상징성과 물질성의교차는 이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작품들은 물론 보다 초현실적인 형태를  조각들에도 적용된다. 자유롭게 뻗어 나가며 매달린 철제 구조물들에 작은 원형의고리가 달린 <너의 손들> (1998/2015), 그리고 구형의 물체들에서 뻗어 나간  개의 곡선 조형물인 <보이지 않는 >(2013)에서 형태가 가진 상징적 가치는 구조물들의 질감과 매달림의 가벼움 모두에 대한 지각을 전제한다. 조르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대표작 <어느 날의 수수께끼>(1914)에서 광장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표현한 <조르조  키리코의 그림자>(2013)에서 그림자의 고독은 길게 뻗은  개의 뾰족한 구조물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구형 받침의 육중함에서 파생된다.   


어둠은  모든 것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지평이자  모든 것들의 표현 대상이 된다.  추상에서 구상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상징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 관람자는 전시장을 뒤덮은 어둠을 체험하고 검은 철제 구조물들 표면을 뒤덮은 어둠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샤페즈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어둠속의 조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전시장 외부의 밝은 공간에 설치되었더라도) ‘어둠의 조각이다. 전시장을 뒤덮은 어둠은 조각 자체의 형태와 재료, 무게감에 대한 즉물적인 지각을 넘어선 지각을 요청한다. 어둠 속에서 철제 구조물들의 표면과 형태는 가려지는 동시에 영상 작품들에서 새어나오는 어렴풋한빛과 그림자들 속에서 다른 모습들을 드러낸다. 이처럼 어둠과 어슴푸레한 , 그림자의 개입을 통해 형태와 재료의 즉물적 대상성을 넘어서려는 샤페즈의 관심은 나는 대상을 믿지 않는다. 나는 물체를 만들고 싶지 않다라는 그의 단언에서 찾아볼  있다. 


이러한 단언을 전시 도록에서 김정현이 지적한 대로 조각의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 말할 수도 있다. 적어도 대상의 견고함을 용해시키고 관람자와 전시 공간, 조각적 구조물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 구성되는과정(process)으로서의 조각을 정립하려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이후 현대조각의 지속적인 관심사라는 관점에서보자면  말은 옳다. 하지만 샤페즈는 예술적 대상의 탈물질화라는 커다란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어둠과 어슴푸레한 , 그림자를 구조물의 일부로 삼음으로써 자신만의 변별성을 확립한다. 보이지 않음 속에서 보이게 되는 물성과 형태, 그리고  물성과 형태로부터 그림자처럼 찰나적으로 드리우는 상징적 의미들이 이러한 변별성을 확립하는 조건이 된다. 이는 어둠 속의 조각 물론, 그림자와 어둠이라는 만질  없는 환영을 표현하면서 밝은 공간에 육중하게 자리한어두운 조각’(<조르주  키리코의 그림자>, <블랙아웃>(2014))에서도 마찬가지다.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

 <작은 소년, 작은 소녀(MININO MACHO MININO FEMEA)> 

2005 비디오와 사운드 60 포르투갈 

세할베스 미술관(Museu de Serralves) 소장




조각과 초상화 사이의 영상


코스타가 설치한 영상들은 그의 영화들에서 추출한 장면들(<용암의 > (1994)에서 추출한 <불의 >(2015), 그리고 <행진하는 청춘>(2006)에서의 <벤투라 알로 쿠텔로> (2012), 그리고 작년에 해외에서 열린 2인전 <파밀리아> 전을 위해 제작한 작품(<불의 딸들>(2015))이다. 화산이 활동하는 풍경을 제시하는 <불의 > 제외하자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일종의 비디오 초상(video portrait) 가깝다. 일정한 지속시간을 두고 인물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제시된다.  여기에는 무빙 이미지(moving image) 본질적인 미적 경험인 지속,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이 사실상은 미세하게 진동함에도 불구하고 관람자에게던지는 정지의 경험이 공존한다. 정지의 경험이 초상화나 초상사진에 해당된다면 이는 코스타의 영화가 수행했던 정치적인 것의 미적 재분배라는 기획과 연결된다


<행진하는 청춘>에서 빈민 이주노동자인 벤투라는 자신이 건축노동자로 건축에 참여한 미술관에 방문하여 그곳에 전시된 17세기 초상화와 대면한다. 초상화 옆에 고독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내보이는 벤투라의 -정지된 듯한 모습은 전통적 미술관이 상정하는 작품과 작품 아닌 , 예술과 , 이상적 관람자와 배제된 자의 간극을 드러내면서 벤투라를 초상화의 인물들과 급진적으로 등치시킨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코스타의 영화에서 간파한 이러한 급진성을 <벤투라 알로 쿠텔로> <불의 딸들>에서 찾을  있다. 벤투라는 물론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평범한 남녀의 클로즈업이 전시장에서 정지와 운동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기념비적 가치를 발산한다.


