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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94, Nov 2022

이건용_Reborn

2022.8.25 - 2022.10.29 리안갤러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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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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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여기 저기 어디


그림 그리는 행위는 언제나 몸의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추상표현주의 등 미술 계보에서 회화가 수행성을 담은 매체로 가시화되기 시작하기 전부터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붓 터치 하나를 위해, 섬세한 손놀림을 위해 몸의 유기적 운동이 늘 동반되어 왔다.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되기 전까지 몸이 그림에 매개되지 않았던 적은 없던 것이다. 다만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매개된 중간 항으로서 그 표면에 가려졌을 뿐. 이건용은 그 표면에 가려진 몸을 재현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시화하면서 다양한 신체적 감각을 이미지로서 발굴해왔다. ‘신체드로잉’ 연작이 그 예다. 작가는 신체를 “세계와 만나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1) 장소로 여기며, 그리기 행위를 신체의 반복에 대한 결과로 삼는다. 드로잉을 현실 대상이 담긴 시각적 산물이 아니라 몸의 운동이 드러나는 행위적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재탄생(Reborn)’이라는 제목으로 꾸려진 이번 개인전은 팬데믹 이후 기후위기와 생태환경을 화두로 ‘신체드로잉’ 연작을 선보인다. 여기서 전시의 제목인 재탄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이 다시 탄생하는가? 기후생태 위기를 주제 삼은 만큼, 자본주의적 욕망에 따른 거대 농축산업, 산림벌채, 도로 개통 등 인간중심적으로 짜인 세계의 구조를 새롭게 쇄신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일까? 아주 보편화된 탓에 조금 진부해진 이 주장이, 제목이 품은 의미의 전부라 오해해선 안 될 것이다. 탄생이 무언가를 새롭게 생겨냄을 의미한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서 ‘재’탄생, ‘다시’ 그리고 ‘새롭게’, 말하자면 새로운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Bodyscape 76-1-2022>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259.1cm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높아진 소셜미디어 의존도, 집합금지의 규율 속 디지털 인터페이스로 지속된 만남. 뒤바뀐 생태계에서 조명되는 것은 결국 다시 몸이다. 기술의 다양한 가능성은 우리를 ‘거기, 여기, 저기, 어디’2)로 손쉽게 이동시키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금 이곳에 묶인 신체의 감각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까닭이다. 상술한바, 작가는 세계와 만나는 가장 본질적인 역할 수행의 매개로서 몸을 사유해왔다. 말하자면 고립된 환경, 가상의 이미지가 자주 현실 대상을 대체하는 지금의 조건에서, 그는 나와 타인의 경계를 인지하는 조건이 몸이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신체 자체를 감각하는 방식을 다시 고민한다. 이로 말미암아 너무 편리해진 인간 세상과 그 시스템에 가려졌다 (이제서) 수면 위로 올라온 생태적 위기를 꼬집는 것이다.

작품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신작으로 구성된 작품 중 눈에 띄는 것은 둔탁한 붓 자국 사이를 비집고 드러나는 이미지들이다. 이건용은 2006년부터 사진을 디지털 프린팅한 캔버스에 물감을 채색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왔는데, 이번 전시의 많은 작품이 이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야생에 놓인 동물, 녹색 산림 등 대부분의 이미지는 한눈에 조망할 수 없는 풍경으로 굵고 드센 붓 자국에 의해 파편적으로 드러난다. 캔버스의 반 이상을 덮은 붓 자국들은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건용의 작품은 주로 회화에서 신체의 수행성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논의되곤 했다. 이미지에서 신체의 움직임을 발견하며 회화는 하나의 퍼포먼스를 담아내는 무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 위에 올라간 신체의 움직임 자체보다, 그 움직임이 지워내는 이미지다.

캔버스의 풍경은 보는 사람에게 붓 자국 너머의 장면을 상상하도록 제안한다. 이미지가 언제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구멍을 마련한다고 할 때, 전시장의 작품들은 몸의 현전성, 움직임의 궤적을 환기하기보다 그 운동으로 구현된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지워내면서 그려내는지 질문한다. 사라진 몸의 자리에 놓인 이미지가 몸의 운동을 상상하게 하듯이, 가려진 채로 상상을 추동하는 이미지 자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당대의 환경이 이미지를 매개로 몸을 사유하게 만든다면, 이건용은 몸을 매개로 이미지 자체를 사유하게 만든다. 몸과 몸 사이의 장면이 지워지고 또다시 지워진다.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풍경이 거기, 여기, 저기 그리고 어딘가에서 돌아오고 있다.

[각주]
1) 이혁발, 『한국의 행위미술가들』, p. 37
2)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표현은 이건용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장소의 논리>(1975)에서 빌려왔다. 이 작업은 주체의 위치에 따라 같은 장소가 여기, 저기, 거기, 어디로 인식되는 퍼포먼스로 주체가 장소와 관계 맺는 방식을 실험한 것이다.


* <Bodyscape 76-1-2022> 2022 캔버스에 아크릴릭 194×2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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