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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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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 of The Sublime

‘숭고’는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는 경외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위대함’이나 ‘웅장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이해되어 왔다. 17세기부터 숭고의 개념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감정들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특히 자연경관에서 받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롱기누스(Dionysiu Cassius Longinus)와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글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국 예술가와 작가들은 무려 400여 년 동안 이 문제를 탐구해왔다. 숭고는 정확히 무엇일까? 사물, 감정, 사건 또는 마음의 상태인 걸까?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던 이 개념을 확실히 정립해보고자 이번 특집을 기획했다. 우선 미술사적 맥락에서 발전하고 다듬어진 ‘숭고’의 의미를 살펴보는 글로 포문을 연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아름다움’과 숭고의 접점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는 동시대 예술에서 드러나는 ‘숭고’와 이에 대한 다양한 감상 등에 대해 다룬다. 긴 시간 동안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아 온 숭고의 역사를 지금 여기서 재구성한다.
● 기획·진행 정송 기자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 'Anatomical Walking' 1968-1969 브론즈 148×1200×60cm
서울미술관 '노벨로 피노티: 본 보르조'(2015.2.28-2015.5.17) 사진제공: 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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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의 역사 - 롱기누스에서 리오타르까지_임성훈 

 

SPECIAL FEATURE 

아름다움과 숭고_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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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에서 ‘황당’까지_김병수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The Nose> 

1947 Plaster 43.6×9×61.6cm Fondation Giacometti, Paris 

 Succession Alberto Giacometti/2018, ProLitteris, Zürich  


 




Sepecial feature 

숭고의 역사 - 롱기누스에서 리오타르까지

● 임성훈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미학

 


숭고란 무엇인가? 흔히 숭고를 성스러움이나 신비스러운 것 또는 장엄하거나 우아한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숭고에 이러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숭고는 어원인 그리스어 휩소스(hypsos), 이를 번역한 라틴어 수블리미스(sublimi) 그리고 독일어 다스 에어하베네(das Erhabene)나 영어 더 서블라임(the sublime)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높은 것, 고양되는 것, 상승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미학에서 숭고란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광활한 것, 거대한 것, 엄청난 것, 무한한 것 등을 마주 대할 때 생겨나는 고양과 상승의 감정이나 경외나 놀람의 마음 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글은 롱기누스에서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에 이르는 숭고 개념의 핵심 쟁점과 주제를 간략하게 서술해보고자 하는 한 시도이다. 


여기서 지면 관계상 숭고 개념의 변천사를 상세히 설명할 수도 없고, 숭고를 논의한 미학 사상가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미와 더불어 숭고 개념이 미학사에서 어떻게 논의되어 왔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숭고는 오랜 역사를 지닌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숭고에 관한 체계적인 서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의 대화편 『국가』, 특히 「제10권」은 숭고와 관련해서 숙고해 볼 만한 여러 논점을 제공한다. 플라톤은 그리스 최고의 비극 시인인 호메로스(Homer)를 사랑하고 공경하지만, “진리에 앞서 호메로스가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 시인이 이데아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철학과 시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2)는 그의 언급은 높은 이데아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와 황홀경에 빠진 채 신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시인 사이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또한 숭고를 주제로 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시학』에서 비극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하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3) 여기서 카타르시스가 무엇을 뜻하는 개념인지 분명히 밝혀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실상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 이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극의 효과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카타르시스는 현실의 경험이 상승되고 고양되는 숭고와 연관해서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여지를 주는 개념이다. 





루카 캄피조토(Luca Campigotto) 

<Perito Moreno Glacier, Argentina> 2000 

Pigment print 293/8×72inch (framed) Signed, titled, 

dated and editioned on label verso #5/1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서 숭고에 대한 논의의 단초를 찾을 수는 있지만, 본격적인 숭고에 대한 논의는 3세기의 수사학자인 롱기누스가 저술한 『숭고에 관하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롱기누스는 “마음은 본성상 진실로 숭고한 것에 의하여 고양”4)되고 “숭고는 고상한 마음의 메아리”5)라고 말하면서 과연 무엇이 “숭고한 표현”인지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이 현실과는 다른 “높이”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저 높은 세계, 달리 말해 무아의 세계로 고양과 상승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은 롱기누스 숭고론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롱기누스는 숭고를 미학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문체로 숭고를 잘 표현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수사학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숭고를 무한하고, 경이로우며 엄청난 것과 연관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롱기누스의 숭고 개념은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근대의 숭고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1674년 브왈로(Nicolas Boileau-Despréaux)는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를 불어로 번역한다. 이후18세기 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들이 미와 더불어 숭고 개념 또한 중요하게 다루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숭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의 숭고는 주로 “예술적 체험이 아니라 자연적 체험과 결부되었고”, 이러한 체험은 “무형의 것, 고통스럽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관심으로 이어졌다.6) 당시 숭고는 특히 여행가들의 체험을 서술한 산악 미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이국적인 것, 흥미로운 것,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특이한 것, 놀라운 것” 등에 대한 미학적 관심이 숭고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던 것이다. “우리가 ‘산의 시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알프스 산맥 횡단 모험에 뛰어든 여행가는 아무도 지나지 않은 바위들, 끝도 없는 얼음덩이들, 끝없는 심연, 경계 없는 드넓음에 매료되었다.7) 


