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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7, Apr 2022

신이피
Sin Ifie

위로 솟는, 건너 뛰는

“사체가 퍽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솟았다.”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2>(2020)의 마지막 텍스트. 신이피의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을 닮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살살 움직이는 영상 위에 시적인 텍스트가 턱턱 달라붙는 신이피의 작업에서 과거의 사건들은, 그렇게 갑자기 표면 위에 올라와 당혹감을 준다.
● 권태현 미술비평가 ● 이미지 작가 제공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1,02, 휘앙 새' 설치 전경 2020 송은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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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현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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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처분된 돼지들의 유해가 등장하는 ‘죽은 산의 냉철한 새’ 트릴로지와 학살지 유해발굴 현장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휘앙 새>(2020) 그리고 최근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작업까지. 그의 작업은 마치 특정한 사건과 현장을 명확히 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작업은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표면은 어딘가 단단한 땅을 비추었다가도, 이내 출렁이는 물결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어딘가로 흘러가버린다. 때로는 “대각선으로.” 컬러 필터로 색을 바꾼 이미지는 부지불식 간에 서서히 색을 바꾸며 눈을 간지럽히고, 그 위에 무언가 둥둥 떠오르기도 한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부유하는 먼지와 날갯짓하는 동물이, 산 채로 죽은 채로, 이따금씩 이상하게 똑같은 스케일로.

그런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뼛조각이나 박제된 동물들이 나올 때면, 이미지의 표면은 굉장히 물질적으로 전환된다. 아주 얕은 심도로 표면을 세세하게 훑으면서 손으로 사물을 잡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 이리저리 살피듯이. 그렇게 뼈만 집중해서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사람의 뼈인지, 동물의 뼈인지, 과학적 표본인지, 학살의 증거인지 알 수가 없다. 나무처럼 오래된 표면과 구멍이 송송 뚫린 단면에서 시간이 읽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숫자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퍽 솟아오른 뼈에서 흙먼지를 털어내는 이미지의 고고학이 신이피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고고학은 역사와 마찬가지로 과거를 다루지만, 역사를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해 이해 가능하고 순차적인 것으로 배열해내는 반면에, 고고학은 과거를 선형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고고학은 일단 튀어나온 사물들의 비논리적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서 지금으로 갑자기 솟아오른 물질을 마주하는 작업이 된다. 역사의 재료가 되는 사료와 달리, 고고학이 발굴해내는 것은 말이 없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짚어내듯, 고고학은 침묵하는 기념비, 의미 없는 흔적, 문맥 없는 대상들 그리고 과거가 남긴 사물들에 대한 것. 그렇기에 신이피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고고학도 당혹스럽게 솟아오른 사물들을 대하는 문제가 된다.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3> 2020 
싱글채널 비디오 7분 42초



그의 영상에서 논리적인 연속성과 선형적인 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스멀스멀 움직이는 이미지 위에 텍스트가 떠오르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설명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충돌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이것들이 왜 함께 놓여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이미지와 말들이 앞뒤로, 위아래로 붙어있다. 그것은 의미를 파악해야 하는 문장이 아니라, 시(詩)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죽은 산의 냉철한 새 #02>로 돌아와 그 중간에 등장하는 끈적하게 인화된 흑백 사진을 본다. 옅은 눈썹과 깊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의 얼굴, 깨끗하게 화학 처리된 뼈와 미생물이 꿈틀거리는 흙에 묻혀 있는 뼈 그리고 살아있는 새와 죽은 새의 이미지가 교차되는 사이로 그 사진은 정말이지 뜬금없이 끼어든다.

“미온의 미끌하고 불결한 요동은 고요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적셨다”라는 텍스트와 함께. 사진의 형태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있지만, 클로즈업한 채로 화면이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는 탓에 그 사진은 시각보다는 촉각을 자극한다. 사진의 표면 곳곳에 붙어있는 먼지가 오래된 젤라틴 인화지의 끈적함을 머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사진의 이미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뼛조각, 또 살아있는 앵무새의 부리까지. 이미지의 연쇄는 서사가 아니라, 튀어오르는 표면을 만들어낸다. 이미지와 사물의 경계에서. 이것은 신이피가 영상을 전시할 때 화면 속에 등장하는 뼈를 함께 전시하는 맥락을 생각해볼 수 있는 차원이기도 하다.



