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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6, Jan 2023

제여란
Je Yeoran

극(極)의 유희 무한히 생성되는 세계

● 홍예지 미술비평가 ● 이미지 작가, 스페이스K 제공

'로드 투 퍼플' 전시 전경 2022-2023 스페이스K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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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미술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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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제여란이 있다. 다른 이가 아닌 제여란, 오직 그 자신이 되는 데 필요했던 수십 년을 생각한다. 한 인간이 생애 동안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 이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불가능에 가깝다. 수많은 좌절이 우리 가운데 있다. 아래로, 저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에 묶여 얼마나 많은 이가 긴 시간을 바닥에서 보냈던가. 그 고통은 심연을 이룬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사태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심연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근본 조건이라고. 양팔을 벌린 채 땅을 딛고 서 보자.

모든 인간은 몸 안에 받침점과 힘점을 지닌 시소다. 그를 내리누르는 힘, 무자비한 ‘중력’이 한쪽에 가해질수록 반대 방향으로 치솟는 또 다른 힘이 생겨난다. 하강의 에너지를 전환하여 이뤄낸 상승. 그 극적인 반전에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시몬 베유(Simone Weil)가 말했던 ‘은총’일까?1)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경외, 인간이 인간다운 순간에 일어나는 숭고의 감정. 우리 안에 공통으로 잠재되어 있지만 실제로 발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축복. 이 최상의 기쁨을 몸으로 증언하는 이가 있다. 자기 안의 중심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인식하는 화가, 제여란이다.

스페이스K 서울에 마련된 <로드 투 퍼플(Road to Purple)>.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쓴 로댕론을 읽었다. “로댕을 거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존재로 만든 것은 그의 내부에 있는 어두운 인내심이었다.” ‘어두운 인내심’에 밑줄을 두 번 그었다. 한 번은 조급한 나 자신을 위해서, 또 한 번은 지난날의 제여란을 위해서. 로댕처럼 제여란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싹을 가지고, 흡사 땅 아래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 싹은 아래쪽으로 자라났고 계속해서 뿌리를 밑으로 내리면서, 위를 향하여 작은 충동이 일기 시작할 때까지 단단하게 닻을 내렸다.”2)



<Usquam Nusquam> 2022 
캔버스에 유채 162.2×162.2cm



1987년, 6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한 그는 유학을 가는 대신 스스로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겠다고 결심했다. 싹이 자라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암흑을 견디며, 언젠가 무한히 뻗어나갈 색들을 내면에 응축했다. 내공을 쌓고 자기 세계의 기초를 세우는 시기였다. 1994년 인공화랑에서 열린 개인전과 2006년 토탈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사이, 그 12년이라는 시간이 키워낸 회화는 인내심의 끝이 얼마나 찬란한지 보여준다.

열여덟 번째 개인전인 <로드 투 퍼플>은 제여란을 형성한 시간 중 관찰 가능한 순간을 선별하여 펼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눈앞에 쏟아진다. 이 시간은 태양 빛 아래에 드러난 시간이다. 한편 또 다른 30년이 그림자 속에 남아 있다. 그가 화가로서 출발하기 전에 흘러간 시간이다. 어느 날, 최초의 결단이 날카롭게 두 시간을 갈랐다. 그 후 제여란의 삶은 ‘창조된 세상’과 ‘창조하는 세상’으로 벌어진 틈새를 좁혀 가는 여정이었다.3) 이 틈새는 앞서 말한 심연이다. 삶의 지평에 우뚝 선 제여란은 스퀴지를 또 다른 다리 삼아 미지의 평면에 내리꽂는다. 그러곤 거침없이 회전한다. 인간 컴퍼스가 그려낸 둥근 궤적은 단숨에 차이를 아우른다. 화해할 수 없는 양극이 맞물리고,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가 호 안에 밀려들어온다. 이러한 포용, 커다랗게 감싸는 몸짓은 대범한 정신에서 나온다. 꼿꼿한 척추에 깃든 수직적인 힘과 화면에 바짝 다가가는 스퀴지에 실린 수평적인 힘. 이 둘이 만나 삶을 생성한다.