자연 대상을 바라보는 주관의 감정은 아름다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들판에 피어 있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엄청난 현상들, 예를 들어 폭풍우나 망망한 대해, 격동적인 파도 등을 바라볼 때 주관의 마음속에 환기되는 것은 아름답다는 것과는 다른 어떤 감정이다. 근대 미학은 이러한 감정을 미 개념과 구분하여 숭고 개념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근대 미학에서 숭고는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자연 현상과 관련해서 논의된다. 특히 18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미와 더불어 숭고에 대한 논의를 많이 펼쳤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론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실상 버크 이전에는 미와 숭고를 확연하게 구분하여 논의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대상의 엄청난 크기 또는 위력적인 힘에서 환기되는 쾌를 미와 구별하여 숭고의 감정으로 파악한다. “고통과 공포가 실제로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게 된다면, 고통이 폭력으로 옮겨가지 않고, 공포가 당장 사람을 파괴할 정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감정들은 () 위험하고 해로운 장애물의 모든 부분을 치워버리기 때문에 즐거움을 산출할 수 있다. 이것은 쾌는 아니지만, 일종의 즐거운 공포, (또는) 일종의 공포로 물든 평온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보존에 속하는 것이기에 모든 정념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이다. 그 대상은 숭고이다.8) 버크에 따르면, 예컨대 광활한 산의 모습이나 폭풍우 치는 바다의 풍경은 사람들에게 공포, 위험, 고통 등과 같은 두려움을 유발하지만, 그럼에도 안전한 곳에서 그것을 관조할 경우 쾌가 환기된다. 숭고는 즐거운 공포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혼합 감정으로서의 쾌라고 할 수 있다. 공포나 고통에 따른 위험이 실제로 자신에게 가해질 경우, 숭고의 감정은 일어나지 않겟지만, 안전한 곳에서 그것을 관조할 경우 숭고의 감정이 불러일으켜 지는 것이다.  




요한 크리스찬 달(Johan Christian Dahl)

 <View of the Feigumfoss in Lysterfjord> 

1848 Oil on canvas Collection of Asbjørn Lunde





근대 미학에서 숭고와 관련해서 중요한 체계를 마련한 철학자는 칸트(Immanuel Kant)였다. 칸트는 자신의 세 번째 비판서인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는 우선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한다. 수학적 숭고는 대상의 크기에서 환기되는 감정과 관련된다. 측정할 수 없는 크기를 지닌 대상과 마주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상상력만으로 그 대상을 다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그러한 대상 앞에서 자기 한계를 느낀다. 칸트는 인간의 이러한 자기 한계가 곧 숭고의 감정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엄청난 크기의 대상을 자신의 지성과 상상력의 표상으로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한편으론 무기력한 존재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이 무기력함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현상 속에서 지성과 상상력만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상상력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 그 속에 머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가장 초라한 곳에서 오히려 가장 높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학적 숭고는 대상의 위력에서 환기되는 감정과 관련된다. 자연의 위력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안전한 곳에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으로 인해 공포에서 벗어나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 “마치 위협하듯 대담하게 높이 솟아오른 암석, 번개와 천둥소리를 동반하면서 층층이 높이 피어나는 먹구름,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는 화산들, 폐허를 남기고 가는 태풍, 파도가 치솟은 끝없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것들의 위력과 비교할 때 보잘 것 없이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상태에 있기만 하다면, 그런 것들의 광경이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우리의 마음을 더욱더 끌 뿐이다. 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기꺼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영혼의 힘을 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 고양시키고,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 능력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 저항하는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외견상 절대적으로 보이는 자연의 강제력에 맞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9)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숭고는 대상 그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또한, 미에서 상상력은 지성을 파트너로 삼지만, 숭고에서 상상력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이념을 파트너로 삼는다. 그러기에 숭고의 감정은 도덕적 이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토시오 시바타(Toshio Shibata) 