<부정한 지연> 2019 박제, 유리, 
스테인리스 160×100×100cm



<휘앙 새>는 특히 유해 발굴 현장을 담아내면서 고고학이라는 문제를 전면화하고 있다. 땅에서 나온 물질들을 하나하나 소중히 살피고, 분류하고, 체에 거르는 장면은 신이피의 이미지가 작동하는 구조를 보여주는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나아가 여기에서도 서로 다른 심상이 물질성과 함께 부딪히는 이미지의 연쇄가 흥미롭게 포착된다. 바싹 마른 뼈의 이미지와 비가 내리는 유해 발굴 현장의 이미지가 교차되는 것이다. 땅의 곳곳을 커다란 비닐로 덮어 후두둑 빗소리가 이어지고, 어떤 곳에는 신문지를 겨우 덮어 놓은 곳도 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라 신문의 글자를 읽을 수도 있는데, 대부분 광고로 보인다. 신문은 그 자체로 전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그곳에 붙어있는 지금-여기의 시간이 감지된다. 흙 속의 유해들은 이제 과거의 사물이 아니라 땅 위로 솟아오르는 순간, 현재에 귀속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유해 발굴 현장에서 나온 총알들을 분류하는 장면에서는 사운드가 톤을 바꾸어 작업 현장에 틀어져 있던 가요를 들려주기도 한다.

파묻혔던 존재들은 애초에 층층이 선형적이고 논리적인 시간의 질서에 놓여 있을 수가 없다. 퇴적된 시간을 거슬러 땅을 파고, 그곳에 묻힌 존재들. 그들은 자신의 시간에 가만히 묻혀 있지 않는다. 퍽하고,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잠재되고 억압된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렇게 신이피의 작업은 서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던 것들이 부딪히는 장이 된다. 그것들은 서로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거나 갑자기 느슨히 놓아주면서 이상하게 움직인다. 딱딱한 이미지와 물렁한 말. 흐르는 이미지와 견고한 말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가며 무언가 직조하고 있다.



<발굴한 돼지뼈들> 설치 전경 2020 
구제역 매몰지에서 발굴한 돼지뼈들, 
유리 가변 크기 송은아트스페이스



거기에 더불어 신이피는 어딘가 이상한 말들을 자꾸만 만들어낸다. 약혼자를 뜻하는 피앙세(fiancé)를 ‘휘앙 새’로, 죽은 상태를 그대로 박제하는 ‘데드 마운틴(dead mountain)’을 ‘죽은 산’으로 옮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사실 번역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번역이라는 말뜻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 ‘translation’ 그리고 ‘飜譯(번역)’. trans- 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거나 건너뛰는 것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심상은 한자어에도 남아있는데, 飜(번역할 번)자는 番(차례 번)자와 飛(날 비)자를 합쳐 만든 말로, 본래 새가 몸을 뒤집는 것을 뜻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다. 그것은 전혀 다른 곳으로 날아들기 위한 전회를 연상시킨다. 신이피의 맥락에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날갯짓하는 새들 그리고 몸을 뒤집어 가만히 누워있는 데드 마운틴으로 박제된 새까지 함께.

그렇게 다른 시간과 다른 존재들을 훌쩍 건너뛰면서. 구체적인 사건에서 일반적인 경험으로, 돼지의 뼈에서 사람의 뼈로, 이미지와 텍스트들은 펄떡 뛰어오른다. 그것들은 과거와 현재, 서로 다른 장소 사이, 심지어 삶과 죽음 사이를 건너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텍스트와 텍스처.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지금 딛고 있는 곳을 다시 보게 된다. 엊그제 나는 땅에 묻히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민중들을 똑똑히 보았다. 고고학적 이미지와 시어들은 여기에 몸을 뒤집어 날아와 부딪힌다. 그리고 “사건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일상에 영원했다.”(<죽은 산의 냉철한 새 #02>에서)  PA



프로필
사진: 이재욱



작가 신이피는 유럽연합고등영상원(École européenne supérieure de l’image)에서 미디어아트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상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집단과 사회 속에서의 한 인간의 관계성을 미시적으로 시각화하는 과정들로서의 ‘실험실’을 표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관찰 실험실: 인체풍경>(스페이스9, 2016)을 시작으로 <희연한 잠>(송은아트큐브, 2018), <다리의 감정>(서울시립미술관 SeMA 창고, 2019), <죽은 산의 냉철한 새>(온수공간, 2020) 등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국내는 물론 프랑스, 독일, 홍콩, 일본 등에서의 그룹전에 참여해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송은문화재단, 서울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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