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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9, Apr 2023

함경아
Ham Kyungah

가상으로의 통로

●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 이미지 작가 제공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다섯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시리즈 설치 전경 carlier | gebauer, Berlin, 2017 이미지 제공: carlier | gebauer 사진: Gunter Lepk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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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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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실마리는 작가가 전한 유명한 일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TV 화면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북한의 카드 섹션 영상이 흐르는 가운데 이미지가 전환되는 찰나, 카드를 든 천진한 소년의 얼굴이 잠시 클로즈업된다. 잠깐, 소년을 비추었던 화면은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권총의 이미지로 전환되고, 영상은 다시 흘러간다. 수천수만 개의 컬러 차트 가운데 한 개의 차트가 움직이며 차트의 뒤편에 있어야 할 얼굴이 전면에 등장한 순간, 권총이라는 전체의 이미지는 깨지고 소년이라는 부분이 또 다른 전체가 되어 작가에게 다가왔다. 권총처럼 보였던 영상 속의 세상은 사실 수많은 소년으로 이루어진 세상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소년이 수많은 권총으로 생겨난 것일 수도 있었다. 함경아는 새롭게 찾아낸 이 부분이자 전체를 픽셀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픽셀일까?

픽셀은 작가의 자수 작업에서 노래 가사나 샹들리에 이미지로 일체화되어 보이는 캔버스 표면의 한 땀을 비유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이미 익숙해진 디지털 이미지를 굳이 수 없는 연습과 노동집약적으로 표현해낸 자수라는 방법을 은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함경아의 픽셀이라는 단어에는 그 이상의 중층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작가의 세계에서 픽셀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정적인 전자와 같은 존재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서 관찰자의 존재는 빛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자의 혹은 픽셀의 상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대상의 부분과 전체를 한꺼번에 바꾸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픽셀은 부분인 동시에 전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각각의 픽셀이 생성되고, 관측되며, 존재하는 과정에서 픽셀과 관찰자 그리고 이미지 전체가 한꺼번에 맞물려 끊임없이 움직인다.



<Needling Whisper, Needle Country / 
SMS Series in Camouflage / Big Smile R 02-01-01> 
2015  북한 손자수, 면사위 실크사, 중간자, 밀수, 
뇌물, 긴장감, 불안, 검열, 이데올로기, 
나무 프레임 약 1,000시간/ 1명 145×148cm 
사진: 권오열



대부분의 경우, 픽셀은 첫눈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난 어쩌면 그대와의 만남이 잘되지 않기를 바랬는지도 모르죠”라는 노래의 가사와 화려한 샹들리에에서 흩뿌려지는 빛을 담은 자수 작품에 등장하는 거대한 이미지를 마주쳤을 때,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다섯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2015)의 실크 실로 수놓은 흔들리는 금빛 샹들리에가 주는 강렬하고 매혹적이며 아름다운 장관을 마주쳤을 때, 제일 먼저 감상자가 얻는 것은 실로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 환상이다.1) 현실로부터 옮겨간 환상은 마치 거품처럼 가상의 공간을 창출해낸다. 공간의 가상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먼저 자수라는 재료의 속성이 빚어낸 가상성이 있다.

언뜻 보면 심지어 전면 추상같은 느낌마저 주는 평면적 이미지와 달리 자수는 캔버스에 3차원의 두께와 빈 공간을 부여한다. 또 한 가지 가상성은 작품의 주제에서 기인하는데, 작가는 대중가요와 “보이지 않는”이라는 문구 등을 사용함으로써 가상성을 드러내 놓고 펼쳐 놓는다. 환상이 만들어낸 버블은 조명이 빛나는 무대와 제국이 쌓아 올린 부와 영광의 장소들을 연상시킨다. 그리하여 관찰자가 도달한 가상의 공간에서 정교한 자수는 실과 캔버스가 아니라 환하게 빛나는 빛의 입자로 전환된다.