<Okawa Village, Kochi Prefecture> 

2007 Type-c print 38 3/4×46 1/2 inch 

(framed) signed, tilted, dated and editioned on label, verso 

AP from a sold-out edition of 10

 




19세기 낭만주의 미학 이후 숭고 개념에 대한 논의는 그리 활발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부분적으로 숭고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뿐, 본격적으로 연구되지는 않았다. 현대 미학 및 예술론에서 숭고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고 이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를 수행한 사상가는 바로 리오타르이다. 리오타르는 특히 칸트의 숭고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중요한 함의를 숭고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숭고란 무엇인가? 숭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presenting the unpresentable)”이다.10) 그런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인가? 숭고와 현대예술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리오타르는 자신의 글 “숭고와 아방가르드”에서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48년에 쓴 유명한 에세이 「The Sublime is Now」를 언급하면서 숭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11) 리오타르에 따르면, 숭고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that something happens), 달리 말해 “존재의 사건성”과 관련된다. 


이성적 사유는 기껏해야 사물의 존재를 분석할 수 있을 뿐, 사건성으로서의 존재를 해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술이 이러한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없다. 실상 존재는 설명될 수도 없거니와 표현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운명적으로 표현해야만 하지 않은가? 여기서 리오타르의 숭고론을 이해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발생한다. 우선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들어보자.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저곳에, 달리 말해 다른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있다. () 그림을 그리는 것, 일어남이나 사건으로서의 회화는 표현될 수 없다. 회화는 이처럼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해야만 한다.12) 회화는 존재의 사건성이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는 리오타르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넷 뉴먼의 작품을 보자.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그의 그림 앞에 선 감상자는 대체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감상자는 그림을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보아도 뭐가 뭔지 모를 상황에 빠지게 된다. 거대한 캔버스는 종합적이고 통일적으로 감상자의 주관 속에 오롯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데 감상자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투덜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사건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충격이 소환된다. “예술은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숭고의 미학에 힘입어 강렬한 효과를 발휘하면서 나아가야 하고, 그저 아름답기만 한 모델들을 모방하기를 포기할 수 있고, 포기해야만 하며, 놀랍고, 낯설고, 충격적인 구성을 시도할 수 있고 시도해야만 한다. (그것은) ()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 아직은 (존재가) 박탈당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 특별한 충격이다.13) 실상 존재는 표현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술은 표현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된 것은 존재가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은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함으로써 존재가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곧 존재가 아직은 박탈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술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이러한 존재의 모순적인 상황을 감상자의 심상에 “특별한 충격(shock par excellence)”으로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예술에 내재된 숭고의 계기이다.   

 

[각주]

1) 플라톤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7 pp. 611-612.

2) 위의 책 p. 637.

3)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6 p. 49. 

4)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06 p. 282. 

5) 위의 책 p. 287.

6) 움베르코 에코 『미의 역사』 이현경 옮김 열린책들 2006 p. 281.

7) 위의 책 p. 282.

8) Edmund Burke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1756 Part IV, Section VII.

9)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 B104.

10) J.-F. Lyotard Presenting the Unpresentable: The Sublime」 『Artforum April 1982 p. 64. 

11) J.-F. Lyotard The Sublime and the Avant-Garde」 『The Inhuman: Reflections on Tim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1.

12) 위의 책 p. 93.

13) 위의 책 p. 100.

 

 

글쓴이 임성훈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석사(M.A.)와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교양학부에서 미학, 미술사, 미술 이론 등을 가르치고 있으며, 현대미술학회 회장, 부산비엔날레 학술위원, 마을미술프로젝트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칸트 미학이 대중의 현대미술 감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가?, 「도시미화와 예술」, 「예술은 철학이 되었는가?, 「미술과 공공성」 등이 있다.

