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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과 아방가르드의 흔적을 되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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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 & Russian Avant-Garde Art
러시아혁명과 아방가르드 그리고 현대디자인

1917년 10월 26일, 러시아 노동자들과 혁명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Winter Palace)을 점령한다. 이것이 ‘볼셰비키 혁명’이라 불리는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의 시발이다. 러시아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올해로 꼭 100년, 겨울 궁전은 개보수를 거쳐 미술관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과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츠(Royal Academy of Arts)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에 초점을 맞춘 기획전을 발 빠르게 꾸렸다. 이 두 전시가 증명하듯, 구축주의와 절대주의를 포함하는 새로운 추상의 열쇠가 된 이 시기는 20세기의 예술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성난 프롤레타리아들의 혁명이 예술, 나아가 인류 문화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찬찬히 되짚어 보자.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Dziga Vertov 'The Man with the Movie Camera' 1929 35mm film (black and white, silent) Acquired on exchange with Gosfilmo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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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00주년에 맞추어 뉴욕 현대미술관과 런던의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츠에서는 대대적인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가 개최되었다. 현실공산주의의 맹아인 러시아 혁명과 그와 관련된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한 전시가 자본주의의 중심인 뉴욕과 런던에서 연이어 개최되는 모습은 불과 30년 전만 해도 반공이 국시였던 우리에게 꽤 낯설게 다가온다. 이러한 전시가 개최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서구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관계, 그리고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혁명의 관계는 물론 그들이 서구의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20세기 초 러시아와 서구를 연결하는 첫 키워드는 미래주의다.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영향력은 전 유럽을 휩쓸다시피 하였으며 이는 러시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09년 『르 피가로(Le Figaro)』지의 1면을 장식한 미래주의 선언문은 당시의 정보 전달속도를 고려하였을 때 거의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에 찬 러시아 젊은이들을 이내 사로잡았다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가 미래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러시아의 미래주의자들은 이미 작품집을 출판할 정도였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마리네티의 강연에서 러시아의 미래주의자들은 이탈리아의 ‘원조’ 미래주의와 자신들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재확인하고 “미래주의를 사유화하였다”며 마리네티를 배격하기 시작한다. 두 미래주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지만 마리네티식의 미래주의에서 보이는 절대적인 힘의 추구, 폭력과 죽음의 찬미, 극단적인 쇼비니즘(Chauvinism)과 여성혐오는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러시아의 미래주의자들은 독재적 리더 한 명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반() 부르주아적 가치를 지향하였으며 반전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것과는 달리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개인의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사상적 배경이 된다.





El Lissitzky <Proun 19D>

 1920 or 1921 Gesso, oil, varnish, 

crayon, colored papers, sandpaper, graph paper, 

cardboard, metallic paint, and metal foil on plywood 

97.5×97.2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Katherine S. Dreier Bequest

 



러시아의 미래주의는 혁명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13년을 전후하여 입체미래주의라고 불리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양식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입체미래주의는 그 명칭대로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세잔주의와 신원시주의까지 결합하여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된 사물, 역동적인 운동감, 통일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절된 시각을 보여주는 복잡다단한 화면 구성은 물론 시공간과 시점, 본질에 대한 난해한 이론을 선보였다. 입체미래주의는 당시 서구에서 유입되어 러시아에 난립하던 각종 실험적 전위미술의 집합체로서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영향력이 오래가지 못하고 새롭게 생겨난 절대주의와 구축주의에게 그 주도적 위치를 넘겨준다. 1915년에 열린 ‘최후의 미래주의 전시’라는 부제가 붙은 <0.10>전에서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는 기존의 회화관에 종지부를 찍는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미술의 도래를 알리는 작품인 <검은 사각형>을 포함한 다양한 절대주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절대주의(Suprematism)라는 명칭은 발생 초기에는 색면이 회화의 다른 요소들을 절대적으로 압도하는 우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말이었으나 말레비치는 곧 철저하고 방대한 이론화 작업을 통해 절대주의를 그동안 존재해온 모든 형태의 다른 미술보다 한층 더 뛰어난 상위 차원의 새로운 미술이라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절대주의 이전의 모든 미술은 인간의 눈에 비치는 자연물의 모사일 뿐이며 이는 원시인의 동굴 벽화에서 발전이 없는 구시대적 미술이다. 절대주의가 이전의 미술보다 우월한 점은 자연물에 근원을 둔 시각적 환영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능력에 근원을 둔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들만으로 화면을 이룬다는 점이며, 이를 통해 인간의 창조적 정신이 자연의 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선다고 말레비치는 주장했다. 인간의 정신에 방점을 둔 절대주의는 자연물을 단계적으로 단순화시킨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추상과는 근원을 달리하며 점, , 면 그리고 색채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감성 및 지각과 관련된 자연법칙을 탐구하려고 했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추상과도 이론적 방향을 달리한다.