<악어강위로 튕겨오르는 축구공이 그린 그림>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9살에 탈북한 13세의 유소년 
축구팀 선수, 축구 페인팅, 아크릴릭 페인트, 축구공,
 FRP축구공, 로얄지, 모니터, 사운드, 합판 
1,370×1,100×390cm <올해의 작가상 2016> 
전시 전경 201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이미지 제공: 작가



그러나 한 발짝 더 다가서서 관찰했을 때, 이 빛의 입자들은 관찰자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다른 성질을 드러낸다. 이들 이미지가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나는 것은 역시 이 작품이 평면 회화가 아니라 자수라는 점에 기인한다. 중간 매개자를 통해 북한에 전달된 디지털 도안은 비밀스러운 통 속에 넣어져 강과 육로의 경계를 거쳐 예측 불가능한 과정을 통해 알 수 없는 지역의 서로 다른 작업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땀 한 땀 놓아진 자수의 선과 면은 한 획으로 그어진 붓 터치와는 달리, 서로 다른 물질성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 한 번에 그려진 듯한 이미지의 선과 면을 감상하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떤 재료와 인력이 투입되었는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다. 한 땀의 픽셀이 함축한 서로 다른 물질성은 우연으로부터 기인하고, 그 우연은 과정의 우연이다. 한 땀 한 땀의 수놓아진 픽셀들의 결과가 관찰자 앞으로 다가온 “사건(Event)”이라면, 이 사건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에 따르면 관계성(relationism)와 과정성(processuality)으로 구성된다.2)

먼저 과정성은 사건(혹은 픽셀)이 현실의 다양한 역학 속에 혼돈의 상호작용이 빚어낸 특이성(singularity)이 빚어낸 상황이다. 개별의 사건(혹은 픽셀)이 만들어지는 상황은 각각 다르며, 이전의 사건들과 분명한 차이점을 지닌다. 자수의 글자와 이미지를 이루는 한 땀 한 땀의 올은 각각의 원본성을 지닌 사건이다. 서로 다른 작업자가 모두 다른 시간과 공간,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속에서 만들어낸 전체 사건의 과정의 일부이자 그 자체로 사건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특이성은 한 가지 상태로 고정되지 않는다.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 
다섯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SK 01-05B> 
2018-2019 북한 손자수, 면사위 실크사, 
중간자, 밀수, 뇌물, 긴장감, 불안, 검열, 이데올로기, 
나무 프레임 약 1,600시간/ 2명 247×160cm
사진: 김현수 구겐하임 미술관 소장 



한 땀의 사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였고, 이 가능성들이 가상의 상태(state of things)를 형성한다. 마치 하이젠베르크의 전자가 상황에 따라 입자 혹은 파동으로 존재하듯이, 한 땀의 사건은 상황에 따라 이렇게 되었을 수도, 저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샹들리에 이미지의 전구를 이루는 한 땀의 올이 압록강을 건너 순이에게 닿아 황금실로 꿰어졌을 수도, 두만강을 건너 영이에게 백금실로 꿰어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중간에 이리저리 전달되다가 실들이 모두 흩어져 어쩔 수 없이 노란 실로 꿰어졌을 수도 있다. 관찰자가 바라보는 한 땀의 픽셀은 이 모든 가상적인 상황을 총체적으로 함의한 결과다.

한편 사건(혹은 픽셀)을 만들어내는 관계성은 행위를 하는 개인들을 전제로 한다. 단, 이 개인들은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레벨에서 순수하게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개별적인 개인에 관한 이러한 통찰은 단순히 국적과 지역, 인종이나 시대에 따른 이념적이고 외부적인 차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서로 다른 개인이란, 경험하고 지각한 내용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의미한다.

“are you lonely too?”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도안을 북쪽의 자수작업자들에 보냈을 때, 작가는 단순한 미 제국주의 언어의 노출이나, 팝송의 구절, 대중문화에 흐르는 신파적 감성의 공유만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경, 자본, 이념과 같은 인지와 의식의 영역을 넘어 이 자수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 졸임과 비밀의 냄새를, 자수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생존의 욕망과 빈한한 환경의 고단함을, 이 일을 시키는 미지의 남쪽 사람을 향한 호기심과 낯섦을, 그리고 자수 작업을 창작하는 데서 오는 희열과 만족을 섞어 담아 개별적 인지와 경험을 초월하는 감각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3)