 


 


알리슨 글렌 <Burning Tree> 2017 

Acrylic and oil on canvas 49 1/2×75 1/2inches

 


 


Special feature 

아름다움과 숭고

● 김동훈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오랫동안 아름다움과 숭고는 서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되어 왔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대개 숭고는 아름다움의 한 갈래로 여겨진다. ‘숭고미’, ‘장엄미’ 같은 표현들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의 현대예술 담론에서는 두 용어를 완전히 분리하여 다룰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하기까지 한다. 숭고하다고 일컬어지는 많은 현대예술작품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고대 그리스어로 아름다움을 뜻하는 단어는 칼로스(kállos). 이 말에는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경험한 사람은 그로부터 언제나 기쁨이나 감동, 즐거움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얻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아름다움은 비례, 조화, 균형 등 대상의 특정한 성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대상의 특징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황금분할의 비례나 팔등신의 비율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아름다움을 대상의 객관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기에 이러한 주장을 펴는 이론을 아름다움의 ‘대()이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의 본질적 속성에 대해 모든 이들이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나 소피스트(Sophist), 근대 영국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 같은 이들은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대상을 접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긍정적 감정 자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제시된 여러 주장을 종합해 보자면,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정의한 바와 같이 아름다움은 “보거나 들을 때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그때 우리가 대상에서 발견하게 되는 속성은 “1) 명료함, 2) 완전함, 3) 조화로움”과 같은 것이었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면서, 갖추어야 할 속성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고, 그 구성요소들이 서로 조화롭게 일치하는 대상들에게서만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언제나 긍정적 감정이 불러일으켜진다는 것이다.






노벨로 피노티 <Ritual> 

1984 White carrara marble 48×33×43cm  





반면 숭고는 명료함이나 완전함, 조화로움과는 우선 매우 거리가 멀었다. 숭고하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대부분 조화롭지도, 균형 잡혀 있지도 않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말로 숭고라는 말이 가장 자주 쓰이는 경우는 국가나 민족을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릴 때다.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같은 표현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는 그들의 행위나 내면의 상태 어디서도 비례, 조화, 균형과 같은 성질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면서 느끼게 되는 —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 극단적으로 고조된 감정만을 발견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숭고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했던 휩소스(hypsos)라는 말도 원래는 한껏 고양된, 열정적인 감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상태가 지속될 경우 인간은 매우 큰 고통을 느끼게 되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일상적인 평온한 감정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런 고양된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대상이나 상황들도 명료하거나 완전하지 않으며 그 구성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지도 않다. 엄청난 규모의 화산분출이나 지진, 쓰나미라든지 광란의 도가니에 있는 폭풍우는 우리에게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자연현상이지만 거기서는 아무런 조화도, 명료함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들을 접할 때 우리는 그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어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직접적 위험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게 되어 느끼게 되는 안도감은 이러한 고통을 완화해 줄뿐만 아니라 감동이나 편안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댄 플래빈(Dan Flavin)

 <Untitloed (to Mary Ann and Hal with fondest regards) 2> 

1976 Green and pink fluorescent light 8ft

(squre across a corner)  2018 Estate of DanFlavin / 

Artists RightsSociety (ARS), New York.Courtesy David

 Zwirnerand PKM Gallery

 




아름다움은 언제나 잘 정돈되어 있고 한계를 넘어가지 않으며,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긍정적 감정도 일정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 언제나 긍정적이다. 예쁜 꽃을 바라보거나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숭고는 언제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한계를 넘어가 버린다.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감정도 그렇다. 한껏 고양된 감정 상태는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지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너무나 큰 희열 자체가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에 수반되는 결과가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느끼는 너무도 벅찬 감동이 죽음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후자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좋아 죽겠다’든가 ‘행복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는 표현은 끝 간 데 없이 치솟은 감정이 원래는 긍정적이라도 그 자체로 부정적 감정을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성행위 때 느끼는 절정의 감정을 프랑스 사람들은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극도로 긍정적인 감정이 극도로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들은 완화되어도 역시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지니게 된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엄청난 위험을 수반하는 자연현상의 경우 처음에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부정적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에는 긍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처음에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Il Mistero delle Cattedrali> South Galleries and 9×9×