El Lissitzky <Record> 1926 Gelatin silver print 

26.7×22.4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Thomas Walther Collection. Gift of Thomas Walther  2016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 VG Bild-Kunst, Bonn 




말레비치와 칸딘스키의 추상이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집중하였다면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Evgrafovich Tatlin)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구축주의는 그 대척점에서 물질적인 예술을 추구하였다. 1913년부터 제작된 그의 ‘역부조’ 시리즈는 절대주의 회화처럼 자연물을 연상시키지 않는 순수한 기하학적 도형들과 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캔버스를 벗어나 실제 3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성을 획득하였다. 또한, 작품에 사용된 가죽, 목재, 금속, 유리, 밧줄 등 재료는 그 표면에 칠을 덧씌우던 전통적 미술품에서와 달리 시각적, 물질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다. 타틀린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공예재료나 건축자재를 3차원 공간에 치밀하게 배치하여 말 그대로 작품을 ‘건설’하였고 이러한 그의 실험은 혁명 이후 러시아의 미술가들이 정신적 관념보다 물질적인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이를 가장 열렬히 반긴 것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혁명은 그들이 바라던 이상향을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으로 다가왔고 실제로 혁명정부에서도 ‘새로운 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부르주아적’ 틀에 맞춰진 구태의연한 미술행태를 답습하던 기존의 미술아카데미와 미술학교들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의 작업실 및 연구실과 후속세대 교육을 겸하는 기관인 국립자유공방(ГCXM)이 들어섰다. 국립자유공방은 1920년 브후테마스(BXУTEMAC: 고등예술-기술공방)와 인후크(ИHXУK: 예술문화연구소)로 분화되었다. 각 기관에서는 말레비치, 칸딘스키, 타틀린, 리시츠키(El Lissitzky), 로드첸코(Aleksandr Mikhailovich Rodchenko), 스테파노바(Varvara Stepanova) 등 여러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교수로 재직하며 혁명으로 열린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내는데 몰두하였다.




 Aleksandr Rodchenko <Cover design for NovyiLEF: 

Journal of the Left Front of the Arts> no. 1 1928 Letterpress, 

page: 23×15.2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The Judith Rothschild Foundation 




혁명 직후 미술계 개편으로 가시화된 새 시대의 도래에 고무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회화, 조각, 음악, 무대예술 등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술과 산업의 경계마저 허물었다. 혁명 이전 절대주의와 구축주의적 추상작업을 하던 작가들은 혁명 이후 실생활에 사용할 수 있는 실용품 제작에 집중한다. 구축주의자들은 간결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의자, 탁자, 의류, 식기, 가판대, 연설대 등을 만들었고 말레비치의 우노비스(УHOBИC: 신예술의 옹호자들) 그룹도 절대주의 양식을 응용한 건축 모형과 찻주전자, 찻잔 등을 제작하였다. 즉 혁명을 기점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작품 속에서 현실을 표현하는 수동성을 넘어서 스스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능동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용적 예술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 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서구의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축주의자인 로드첸코는 브후테마스 재직시절 석고상과 모델 데생을 중시하는 전통적 미술교육 방식을 벗어나 학생들에게 자와 컴퍼스를 다루게 하는 새로운 교육방식을 시도하였다


