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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미랄다의 작업에는 묘한 부조화와 이질감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미국 체류 이후 해온 작업이 대개 그렇다. 작년 가을부터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useu d’Art Contemporani de Barcelona)에서 진행 중인 그의 회고전에 <미랄다 메이드 인 USA(MIRALDA MADEINUSA)>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이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아티스트가 걸어온 인생의 궤적이 그의 예술세계와 늘 평행선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 예술이기 전에 한 개인의 경험이 축적된 정신적·물리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적든 많든 창작자의 인생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미랄다의 경우는 더욱이 그렇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자의에 의한 것이었든, 타의에 의한 것이었든 거대한 사회적 변혁의 바람이 부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고, 그때마다 그의 인생 역시 달라졌다. 태생부터 그러하다. 미랄다는 태어남과 동시에 스페인 본토와는 판이한 역사와 문화, 언어를 가진 카탈루냐 민족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스페인을 향해 독립을 주장한 카탈루냐인들의 강렬한 외침은 소년 미랄다의 귓가에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청년으로 성장한 그가 유럽의 중심, 파리로 건너갔을 때도 사람들의 외침은 계속되었다.
<Movable Feast> 1974 ⓒ Photo N.Y. Midtown Planning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포옹하지 못한 기존의 유럽사회체계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프랑스 ‘68혁명’으로 확대되었고, 이 계기를 통해 작가는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며 울부짖던 수많은 노동자와 젊은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그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발걸음이 다다른 미국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그가 마주한 70년대의 미국은 냉전이 낳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대 열기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고국을 떠나, 세계 곳곳을 누비며 현대사회로의 이행 중 찾아온 각 사회의 변화와 개혁, 그 아픈 성장통을 목격한 미랄다의 삶은 그의 예술에서 드러나는 혼재된 정체성과 부조화를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다.
본디 타고난 카탈루냐인의 민족성, 사회적 가치변동이 극에 달했던 60년대 유럽의 시대 정서, 그리고 냉전체제와 이데올로기 분쟁이 마침내 붕괴한70년대 이후 미국사회의 현실이 뒤엉켜진 이 혼돈이야말로 곧 작가의 정체성인 셈이다. 작가의 혼재된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오브제는 바로 국기다. 미랄다의 작업에는 각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과 국기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애국적 연회를 위한 식량상황(Food Situation for a Patriotic Banquet)>과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뉴욕 맨해튼에 그가 실제로 연 <인터내셔널 타파스 바와 음식점(El Internacional Tapas Bar & Restaurant)>을 들 수 있다. 작가는 강대국들의 국기가 차례대로 꽂힌 연회장에서 각 국기 색에 맞추어, 여덟 가지의 알록달록한 색으로 염색된 쌀밥을 대접하는가 하면, 미국 최초의 타파스 음식점인 자신의 식당 입구에 세계 각국의 국기가 찍힌 긴 카펫을 깔아 손님을 맞이하기도 한다.
<Miralda en La Carraca. Fotografia de Nelson Garrido> 2014
Versió del retrat Miranda en La Carraca (1896) d'Arturo Michelena
선명한 원색들의 조합을 통해 한 국가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말해주는 국기를 적극 활용한 까닭에 미랄다의 작업은 색채들이 주는 대비 효과가 크고 강렬하며, 그 조합체계가 꽤나 규칙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하고 질서정연해 보이던 화려한 색들의 밥알들은 ‘먹는 행위’와 동시에 순식간에 뒤섞여버리고, 빈틈없이 국기들로 빼곡히 채워진 카펫은 각각의 국기가 어느 나라의 것인지 식별하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시각적 혼돈을 가져온다. 이처럼 질서와 무질서, 규칙과 무작위(random)의 대립적 구조에서 색채를 섞어가며, 그 색이 본래 상징했던 최상의 가치, 즉 국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와해시키고, 각 나라의 경계를 허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미랄다는 수많은 다름의 공존 가능성을 시도한다.
국기가 혼재된 작가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모티브였다면, 음식은 60-70년대 유럽과 미국에 불어온 사회적 변화를 몸소 겪은 그의 경험이 좀 더 직접적으로 반영된 투영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음식과 관련된 각 지역의 전통축제 및 추수감사절이다. 음식축제는 한 해의 수확을 감사히 여기고, 풍요와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전통적, 주술적 의식행위다. 음식과 관련된 의식이 오늘날까지 축제의 형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식(食)문제를 공동의 차원에서 직시하고 해결하고자 한 덕분이다. 미랄다는 이 음식축제의 기원과 정신을 철저히 계승한다. 예컨대, 뉴욕 9번가에서 먹을 것들을 가득 실은 삼단 말 마차를 앞세워 이동식 레스토랑을 선보인 퍼포먼스 <가변축일(Movable Feast)>(1974)은 지나친 상업화로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한 식문화, 먹을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낭비와 부족의 격차가 커져만 가는 불평등한 식량분배의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Miami Projects> 1982 ⓒ Photo Miralda
미국 농축산업의 중심지인 캔자스 시티의 추수감사절에서 두 차례 진행된 <밀과 고기(Wheat & Steak)>(1981) 퍼포먼스 역시 자본주의사회에서 음식이 가지는 의미를 비판적 관점에서 고찰한 결과다. 소, 돼지, 양의 형상이 순서대로 쌓아 올려진 3단 유니콘(Tri-Uni-Corn)을 중심으로, 수확물을 실어 나르는 운반차들과 허수아비로 분장한 농민들과 추수꾼들을 비롯해 100여 명의 캔자스 주민들이 참여한 이 대규모 행진은 먹을 것이 자라나는 땅과 먹을 것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한편, 성대한 축제 뒤로 가려진 농축산물 시장의 치열한 거래경쟁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사회적 약자이고 소수일 때,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단식투쟁을 벌이곤 한다.
하루 세끼가 너무나 익숙해 도리어 먹는 것의 귀중함이 잊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굶주리고, 누군가는 투쟁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미랄다가 먹을 것에 이토록 집착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들었던 군중들의 배고픈 목소리를 잊을 수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전시장 한가운데, 무지갯빛의 고운 식빵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1929년 대공황시절, 무료배식을 기다리기 위해 줄을 선 실업자와 노동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 <최저소득(Breadline)>(1977)이다. 모든 이들이 다 같이 배불리 먹는 자리가 바로 잔치 아닌가. 그래서인지 미랄다의 잔칫상은 차마 손을 댈 수가 없다. 한술 뜨기에 아직 이른 듯하다. 푸짐하게 차려진 그의 화려한 밥상은 배고픈 자들, 투쟁하는 자들,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hibition view of <MIRALDA MADEINUSA>
(2016.10.22-2017.4.9) at MACBA Photo Miquel Coll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Universite Paris VIII Vincennes-Saint-Denis)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현대예술과 뉴미디어아트학과에서 「기계시대의 해체미학」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대학원 이미지예술과 현대미술 연구소에서 뉴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예술과 기술의 상호관계분석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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