White Cube Bermondsey London 9 December 2011 - 26 February

 2012  Anselm Kiefer. Photo  White Cube (Ben Westoby)





앞서 보았듯 대상의 객관적 성질 면에서 아름다움과 숭고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숭고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은 처음의 격렬한 감정이 일상의 평온한 감정으로 회귀할 때뿐이다. 먼저 느꼈던 강렬한 감정이 긍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면 다시 돌아와 느끼게 되는 평온한 감정에도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계속 담겨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에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긍정적인 감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를 기리는 축제에서 느꼈던 황홀경 뒤에 찾아오는 무언가 후련한 기분을, 배설행위 뒤에 느끼는 기분과 유사하다고 느껴서 의학용어로 배설행위를 뜻하는 카타르시스로 지칭하기도 했다.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관객들이 공연이 끝난 뒤에 느끼게 되는 비슷한 감정도 이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오늘날에도 숭고의 감정이 카타르시스와 함께 다뤄지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러한 배경을 통해서 잘 설명될 수 있다. 이로써 오랫동안 숭고가 아름다움의 하위개념으로 간주됐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처음에 느꼈던 격렬한 긍정적 감정이 완화되거나 부정적 감정이 긍정적으로 전환된 경우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긍정적 감정이 우아함이나 세련됨, 어여쁨의 경우에 느끼는 긍정적 감정과 동일한 종류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숭고미, 장엄미와 같은 표현을 써서 — 그대로 내버려 두면 엄청난 위험이나 고통,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초래할 수 있는 — 위험천만한 감정에 재갈을 물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아함이나 부드러움, 세련됨에서 느끼는 긍정적이기만 한 감정과 관련된 아름다움과 숭고미, 장엄미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차이에 주목한 최초의 학자들이 근대미학의 태동기 영국의 취미론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 인물이 바로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의 저자 에드먼드 버크다. 그는 아름다움을 어떤 특징을 갖춘 대상에게서 직접 느끼게 되는 사랑의 감정, 숭고를 자기보존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위험하고 위협적인 대상에게서 느끼게 되는 부정적 감정이 전환되어 느끼게 되는 일종의 안도감(delight)과 연결시켰다. 칸트도 『판단력 비판』에서 버크의 뒤를 따라 아름다움과 숭고를 별개로 다룬다. 물론 그에게서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로 논의의 초점이 이동한다. 특히 숭고의 경우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극복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위대함에 대한 발견이 처음에 느낀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전환하는 원인 제공자의 역할을 한다. 





스펜서 핀치(Spencer Finch)

 <Sky (Over the North Atlantic at 35,970 feet, October 29, 2007)> 

2007 Fluorescent tube lights, fixtures and filters 48×48inches 

Hall Collection Courtesy Hall Art Foundation Spencer Finch  





하지만 버크나 칸트도 아름다움이든 숭고든 긍정적 감정을 유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만을 유발하는 것은 추하거나 끔찍한 것이며 철학적인 성찰의 대상이 될 수도, 예술적 형상화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사용될 뿐이었다. 『추의 미학』을 저술한 로젠크란츠(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조차도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예술작품에서 추함의 용도는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역할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추한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 아름다운 것이 () 추한 것과 맺는 이러한 내적인 관계는 추한 것이 다시 지양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를 제공한다. () 이런 과정 가운데서 아름다운 것은 폭동을 일으킨 추한 것을 다시 자신의 지배 아래 굴복시키는 힘으로 드러난다.1) 


전혀 흔들림 없던 이러한 전통적 견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적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추구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낭만주의를 거쳐 예술을 위한 예술, 유미주의를 추구했던 이들은 이전에 아름다움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진리나 선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악함이나 비-진리를 예술작품의 전면에 부각시키게 된다. 그 결과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들이나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시처럼 추하거나 끔찍하고 잔인하거나 섬뜩한 내용을 다루는 예술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이후 20세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작품이 더욱 많이 등장하게 되며, 예술성을 인정받는 위대한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특성을 띠게 된다. 문제는 이런 작품 중 상당수가 감상자들에게 더는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작품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이것들이 형상화하는 내용이 기존의 인식적, 도덕적 한계를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Installation view 

<Sublime Seas: John Akomfrah and J.M.W. Turner> 

SFMOMA 2018  

Photo: Katherine du Tiel Courtesy SFMOMA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제시한 디오니소스적 열광의 개념이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발견한 무의식 등이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현대예술작품들의 이런 특징을 사람들은 전통적인 숭고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숭고로 규정하였다. 이제 숭고는 그리스어 휩소스가 원래 지니고 있던 ‘한계를 벗어난, 신들린 듯 끝 간 데 없이 높아진 감정’이라는 뜻만을 지닌다. 물론 불쾌함과 고통을 주는 작품이 모두 숭고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어떤 작품을 숭고하다고 판단할 때는 인간이나 삶, 우주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작품 속에 담겨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꼭 종교적·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끝없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장면만으로 가득 찬 폭력영화는 숭고한 작품이라 불리지 않는다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20세기 이후 현대예술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대중예술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아름다움이 자주 추구되지만, 거기서 뛰어난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아름다운 외모와 아름다운 경치를 찬탄해 마지않고 열렬하게 추구하기도 하지만, 소위 진지한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포기한 지 이미 꽤 오래되었다. 심지어 예술성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하는 작가들의 작품에는 ‘키치(Kitsch)’라는 불명예스러운 레이블이 붙여지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21세기 예술은 숭고의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프랑스 현대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말처럼 “숭고는 지금 유행 중이다(Le sublime est a la mode)!  