그의 급진적인 교육방식에 반감을 느낀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강의는 결국 폐지되었으나 로드첸코의 새로운 교육법은 후에 모홀리 나기(Laszlo Moholy Nagy)에 의해 현대 디자인의 뿌리인 바우하우스(Bauhaus) 커리큘럼에 도입된다. 말레비치의 제자였던 리시츠키는 1920년 테오 반 두스부르크(Theo van Doesburg)를 통해 데 스틸(De Stijl) 미술가들과 합류하여 우노비스 시기에 익힌 절대주의 양식을 응용한 여러 작품을 제작한다. 다른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리시츠키의 창작 범위는 현실세계를 이루는 요소, 즉 건축과 인테리어, 포스터, ,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프로운(ПPOУH: 새로움을 옹호하는 프로젝트)’은 리시츠키 스스로 “회화에서 건축으로 건너가는 환승역”이라고 불렀으며 이는 절대주의 회화 요소들을 3차원 공간에 실체화시킨 작업이었다. 리시츠키를 통해 서구에 소개된 절대주의적 디자인 콘셉트는 몬드리안과 함께 데 스틸은 물론 바우하우스, 나아가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국제주의 건축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Gustav Klutsis <Memorial to Fallen Leaders>

 1927 Cover with lithographed photomontage

 illustrations on front and back 

34.3×26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Gift of The Judith Rothschild Foundation  2016

 /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1920년대까지 러시아와 유럽 간의 인적 소통은 현재 유럽연합(EU) 국가들 간의 인구이동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자유로웠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소니야 들로네(Sonia Delaunay-Terk)와 샤갈(Marc Chagall)이 각각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출신이고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은 칸딘스키가 모스크바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자유로운 인구이동과 문화교류가 당시의 자연스러운 풍토였다는 점은 충분히 추측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Joseph Stalin)이 권좌를 차지함과 동시에 이 모든 자유는 마치 신기루에 불과했던 듯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열망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1934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소련의 유일한 예술 강령으로 정책적으로 채택된 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실험은 형식주의로 낙인 찍혀 모든 예술교육현장에서 퇴출당하기에 이른다


미술에서는 아카데미즘이 부활하여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자연주의적 표현에 정치적 선전을 담은 회화와 조각이 주류가 되었고 건축에서는 인본주의적 실용성과 간결함은 사라지고 웅장함을 위해 부피만 키운 채 신고전주의적 장식으로 치장한 소위 ‘스탈린 양식’이라 불리는 체제 과시용 건물들이 거리를 메웠다. 격화하는 냉전 속 세계 미술사는 실제의 역사에서 고의로 누락된 부분이 생겼다. 상대 진영의 문화적 역량을 평가절하하려는 정치적 의도 아래 서구의 영향 속에 성장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소련 미술사에서 삭제되었고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서구의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미친 영향은 서구 미술사에서 지워졌다.





 Dziga Vertov <The Man with the Movie Camera> 

1929 35mm film (black and white, silent)

 Acquired on exchange with Gosfilmofund)





서구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상호영향에 대한 연구는 냉전기에도 캐밀라 그레이(Camilla Gray) 등 열정적 연구자들의 헌신이 있었으나 인적 교류가 자유롭지 못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지 26년이나 지난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세계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활발한 연구 분위기와 정반대로 현재 국내의 러시아 미술사 연구 실정은 지난 세기말 서구의 연구 성과를 받아쓰다시피 하는 수준이다. 전문 연구자 풀(Pool)의 심각한 부족은 물론 대중의 관심도 저조하다. 뉴욕과 런던에서의 전시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대한 학술적,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글쓴이 이훈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미술비평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세기 중반 러시아 미술에서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학위논문으로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러시아미술사 박사과정 졸업을 앞두고 있다. 미술전문지 해외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동시대미술에 대한 정보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모스크바 비엔날레재단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 강원국제비엔날레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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