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Issue 197, Feb 2023

정은영
siren eun young jung

사람의 인생을 가져오는 일, 변칙성을 기념하는 마음

● 임서진 독립큐레이터 ● 이미지 작가 제공

'변칙 판타지_한국판' 2016 퍼포먼스 1시간 25분 이미지 제공: 작가, 남산예술센터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임서진 독립큐레이터

Tags

정은영의 작업에는 많은 사람의 삶이 등장한다. 한 명의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몇몇 인물을 중심으로 짜인 인적, 이론적 네트워크가 넓게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2008년에 시작해 현재진행 중인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등장인물과 매체에 더불어 여성주의, 아카이브, 젠더 수행성, 퍼포먼스 이론 등 여러 요소를 입구 삼아 접근할 수 있다. 그간 작가는 성실한 연구자, 아키비스트, 유사 다큐멘터리 제작자, 공연 연출자의 역할을 오가며 여성국극이라는 공연형식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로 관람자를 이끌어왔다. 한 프로젝트당 다수의 개별 작품이 파생되는 방식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소재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다각도로 변화하는 흐름을 목격하게 된다.

정은영은 여성국극이 가진 여러 변칙적 특징들에 주목한다. 여성국극은 판소리의 공연방식에서 장면과 배역을 나눠 연극과 같이 재구성한 창극의 형식을 따르며, 그 내용은 판소리 사설, 오페라, 대중소설 등에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각색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성국극의 남자 주연 ‘니마이’와 남자 조연 ‘삼마이’ 그리고 남자 악역 ‘가다끼’ 역할을 모두 여성배우가 맡아 수행한다는 것이 핵심적 특징 중 하나이며, 정은영이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통해 주요하게 분석하는 것 또한 젠더 수행적, 퀴어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유예극장> 2018 싱글채널 비디오 35분 5초 
이미지 제공: 작가 사진: 홍철기



여성국극이 지닌 여러 가지 모순 또는 불완전함은 그것의 위치를 위태롭고도 자유로운 것으로 만든다.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배우의 존재, 혼합 장르이기에 전통 장르도 현대적 장르도 아닌 혼종적 형식,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듯하나 실은 전통으로부터 이탈하는 극의 내용,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권위에 의지하고픈 욕망이 느껴지는 국(國)극이라는 명칭과 동성애적 로맨스를 연기하는 것 사이의 우연한 불일치 등의 조건은 여성국극을 매혹적인 대상으로 느껴지도록 하는 동시에 전통과 권위를 주창하는 이들이 신랄하게 비난할만한 빌미를 제공한다.

방대한 양의 영상, 글, 강연을 생산해낸 여성국극 프로젝트 안에서 이 글은 2015년 정은영의 개인전 <전환극장>(아트스페이스 풀, 2015)을 출발점 삼아 이후 그의 작업에 나타난 변화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환극장>은 일종의 회고전처럼 당시 8년간 진행되었던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되돌아보는 전시로 작가가 여성국극에 관해 연구하며 축적한 아카이브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1948년 한국 해방 공간에서 처음 등장한 여성국극은 1950-1960년대에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나 짧은 유행 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변칙 판타지_한국판 in 교토> 2019 
퍼포먼스 1시간 20분 이미지 제공: 작가, 
교토 익스페리먼트(Kyoto Experiment)
사진: Yuki Moriya



신문기사 등을 통해 당대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으나 영화나 드라마 등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형식의 부상, 여성국극을 지탄하는 젠더 및 고급문화의 규범, 새로운 세대의 유입이 어렵게 침체된 조직 구조, 기타 금전적 문제 등의 이유로 1960년대 후반부터 쇠퇴기에 접어든다.1) 이후 여성국극은 역사와 전통으로 기억되는 대신 주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배우와 팬들이 간직해온 기록과 기억 속에서만 종종 되살아나는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집된 <전환극장>의 아카이브는 주로 생존한 1세대 여성국극 배우들이 개인적으로 보관해온 사진, 신문기사, 대본, 공연 영상 등을 포함한다. 공인된 권위 없이는 사적인 기억의 흔적들로 고려되는 이 자료들은 정은영의 전시와 창작활동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수집된 자료와 함께 전시공간에는 정은영의 작업이 전시됐다. 영상과 이미지 몽타주 작업으로 구성된 작가의 작업 곳곳에 배우들의 흑백사진 몇 장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여성국극 배우들로부터 제공받았을 그 사진은 작업 영상 속 자료화면으로 나타나거나 벽에 걸린 액자 속에 텍스트 혹은 다른 사진과 함께 스크랩 형식으로 배치된다. 이때 작가는 여성국극에 관한 아카이브를 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고, 또 기존 아카이브 자료를 독해하는 어떤 관점을 권유하는 매개자이기도 하다. 사실 정은영의 작업이 전시에 놓인 기록물을 중요하게 참조 및 인용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아카이브와 작가가 생산한 아카이브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멀티채널 비디오, 스테레오와 5.1 
서라운드 사운드 가변 크기 이미지 제공: 작가, 
2019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사진: 홍철기, 김경호



그럼에도 이를 둘로 나누어 본다면, 전시공간 안에서 이 두 종류의 아카이브는 원본과 파생물의 구분이 불분명한 방식으로 서로 붙어있거나 병치되어있다. 그 예로 일련의 이미지 몽타주 작업 <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2015)는 신문기사, 공연 홍보물, 무대 안팎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의 파편이 특정한 위계나 기준 없이 배치된 듯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를 가진다. 사진은 공연 당시 남역으로 분장한 배우의 모습, 무대 뒤와 바깥의 일상 그리고 작가가 연출한 퍼포먼스를 영상 속에서 수행 중인 여성국극 배우들의 모습 등을 포함한다. 이 이미지 묶음에서 각 사진과 문서의 온전한 크기나 비율은 소실되며, 이 경우 원본성에 주어지는 중요도는 감소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정은영의 아카이브는 수집한 자료와 창작한 자료, 무대 위와 바깥, 과거와 현재를 별다른 매개 없이 뒤섞으며 원본성 또는 역사성의 권위가 결정짓는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을 무력화시킨다.