 

[각주]

1) Karl Rosenkranz, äesthetik des Hässlichen, Königsberg, Verlag der Gebrüder Vornträger, 1853, p. 7.

 


글쓴이 김동훈은 서울대 법대, 총신대 대학원,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브레멘 대학 철학과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한예종, 경희대 등에 출강하는 한편 미학, 정치철학, 감정 철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행복한 시지푸스의 사색』, 『발터 벤야민: 모더니티와 도시』(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숭고와 아름다움의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헤겔의 눈물』 등이 있다.


 



윤형근 <청색

1972 캔버스에 유채 70×69.7cm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윤형근>(2018.8.4.-2018.12.16.)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Special feature  

숭고에서 ‘황당’까지

● 김병수 미술평론가

 


숭고의 양적 기준


미는 질적이고 숭고는 양적이라고 배운 적이 있다. 그래서 크기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서 거대한 산이나 파도 그리고 위대한 인물의 동상 등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기준이 문제였다. 얼마나 커야 숭고한가! 이와 관련해서는 1960년대 미국 작가 바넷 뉴먼과 함께 논의를 하는 게 유리하다. 특히 ‘누가 빨강, 노랑 그리고 파랑을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라는 대형 연작들을 통해 숭고의 담론이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빨갛고 노랗고 파란 선들로 이루어진 연작들이다. 그러한 기념비적 작업물이 전시되었을 때, 관람자들이 그것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게 배치되었다고 한다. , 그림 전체를 한 번에 조망하기 어렵도록 작품들이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관점(perspective)은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관람자들이 작품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간격을 두고 서 있을 수가 없었을 경우, 관람자들에게 그 그림은 결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기호 같은 것이 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미적 거리가 심리적인 것에서 물리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숭고의 규정과 위장


우리는 세계의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에 관한 예를 보여줄 수는 없다. 존재의 총체성을 이해하지만 그 사례를 제시할 능력은 없다. 지도나 사전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이때 현대미술이 작동하다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지적한다. “사유할 수는 있지만 보이게 하거나 가시화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시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현대회화가 내건 핵심이다.” 이어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즉 “그것은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만 볼 수 있도록 만들며, 고통을 야기함으로써만 기쁨을 주는 것이다. 


가시적 서술을 통해서 서술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암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지침들은 예술가적 아방가르드의 공리로서 재인식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제를 주장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체계와 논거들은 물론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들은 숭고의 규정과 연관되어서만 형성될 수 있었는데, 이는 또한 숭고의 규정을 정당화, 즉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일면 변태스러운 논설이지만 개념과 현실 그리고 숭고의 관계에 대한 현대미술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대목이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Figure With Meat> 

1954 Oil on canvas 129.9×121.9cm Harriott A. Fox Fund,

 1956. 1201. Chicago (IL) Art Insitute of Chicago 

 2017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 Art Resource, 

NY/ Scala, Florence  The Estate of Francis Bacon. 

All rights reserved / 2018, ProLitteris, Zurich  

 



숭고와 아방가르드


숭고와 아방가르드가 현대미술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봉건제국은 ‘민중을 위한 공화국’이 되었다. 레닌(Vladimir Lenin)은 아방가르드 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매체를 개발함으로써 거의가 문맹인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때 모험심 넘치는 화가들은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혁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다. , 20세기 초 러시아의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과학 기술의 진보와 함께 진행되고 마침내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하얀 배경 위에 떠있는 사각형을 비롯하여 전면 백색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당시 어떤 작품보다도 혁신적으로 미술을 단순화했다. 형태와 색채들을 어떤 구체적인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음악의 악보처럼 수수한 추상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과연 다양한 아방가르드 미술이 현실에 대한 믿음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오히려 그러한 조형 기법들이 현실을 천시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 지점에서 리오타르는 다시 지적한다. “사유가 관점의 지배에 예속되고, 사유의 방향을 서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전환시키도록 하는 서술의 (예술) 수단들을 부단히 찾아낸다.