제여란이 살아온 총체적인 삶과 만나는 가장 정확한 길은 무엇일까? 이번 전시가 핵심으로 꼽은 색의 흐름은 그가 걸어온 길을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정도(正道)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보라색에 대한 탐구는 그동안 거쳐온 모색의 시간을 하나로 통합하는 지점이다. 보라색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암시하는 것처럼, 정반대의 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첫 대면에서 제여란은 우리 사이에 펼쳐질 상호 작용을 두고 “친화력”이라는 말을 썼다.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1809)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걸 알았다.



<Untitled> 1997-2000 
캔버스에 혼합재료 162.2×130.3cm



괴테는 화학 작용에 빗대어 남녀 관계의 변화하는 본질과 그 전개 과정을 그렸다. 서로 다른 성질이 어떻게 상대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는가? 괴테가 주목한 작용은 단순히 물과 기름의 관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대에게 척 붙어버리거나 자기를 잃고 완전히 섞여 들어가는 관계도 아니었다. 친화력이란 말을 그림에 적용해 보자. 빨강과 파랑이 섞여 보라가 만들어질 때, 그 순간 보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화학 변화의 산물일까?

극진할 극, 다할 극(極)이라는 한자에는 나무 목(木)이 들어 있다. 이 나무는 생명의 나무일 것이다. 생명의 나무는 우주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래 이 글자에는 나무가 없었고 거인 형상만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인간 자체가 나무이자 기둥이다. 인간은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우러르는 존재다. 까마득하게 벌어지는 양극을 매개하는 존재다. 사이 존재인 인간은 십자가와 연관되기도 한다. 전인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은 양쪽 성(性)을 모두 지닌 남녀추니로 그려진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보라색이다. 이 모든 상징은 공통적으로 서로 반대되는 극이 교차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제여란은 서양식 십자가는 딱 맞지 않는다며 “기우뚱한 균형”이 오히려 인간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원근법의 회절도 이야기한다. 기하학적, 수학적으로 정확한 균형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상에 완전한 직선은 없다. 점 단위, 초 단위로 보면 휘어진 것이 직선적인 것에 끊임없이 근접해가는 운동으로 보아야 옳다. 직선적인 것의 이상(理想)으로서 대척점에 있는 두 극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이다. 인간은 표상하기 어려운 무한을 유한한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우회한다. 개념을 가지고 놀며 무한을 다룰 수 있게 됐지만, 그 개념 자체가 실재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직선이 본질이라고 착각한다. 실제 감각으로는 아니다. 실시간으로 굽이치며 흐르는 자연의 운동은 언제나 곡선적이다. 인간의 몸 역시 곡선적이다. 제여란의 표현을 빌리자면 ‘둥글다.’



<Usquam Nusquam> 2016
캔버스에 유채 227×182cm



앞서 언급한 기우뚱한 균형에서 풀려나오는 색색의 흐름은 생명력 그 자체다. 2000년대에 그려진 ‘되-ㅁ becoming and becoming’을 보면 불그스름한 검정과 푸르스름한 검정이 솟아난다. 그 다음에 ‘Usquam Nusquam’에서 보듯이 차례로 초록, 노랑 등이 풀려나온다. 그런데 이렇게 두드러지는 색이 있더라도, 자세히 보면 그 두드러짐은 다른 색과의 관계 속에서 대조되어 나타난다. 모든 색이 하나였던 시절, 엉켜 있던 다른 색의 스펙트럼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피아노로 한 음을 치면 일련의 배음이 깔리듯이. 특히 땅속에서 보낸 시기의 근원적인 검정은 모든 그림의 밑바탕을 이룬다.