 <Nagasaki & Hiroshima Mushroom Clouds> 
2009-2010 북한 손자수, 면사위 실크사, 중간자, 
밀수, 뇌물, 긴장감, 불안, 검열, 이데올로기, 
나무 프레임 약 2,200시간/ 4명 151.7×298cm  
이미지 제공: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l,o,n,e,l,y’라는 글자가 바느질되어 사건이 완성되기까지 디지털 도면을 만들고 전달한 작가와, 이를 이동시킨 중개자 그리고 실제로 작업을 수행한 작업자의 경험과 감각의 다름이 만들어낸 관계가 존재한다. “too?”가 덧붙여진 이 어구는 이미 어떤 감정을 느끼고 수행하는 개인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의문형 부호는 상대를 전제로 대화를, 즉 관계 맺기를 요청하고 있다. 먼저 이야기를 전달하고 대답을 요청하는 개인은 작가이거나 어구를 만들어낸 다른 제3의 존재일 것이고, 전달된 질문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서로 다른 감정의 답을 받을 것이다.

더하여, 작품이 캔버스로 옮겨져 전시장에 펼쳐진 순간에도 보이는 글자를 읽는 감상자의 경험과 지각까지 사건(혹은 픽셀)을 만들어내는 관계성에 합류한다. 그러한 점에서, “are you lonely too?”라는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관계성과 과정성의 그물망으로 짜여진 픽셀들이 부분과 전체를 오가며 상상을 넘어선 가상의 영역을 만들어갈 때, 눈앞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새로운 사건이 생성(becoming)할 가능성을 품는다. 이미지가 노출될 때마다 끊임없이 진행되는 현재형(in progress)인 셈이다. 계속해서 경험하며 감각을 만들어내는 진행형인 사건(혹은 픽셀)은 가상이 현실로 들어오는 통로이자, 현실이 다시 가상의 영역으로 회귀할 수 있는 역주행의 가능성이다.4)



‘Abstract Weave / Morris Louis’ Series 2014
북한 기계자수, 취합한 국제 뉴스와 이야기들, 
폴리에스테르사, 중간자, 밀수, 뇌물, 긴장감, 불안, 
검열,실종, 이데올로기, 술, 나무 프레임 
250×320,334,320cm carlier | gebauer, Berlin 
설치 전경 2017 이미지 제공: carlier | gebauer 
사진: Gunter Lepkowski



작가는 매 순간 변화 할 수 있는 사건(혹은 픽셀)의 새로운 가능성이 관찰자(관람객)에게 현재의 시점에 닿게(avenir) 할 효과적인 방법에 대하여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건을 경험하는 개인의 감각들은 초 연결성을 지니고 과거와 미래, 이곳과 저곳을 잇는다. 빛나는 샹들리에의 한 땀 속에는 한 국가의 운명을 가를 협정을 맺는 정치인의 불안과 일생일대의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의 초조, 업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낯선 땅을 오가는 여행객의 곤두선 신경과,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마음 졸이는 탈북자의 공포,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의 두근거림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어느 날, 작품을 마주하는 한 순간,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은 한꺼번에 폭발할 것이다.PA

[각주]
1) Kang Sumi, “An Aesthetics of Some and Such: Kyungah Ham’s Unfixed Art”, Kyungah Ham Phantom Footsteps, Kukje Gallery, 2016, pp. 7-21
2) Gilles Deleuze,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trans. Micahel Taormina(Los Angeles:Semiotext(e), 2004, p. 44
3) 필자와 함경아 작가와의 인터뷰 중, 2023.2.28, 파주 작업실
4) Gilles Deleuze, Difference and Repetition, trans. Paul Patton (New York: ColumbiaUniversity Press, 1994), pp. 265-272



사진: 이영학



작가 함경아는 1966년 서울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 대학원에서 순수예술을 수학했다. 비디오, 설치, 사진, 조각, 전통매체등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해 작업하는 그는 개인의 차원 안에서 존재하는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사회적 가치관과 시스템, 윤리와 법망과의 간극을 발견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와 형식으로 재구성해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을 비롯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 등에 소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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