 


조망 불가


독일 미학자 게오르크 베르트람(Georg W. Bertram)에 따르면 “예술을 조망 불가능한 기호로 바라보는 관념은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 주제를 요약하는 이름이 ‘숭고’라는 것이다. “숭고함이라는 현상에 대한 본격적인 작업은 18세기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서(즉 그가 롱기누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고대의 문헌을 연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칸트는 버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예술철학에서도 이런 점이 발견된다. 숭고함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장대한 산맥과 폭풍우 치는 바다가 바로 숭고한 자연의 사례들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조망이 일개 주관에게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칸트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주관은 자기 자신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의 압도적 크기는 인간의 포착 능력을 능가하며, 따라서 이러한 능력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칸트의 「숭고론」을 통해서는 아직 숭고함(조망 불가능성)이 한 작품의 구조화에 대한 이해를 중단하는 측면을 갖는다는 점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의 『판단력 비판』이 ‘목적론적 판단력의 비판’으로 마무리되는 바는 시사점이 크다. 종교의 목적론적 설명과는 달리 미학은 검토해볼 사항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현대미술에서 간과되기 쉽지만 숭고라는 이름의 뉘앙스는 ‘준 종교적’이라는 사실이다. 

 



주디 시카고 <The Crowning NP 3> 

1983 Needlepoint over painting on mesh canvas, 

35 1/2×51 1/2inches Hand painting assistance 

by Lynda Healy; needlepoint by Kathryn Haas Alexander 

Collection of the Florida State University Museum of Fine Arts


 


숭고와 종교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udwig Berger)는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가정은 틀렸다. 약간의 예외는 있겠지만, 오늘날 사회는 옛날과 다름없이 미친 듯이 종교적이다. 이것은 역사가와 사회과학자들이 대략적으로 ‘세속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연구 문헌 전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도 내 초기 저작을 통해 이런 연구에 기여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만 하는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2012년 런던의 화이트큐브에서 <대성당의 신비(The Mystery of The Cathedral)>라는 전시를 가졌는데 현장에 있던 나는 “엄청나게 큰 화면, 마치 대형 영화관의 스크린 같은 분위기 속에서 ‘독일식 우울’을 토해내고 있는데, 바로 거기가 야릇한 경이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듯했다”고 기록했었다. 이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자신만의 근대화론과 연관 지어 설명한 것을 떠오르게 한다.


“종교적 세계시민화는 신앙이 없는 자와 다른 신앙을 가진 자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상호 구별한다. 또 그를 자기 자신의 종교적 진리의 독점을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일단은 완전히 개인적인 의미의 재산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통상적인 상태로 받아들인다.” 나도 안젤름 키퍼의 당시 작품을 보면서 유사한 체험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작업은 같은 제목의 출판물에서 따온 것이다. 풀카넬리(Fulcanelli)라고만 알려진 프랑스의 저술가가 남긴 1926년의 책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의 조각들에 보이는 연금술적 상징성을 연구한 것이 담겨있다. 물론 키퍼의 작업이 문자 그대로 그 책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암시적인 효과를 위한 이미지로 차용된 것은 아닐까. 신비스러운 것과 물질적인 것이 접속하는 어떤 체계에 대한 암시로 말이다. 이는 안젤름 키퍼가 지속적으로 보여 온 연금술에 대한 흥미를 통한 유추이다.

 


역사와 숭고


그리고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풍경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좀 더 명확히 표현하면 엄청난 크기의 잿빛 풍경화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 미적 체험은 극심하게 혹은 가혹할 정도의 물질성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각각의 요소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전시된 작품들은 심하게 산화가 진행 중이었는데 지금은 상태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숭고를 환기시키는 이미지들이 스스로 미묘함의 주체로 변신하는 경지라고 기술했었다. 이렇게 자연의 강력한 힘을 작품을 끌어들이는 것 또한 안젤름 키퍼의 오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러한 연금술적 방법은 20세기 독일의 역사를 다루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2012년 전시작 가운데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었다. 그 공항은 국가사회주의 표방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게르마니아의 세계  수도’의 상징이었으나 이후 패전의 결과 동서독이 분단되고 옛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이른바 연합국인 서방이 공수작전을 펼쳤던 곳이다. 바로 그 장소를 그리고 2008년 이래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템펠호프를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서 묵시록적 성당의 모습으로 되살려냈던 것이다. 

 



마리 티볼트(Marie Thibeault) <Shield> 2017 Oil on canvas 

78×72inches <The Feminine Sublime>

(January 21, 2018 to June 3, 2018), 

Pasadena Museum of California Art, California, U.S.A.  





