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Issue 188, May 2022

백요섭
Baek Joseph

시간을 달려서 마주하는 것

백요섭의 작업은 열렬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기에 그를 특정 매체나 기법으로 제한해 정의하는 것은 어쩐지 속단하는 기분이 든다. 그보다는 작업 전반을 아우르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상을 우선 들여다보자. 일기 쓰듯 기록된 개인적 감정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그는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 조윤지 컨트리뷰터 ● 이미지 작가 제공

[사라진 장소(상실된 지지체1,2,3), (사라진2.5평)] 설치 전경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2021 대전시립미술관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조윤지 컨트리뷰터

Tags

우리가 만나는 것들은 모두 2015년 이후의 작품들이다. 그 이전까지 백요섭은 구상적인 회화 작업을 해왔으나, 그즈음 예술가로서 자신의 당위를 질문하고 작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다. 그 이후 화면에서는 형상이 사라지고 겹겹의 레이어가 등장하더니, 캔버스 밖으로 매체적 변주를 감행했다. 처음 배우고 그리는 사람처럼, 백요섭은 그동안의 작업을 과감히 돌아보고 새로 시작했다. 그는 우선 기존의 회화 작업방식을 달리해보는 것부터 출발했다. 가장 기본적인 회화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점선면으로 돌아갔고, 그것들을 이어 다각형을 그렸다. 그렇게 백요섭은 10년 이상 공부한 유화의 기본 원리를 다시금 배워나갔다. 어떤 의도를 가진 형상도 찾지 않고 기역, 니은 쓰듯 실험하는 기간이 1여 년. 그때 읽은 책들에서 백요섭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발견했다.

관통하는 것은 시간과 기억이다. 예를 들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장면이 그에게 박혔다. 어느 날 주인공이 마들렌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어릴 적 고모와의 추억으로 돌아가는 순간처럼, 그에게 회화도 기억을 저장하는 매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자신의 회화를 백요섭은 ‘팔림세스트(Palimpsest)’에 비유한다. 이는 고대의 양피지나 동물 가죽을 뜻하는 것으로, 처음 썼던 글을 씻어내고 그 위에 다음 텍스트를 쓰는 방식의 옛날 종이다. 그는 한 화면에 선형적 시간이 중첩되는 팔림세스트가 감정과 기억의 레이어를 지닌 그의 회화와 유사하다고 여긴다. 백요섭 또한 매일 일상의 기억을 종이에 기록하고 말리고, 또 안료를 덮은 후 긁어내고 다시 덮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가상적 흔적이 끼워지는 순간> 
2019 캔버스에 유채 각 255×124cm



2019년 이응노미술관에서의 전시 <가상적 흔적이 끼워지는 순간>은 이러한 실험의 결과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 어떤 대상도 없는 추상적 화면과 거대한 캔버스는 이제 그 이전의 회화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화면에서 구체성이 빠져나간 만큼, 전시장은 몰입의 공간으로 연출해나갔다. 화이트 큐브 바닥에 모래를 깔거나 야외에 작품을 설치하는 등 환경을 중시하고, 아치형으로 대형 패널을 설치해 어떤 공간에 들어와있는 듯한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특정 기억과 심상을 불현듯 떠올리길 의도한 것이다. 또한 누구든 작품을 보고 전시장 벽의 ‘가상적 흔적이 끼워지는 순간은 ___이다’라는 문구에 빈칸을 채울 수 있도록 참여를 유도했다. 이는 그의 회화가 추상적인 색면으로 변모했기에 가지는 열린 가능성을 활용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2020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전시 <변신, 흔적으로 남은 시간들>과 2021년 대전시립미술관 그룹전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서는 그가 천착한 질문들을 보다 사회적으로 확장해나간다. 백요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 중 하나는 그가 대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그곳에서 삶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탄생부터 성장까지 작가가 속하고 목도해온 대전의 풍경은 현재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는 대전 원도심의 사라져가는 공간에 주목하고, 이를 전시장 전면에 기록한다. 아카이브의 방식을 택한 까닭은 그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가 개인적 문제이면서도 공간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사사로운 기억이 지반으로 삼던 장소가 어떤 규칙에 의해 작동하는지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작업은 자본의 논리를 맹렬히 고발하기보다 상실의 정서를 공표하고 애도한다. 전시장에는 공간에 대한 필사적이면서도 허탈한 감정이 양면적으로 공존한다.