중요한 것은  비디오 초상들이 샤페즈의 조각과 차이를 이루면서 교감하는 방식이다. 샤페즈는 코스타의 영화에 대해 빛으로 만든 실체가 아닌 것들이 굉장히 물질적인, 실체가 있는 강철로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 말한  있다.  점은 강철을 즉물적 대상성과 다르게 탈물질적으로 취급하는 샤페즈의 작업과 정확히 호응한다.  비디오 초상들이 전시하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않는 인간의 얼굴, 침묵 속에서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 얼굴이다.  견고한 부정성은샤페즈의 조각이 표현하는 어둠과 대화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있는가라고 관람자에게 질문한다. 아마도 그것은 구체적인 감정의 표현 이면의 표현적 역량으로 충만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역량을 함축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본원적 잠재성(potentiality) 지도 모른다.  잠재성은 피부의 표면과  미세한 떨림이라는, 비물질적 이미지의 물성으로 표현된다. 바로   때문에 정지 카메라의 단순한 클로즈업으로 만들어진 코스타의 비디오 초상은 비디오 테크놀로지의 역량으로 감정의 표현을 가시화하는  비올라의 작업, 그리고 비디오 초상의 방법론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간을 인류학적으로 탐구하는 피오나  등의 작업과도 구별된다. 



조각과 영상의 확장영역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전시의 담론과 실천에서 조각과 영상은 갤러리라는 공통의 공간을 점유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플랫폼 위에서 구성되고 수용된다. 조각은 밝음을 필요로 하는 화이트 큐브라는 플랫폼을, 영사를 수반하는 필름  비디오 설치작품은 블랙박스라는 플랫폼을 가진다. 그룹전과 같은 대부분의전시 기획은   플랫폼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지 않게끔 배치한다. 그러나 <멀리 있는 > 조각과 영상을 공통의 어둠으로 뒤덮으면서   매체 형태를 하나의 공간에 배치한다. 어쩌면 어떤 이는 영상의 플랫폼이 조각의 플랫폼을 흡수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샤페즈는대상의 고정성과 가시성을 거스르는 자신의 구축물들을 보기 위해 관람객에게 시간과 인내심을 가지면 모든 것을   있게 된다라고 주문한다.  공간적예술로서의 조각이 전통적으로 수반하는 미적 경험과는 대비되는 지속의 경험을 요청한다. 


그런데  지속의 경험은 시간기반(time-based) 예술로서의 영화와 비디오에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 또한 지적할 필요가 있다. 어둠 속에 설치된 코스타의 작품들은 조각의 플랫폼이 구현하는 미적 경험들 속에서 단순한 영상이 아닌 영상 설치로 자리한다. 커튼처럼 배열된 <불의 딸들> 스크린을 형태와 재질, ()투명성을 가진 조형적 대상으로 물질화하는 동시에 관람자에게 신체에 대한 지각을 활성화한다. < 영혼의 이야기> <불의 > 위한 관람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독립적인 실체로서 눈으로  것을 요구한다. <내가 어떻게 떠는지 보라> 칸막이와 환기구는 멀리서 보면 <벤투라 알로 쿠텔로> 가로막는 벽처럼 자리한다. 


이처럼 <멀리 있는 >전에서 어둠은 전시기획의 말대로 조각과 영상 이면의 관념이 공진하는 인터페이스다. 그러나 이러한 공진 또는 상호 교감은 조각과영상 각자가 유지한 매체 특정성(medium specificity)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전제한다. 샤페즈의 조각은 빛과 대립되는 어둠을, 코스타의 영상은 비물질적 환영의 운동성과 대비되는 물질성과 정지를 소환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매체 특정성을 지탱한 대립들을 문제시하고 조각과 영상의 미적 표현 가능성을 넓힌다는 점에서 <멀리 있는 > 어둠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제시한 확장영역(expanded field)’ 구체화한다. 


중요한 점은  확장영역이 조각과 영상의 단순한 공존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평론가 조지 베이커(George Baker) 크라우스의 확장영역 개념을 평가하면서  영역에서는 매체 특정성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세계, 나아가 예술과 문화적 장이 새롭고도 상상할  없었던 관계를 맺는다라고 지적한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멀리 있는 >전에서 샤페즈의 조각과 코스타의 영상은  자체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조각과 영상의 기존 전제들을 문제시하면서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간다고   있다. 어둠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확장영역을 개방한다.                       



* 후이 샤페즈(Rui Chafes) <내가 어떻게 떠는지 보라(See How I Tremble)> 2005 강철 241×372×117cm 포르투갈   세할베스 미술관(Museu de Serralves)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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