과학과 숭고


흔히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는 쇠퇴한다고 생각하는데,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종교는 조금도 쇠퇴할 기미가 안 보인다. 왜일까? 그 이유는 현대미술이 유사종교가 되고 미술관이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관람객은 미술관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고. 날씨의 변화는 거의 ‘마법적’이다. 2003년 10월부터 20043월까지 런던의 테이트모던 터바인 홀에 20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불러 모은 올라프 엘리아슨(Olaf Eliasson) <기상 프로젝트(The Weather Project)>는 매혹적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 강박에 대하여 보여준다. 캘리 그로비에(Kelly Grovier)의 묘사에 따르면 “광활한 계곡 같은 전시 공간에 초자연적인 존재처럼 떠있는 호박 빛 태양. 뿌연 연무로 가득한 공간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출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뭔가 서서히 소멸하는 듯 불길한 아우라는,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일몰이 틀림없다.” 


작가는 단순한 분무 시스템과 거울만으로 타들어가는 하늘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약 2만 와트의 나트룸 전등에서 방출되는 광채가 천장의 거울에 부딪쳐 반사된 후 다시 설탕과 물이 배합하여 이루어내는 연무를 거치며 밝기가 증폭된다. 그래서 “관람객들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햇살 속에 서 있는 천사(The Angel Standing in the Sun)>를 보았을 때처럼 농후한 햇빛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다. 마치 서둘러 그린 실루엣처럼,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빛의 얼개 안으로 녹아들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이렇게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듯한 감각 때문에<기상 프로젝트>는 변화와 불안을 경험하게 한다.” 과학과 종교 그리고 현대미술의 관계 속에서 기후는 하나의 접점이기도 하다. 과학을 믿는 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불안을 자극하는 올라프 엘리아슨의 작업에서 개념을 벗어난 숭고의 순간을 만난다.






루카 캄피조토 <Ladakh, India> 

1996 Pigment print 151/2×23 inches 

(framed) Signed, titled, dated and editioned 

on label verso #1/15  

 

 


황당한 숭고!


현대미술에서 숭고의 체험은 전체를 조망하고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유의미하다. 그래서 “이로 인해 작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가변적이라는 점은 특히 숭고한 예술에서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결국 모든 예술작품에서 나타난다. 예술 작품은 결국 각각 하나의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은 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작품 밖의 그 어떤 것도 작품에 대한 이해의 방향을 특정해 줄 척도가 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예술이든 이에 대한 이해가 중단되는 일이 발생한다. 작품의 언어를 해석할 때 이것들이 잘 조합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그 어떤 통일성도 발견되지 않는 일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게오르크 베르트람) 지속적인 실패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숭고를 유효화 하는 것일까?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왜 가장 혼란스럽고 무한하며 공포스런 자연경관이 숭고함의 감정을 일깨우기에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미적 구상력이 최고조로 발휘되는 곳에서, 모든 유한한 규정들이 스스로 용해되는 그곳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실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숭고함은 표상의 영역 자체 속에서 표상 불가능한 것의 차원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대상의 역설이다. (! 숭고는 황당의 대상이자 그 현대적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숭고한 것에 의해 환기된 열광이 공상적인 광신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무능력의 매개를 통해, 다시 말해 실패나 불일치 자체에 의한 성공적인 현시를 통해서이다. 페터 피슐리(Peter Fischli)와 다비드 바이스(David Weiss) <일의 발생(The Way things Go)>은 어떤 사건을 촬영한 것이다. 여기서 일은 인물이나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배후인 ‘물’을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는 도달 불가능한 물 자체와 맺는 관계를 지시한다. 그런데 스위스 출신 피슐리와 바이스 듀오의 영상 작품은 황당한 숭고의 예술 작품이다. 바닥에는 물 양동이와 고무 타이어, 스티로폼 컵, , 풍선 같은 간단한 소품을 이용해 임시로 만든 여러 장치가 (사물들이) 설치되어 있고 이어서 일이 벌어진다. 연쇄 반응은 물체들에 의해 일어나고 이것들은 단순히 시간의 상징이거나 대체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사물의 위치는 그것에 대한 표상의 실패 자체를 통해 지적된다. 아직도 변증법적 사변의 최종적 비밀이 현대미술 속으로도 파고들고 있다.  

 


글쓴이 김병수는 미술평론가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를 수료했다. 1997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신인미술평론상’ 당선과 2012년 ‘17회 월간미술대상’(학술·평론 부문) 대상을 수상 한 바 있다. 평론집으로 『미술의 집은 어디인가』, 『트랜스리얼』, 『하이퍼리얼』이 있으며, 공저로 『열린 미학의 지평』,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등이 있다. 이밖에도 『한국 미술평론의 역사』(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8) 51인에 선정, 현재는 목원대학교 대학원 기독교미술과 및 인천가톨릭대학교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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