<변신(용문동123구역에서 채집한 버려진 가구를 재가공)> 
2020 나무 유리 143×158×47cm  
가구 안 왼쪽: 쉽게 부서진 삶의 흔적들, 
용문동123구역에서 수집한 파편들 일부 유리병 철 가변 크기;  
가구 안 오른쪽: 절정이 지나간 맨션에서 수집한 전기함, 플라스틱; 
가구 아래: 사라진 삶의 터전, 도로명 주소 패널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진행했던 1년간의 프로젝트는 재개발 현장을 직접 발로 뛰며 전개됐다. 주요 대상은 초등학생 때 살았던 용문동이었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설치와 영상 작업을 아우르게 되었는데, 이는 특정 장소와 접촉하면서 구체적인 사물을 수집했기 때문이다. <사라진 장소(상실된 지지체 1,2,3)>, <휩쓸린 조각> 등에서 발견되는 못, 표지판, 고가구 등은 매우 물질적이며 지시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매우 구체적인 맥락으로 전시장에 존재하는 한편, 은유적 태도가 함께 상실의 흔적을 추적한다.

이를테면 작가는 더는 생산되지 않는 부품이나 특정 자국을 은박지 위에 프로타주(frottage)로 남기는 방법을 택했다. 매일같이 방문하다 보니 그 동네에서 40년 넘게 사셨던 할아버지와 인연이 맺어지기도 했는데, 백요섭은 2.5평의 할아버지 방 벽지 전부를 그대로 은박지에 프로타주로 옮기기도 했다. 여기서 프로타주는 마치 음각을 새긴 듯한 효과를 내며, 철거 장소에 차마 놓이지 못한 비석의 역할을 전시장에서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제 곧 사라질 건물의 기둥 일부를 캐스팅하는 방식을 택해 거친 질감과 양감을 그대로 전시장에 박제하기도 한다. 콘크리트와는 다른 물질일지라도 유사한 형태로 사물을 부활시킴으로써 과거를 미래에도 존재하게 하려는 작가의 바람이 담겼다.




<우리의 미래> 2021 철, 모래 혼합재료 가변 크기



백요섭은 2020년부터 작업에 ‘변신’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해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흥미를 잡아끄는 ‘변신’은 그에게 곧 회귀다. 자신의 과거로 언제든 돌아갈 힘을 내재하고 있는 백요섭에게 이는 곧 삶의 동력이자 작업의 동기다. 그러나 동시에 불가능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작업은 불가항력으로 흘러가 버리는 시간 앞에서 저항하고 그 순간이나마 박제하려는 의지일지 모른다. 조형예술이 타임머신의 역할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가 닿을 수 없는 시간에 있는 힘껏 현재를 보태는 간절한 마음이다.PA



백요섭



작가 백요섭은 한남대학교 미술학과와 미술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2019년 동 대학원 미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회화와 설치, 영상을 넘나들며 기억과 감정의 중첩을 기록하고 있는 그는 <PALIMPSEST>(N gallery, 2017), <가상적 흔적이 끼워지는 순간>(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 프로젝트룸, 2019), <변신, 흔적으로 남은 시간들>(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2020), <휩쓸린 지점들 ‘상실된 온도, 사라진 부피’>(Artspace128, 2021) 등의 개인전과 <Untact Exhibition Shift 6th>(갤러리박영, 2022) 등 다수의 그룹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롯데호텔 서울, SK 연구소 등에 소장돼있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