제여란은 1990년에 그린 <Black>을 2016년에 다시 그림으로써 이 진실을 상기한다. 한편 상승의 정점(頂點)이자 최고의 자리는 보라가 차지한다. 2022년에 그려진 ‘Usquam Nusquam’, 그중에서도 ‘The Phantom Of the Opera’라는 부제가 붙은 거대한 화면은 보라의 위엄을 사방에 드러낸다. 하지만 정점은 언제나 찰나다. 탁, 치고 나와 다시 끝없는 순환을 시작하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해야 한다. 이 점은 색의 ‘영역’에 대한 언급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여란에 따르면 색마다 고유의 에너지를 지니며, 이 세계에 나타나는 범위가 다르다. 보라색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색이다. 일상에서 흔히 부대끼며 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Usquam Nusquam> 2017 
캔버스에 유채 162.2×130.3cm



왜 그럴까? 인간의 색이 아니라 신의 색이기 때문이다. 보라색이 현실에 나타날 때, 고차원의 존재가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다 가는 것과 같다. 신성한 영역은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라색을 쓸 거라면 철저히 제한하여 조금만 써야 한다. 보라에 이끌린다고 해서 계속 가져갈 수 없다. 그는 이 한계를 알기에 절제하며 다른 색으로 돌아간다. 이때 돌아간 자리는 보라를 쓰기 전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 이제 노랑을 쓰더라도 보라를 쓰기 전의 노랑과, 보라와 힘겨루기하고 난 다음에 쓰는 노랑은 다를 것이다.

제여란의 회화에서는 인간 정신이 맞닥뜨리는 대립 쌍들 - 양과 음, 흑과 백, 선과 악, 빛과 어둠이 자웅을 겨루며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힌다. 이 차원에서, 둘로 나뉜 모든 것은 실제로는 무수한 사이였음이 밝혀진다. 제여란은 장차 전방위로 펼쳐질 물감 덩어리를 화면에 얹고, 스퀴지를 사용하여 단숨에 찢어낸다. 이 순간 그의 동작은 칼춤을 추는 것처럼 절도 있고 아름답다. 관람객은 이 다채로운 사잇길을 낸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색을 매개로 무언가를 생성하는 힘을 스스로 불러일으킨다. 자기 안에서 생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그림에서 무언가 구체성을 띤 것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보는 이의 몸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진 종합 효과다.



<로드 투 퍼플> 전시 전경
 2022-2023 스페이스K 서울



그런 의미에서 제여란의 회화는 극의 원리를 보고, 보이는 작용이다. 이미 생성된 것을 형상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생성 원리 자체를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을 마주하면, 정반대 극이 통하여 무언가 낳고 있는 사태의 한복판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 마법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효과처럼, 슈우욱- 휘이익- 하며 거센 기운이 합쳐졌다가 갈라졌다가, 밀었다가 당겼다가, 치솟았다가 고꾸라졌다가 한다. 창조의 순간, 그 용솟음이 담긴 것이다. 이처럼 제여란은 우주의 생성 원리가 제 몸을 관통하도록 하고, 그 원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형성하도록 한다. 세계를 만드는 여러 갈래의 힘이 움직여 온 과정과 움직여 나갈 과정을 한 화면에서 직관할 수 있도록 눈-길을 연다. 이때 벌어지는 것은 합주 - 정반대 극의 공동 작용, 상호 유희(Zusammenspiel)다.PA



제여란



작가 제여란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30년 이상 추상회화에 몰두하며 독자적인 색과 조형 언어를 다듬어온 그는 1988년 관훈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프랑스, 독일, 스페인, 아르헨티나,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스코센터,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토탈미술관, 루이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 등에 소장돼있다. 작가의 열여덟 번째 개인전 <로드 투 퍼플>은 오는 19일까지 스페이스K 서울에서 개최된다.


[각주]
1) Simone Weil, La Pesanteur et la Grâce: 윤진 옮김, 『중력과 은총』, 문학과지성사, 2021, pp. 10-11
2) Rainer Maria Rilke, Auguste Rodin: 안상원 옮김, 『릴케의 로댕』, 미술문화, 1998, pp. 18-19
3) Gitta Mallasz, Dialogues avec l’ange: 방혜자·알렉상드르 기유모즈(Alexandre Guillemoz) 옮김, 『빛의 메시지』, 열화당, 2018,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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