작가는 ‘전환극장’이라는 전시 제목을 ‘Trans-Theatre’라고 번역한다. ‘전환’의 번역어로 ‘Trans’라는 접두어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작가는 말 그대로 젠더의 전환(trans)과 인문학적, 예술적 차원에서 논의되는 초국적(transnational), 초문화적(transcultural)이라는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는 이 번역어의 의미를 정은영의 최근 작업에서 감지되는 연결감 또는 국가, 시대, 장르를 횡단하는 감각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려고 한다. <변칙 판타지>(2016-2019), <유예극장>(2018),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2019) 모두 여전히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제 카메라는 현재라는 시제와 여성국극을 닮은 다른 개인과 공동체를 향하고 있다. 여성국극이 각종 동시대 문화를 번안하고 각색하여 장르를 구축했던 것처럼 정은영은 여성국극에 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것이 오늘날의 다른 공연 장르 또는 퀴어 퍼포먼스와 접목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제시한다. 여기서 여성국극은 일종의 중심축으로 작용하지만, 그것은 중력이 아닌 하나의 가볍고 독립적인 접속점으로 존재한다.



<개인적이고 공적인 아카이브> 2015 혼합재료, 
설치 가변 크기 이미지 제공: 작가 사진: 김익현



2016년 남산예술센터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대만, 일본(요코하마, 교토) 그리고 인도에서 총 다섯 번 상연된 <변칙 판타지>는 1시간 25분 분량의 공연으로 남은진 배우와 각국에서 섭외한 퀴어 합창단이 출연한다. 여성국극 남역배우로 훈련받은 마지막 세대인 남은진은 <정동의 막>(2013)에서부터 정은영의 작업에 주요하게 등장해왔다. 이후 많은 작업에서 작가는 노인 여성의 얼굴, 흑백사진, 한자 섞인 문서로 이루어졌던 여성국극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들을 계속 대조해보고 또 이어 붙인다.

그렇게 이어 붙인 이미지에는 남은진 배우, 여러 국가의 퀴어 합창단 멤버들, 가곡을 부르는 공연창작자 박민희, 레즈비언 연극배우 이리, 드랙킹 퍼포머 아장맨, 장애여성극단 ‘춤추는 허리’의 연출가이자 장애인 배우 서지원, 트랜스젠더 전자음악가 키라라가 등장한다. 영상 속에서 이들이 하는 말은 어딘가 친밀하고 직설적이다. 일례로 남은진은 <변칙 판타지>, <유예극장> 등의 작업에서 여성국극을 만나게 된 계기, 심장이 뛰었던 순간, 남역배우가 되기 위해 하는 훈련과 연습, 남성되기의 기술과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그가 느꼈던 감정을 고백하는 자신을 연기한다. 또한 <변칙 판타지_한국판>(2016)에서 남은진 배우는 조영숙 배우가 지난날을 회고하는 글을 낭독하고 퀴어 합창단 G-Voice의 멤버들은 남은진의 일기장에서 나온 듯한 내용을 낭독한다.



<물고기로 죽기> 2021 퍼포먼스 1시간 20분 
이미지 제공: 작가, 시어터 프랙티스 프로젝트
(Theatre Practice Project) 사진: 원준혁



이와 같은 순차적인 낭독, 이어 말하기의 연출은 타인의 시간을 통해 나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과 그로 인해 타인과 나, 현재와 과거가 서로의 닮은 구석을 확인하는 순간을 꽤나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유예극장>에서 남은진 배우를 가곡 공연자와 드랙킹 퍼포머의 모습과 중첩시키며,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에서는 여성국극 2세대 남역배우인 이등우가 레즈비언, 장애인, 트랜스젠더 주체를 포함한 현대 공연자 4인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제시하며 일종의 “‘상상적’ 계보”를 만든다.2)

정은영은 미술의 영역에서 시도할 수 있는 큼직큼직한 전환과 횡단을 설계하면서도 ‘계보’라는 말을 조심스러워한다. 여성국극을 가시화하여 역사, 전통, 정상성의 권위로 편입시키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며, 역사학이 해왔던 것처럼 특정 경향을 승인하는 힘을 행사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그의 작가주의적 개입은 영웅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을 닮아가길 바라는 것 같다. 불완전하고 어긋난 조건들을 계속해서 해체하는 방법을 고수하며 정은영은 타인을 재현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촘촘한 이론적 배경을 구축하고 작업의 모든 단계에서 윤리적 방법을 고민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사람의 인생을 가져오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PA


 [각주]
1) 정은영, 「여성국극의 짧은 역사: 태동과 쇠퇴」, 『전환극장』, 포럼에이, 2016, p. 48
2) 정은영, 「틀린 색인」, 오혜진 외, 『원본 없는 판타지: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후마니타스, 2020, p. 123



j정은영
사진: 서스테인웍스




작가 정은영은 1974년생으로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리즈대학교(University of Leeds) 대학원에서 시각예술과 페미니즘을 공부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사의 재구성 문제에 비판적으로 접근해온 그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유수 기관에서 전시를 개최했으며,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고 ‘상하이 비엔날레(Shanghai Biennale)’(2018), ‘타이페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2017), ‘광주비엔날레’(2016)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3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More Articles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