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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3, Dec 2021

클루지 학파의 새로운 세대

Romania

New Generation of the Cluj School

● 정지윤 프랑스통신원 ● 이미지 the artists 제공

Lucian Popăilăă 'Fishscapes-Fish tail' 2013 Oil on canvas 30×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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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윤 프랑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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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파리, 뉴욕, 런던은 잊어라. 새로운 예술 도시가 몰려온다.” 예술·문화서적 전문 출판사 파이든(Phaidon)은 2013년 출간한 『미래의 예술 도시들: 21세기 아방가르드(Art Cities of the Future: 21st Century Avant-Gardes)』에서 19-20세기 예술계를 이끌어 온 기존의 아트신 외에 앞으로 급부상할 것으로 기대되는 핫스폿을 소개하며 현대예술의 거대한 지형 변화를 전망한 바 있다. 당시 이 책에서 언급된 차세대 예술 도시는 우리나라 서울을 포함해 베이루트, 보고타, 클루지, 델리, 이스탄불, 요하네스버그, 라고스, 산후안, 상파울루, 싱가포르, 밴쿠버까지 총 12곳이다. 이는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1990년대부터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와 탈중심화 현상에 집중, 지역적·국제적 쌍방향 예술 네트워크 인프라 구축 및 발전 가능성에 기반해 선정된 곳들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예상은 얼마나 적중했을까.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와 같은 굵직한 국제행사들을 개최하며 급부상한 도시들도 있는 반면, 여전히 존재감이 없는 곳들도 더러 있다. 이러한 가운데 조금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도시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클루지나포카(Cluj-Napoca)다.




Szilard Gaspar <Human Punch Bag>

Performance 2019




클루지 학파에서 클루지로

루마니아의 북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위치한 조그마한 도시, 클루지나포카에서는 블록버스터급 전시나 대형 이벤트를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일렉트릭 캐슬(Electric Castle)’ 음악 페스티벌, ‘트란실바니아 국제 영화제(Transilvan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등 다양한 문화 축제들이 존재하지만, 현대예술을 대상으로 한 국제행사나 시장이 아직 활발히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왜 이런 곳이 기대되는 예술 도시로 선정될 수 있었을까를 살펴보자면, 그 배경에 바로 클루지 예술 디자인 대학(Universitatea de Artă și Design Cluj-Napoca)이 있다. 빅토르 만(Victor Man), 아드리안 게니(Adrian Ghenie), 세르반 사부(Serban Savu), 미르체아 칸토르(Mircea Cantor) 등 현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루마니아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이 학교 출신으로 일명 ‘클루지 학파(Cluj School)’ 예술가들로 불린다.


이들은 1989년, 공산주의 체제와 독재 정권을 붕괴시킨 루마니아 혁명을 직접 목도한 세대로 주로 루마니아 현대사의 비극적 참상을 다룬 회화 작품들을 선보여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캔버스 전체를 온통 무거운 청색 빛으로 물들여 시대의 우울을 표출한 만, 공산주의 시대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들이 여전히 잔재로 남아있는 루마니아의 풍경을 묘사한 사부, 악명 높았던 권력자들의 얼굴을 뭉개고 일그러뜨린 게니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화폭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어둡고 침울함,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장면은 클루지 학파의 예술을 설명하는 미학적 특징으로 거론된다. 이처럼 역사가 남긴 공포와 트라우마와 마주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일종의 ‘기록과 기억의 예술’로 전개된 초기의 클루지 학파의 예술은 최근 들어 주제와 장르, 표현 매체와 테크닉 등 형식과 내용, 양 측면에서 한층 더 다채로워지는 모양새다.




Lucian Popăilăă <Brushwood I>

2017 Fresco on plywood 125×90cm




새로운 세대

클루지 학파의 새로운 20·30 세대들은 기존의 예술을 답습하기보다 다양한 예술적 시도와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회화 장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으로 루치안 포파일라(Lucian Popăilă)의 작업을 들 수 있겠다. 식물의 꽃봉오리, 나뭇가지들이 마구 뒤엉킨 덤불, 생선 등 아주 일상적인 소재들을 모티프로 삼아 재현하는 그는 평범한 오브제들 속에 내포된 존재론적 의미와 도상학적 상징을 도출하거나 새롭게 부여함으로써, 정물화와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강렬한 원색으로 채워진 캔버스 정 중앙에 죽은 생선의 전체 혹은 잘린 꼬리나 몸통 일부를 정면에 배치한 과감한 화면 구성, 거친 붓 터치와 세밀한 필치가 교차하는 초기작 <물고기 풍경(Fishscapes)>을 시작으로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켜 이집트에서 핍박받던 히브리인을 구출한 모세(Moses)의 ‘탈출기(Exodus)’에 기둥의 형상으로 등장한 신의 존재를 불타는 나무, 구름, 물기둥으로 재해석한 <기둥의 벽(Wall of Pillars)>, 전통 프레스코 기법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식물화 <프레스코 식물들(Fresco plants)>로 이어지는 작업 속에서 그는 정물과 풍경이 가진 미술사적 코드와 종교적 서사에 담긴 알레고리를 형이상학적으로 재해석, 재맥락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무엇보다 그의 회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대상을 최소한으로 절제된 형태로 축약하여 오히려 그 속에 있는 본질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대상과 배경을 군더더기 없이 절단하는 식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오직 4개의 염료만으로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구사했던 과거 비잔틴 예술의 전통 색채법 테트라크로미(tetrachromy)를 고수한다. 이러한 프로세스는 5-7-5순으로 총 3행 17음으로 구성된 일본 하이쿠 문학에서 영감을 얻은 최신작 ‘하이쿠(Haiku)’ 시리즈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빛에 따라 미세하게 변화하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채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의 결합을 통해 관람객의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번 신작은 어떠한 사건과 사물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아주 간결한 표현으로 함축해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포파일라 회화의 ‘절제된 미학의 힘’을 잘 보여준다.


클루지 회화계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작가로는 노르베르트 필렙(Norbert Filep)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드로잉과 텍스트를 선-이미지로 치환하여, ‘0’과 ‘1’의 두 개의 숫자로 수렴되는 현대 디지털 정보 사회의 시스템과 그 풍경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업 과정과 테크닉, 마티에르는 상당히 간단해 보인다. 다양한 굵기의 (색)연필들과 펜, 자를 이용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선 긋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결과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작가의 드로잉 기법은 정교하고 치밀하며, 개념적이다. 동일한 세기의 힘을 주어 선을 긋고, 특정 부분에 먼저 채워진 선 위로 새로운 선을 겹쳐 긋는 레이어 효과를 통해 명암과 입체감을 준 <선(Line)>, <나선(Spiral)>을 비롯해 선의 방향과 길이, 형태를 달리하거나 색을 넣어 리듬감 있는 패턴을 생성한 <우리가 보는 음악(The music that we see)>, 예술 카탈로그나 매거진 등에서 발췌한 기사와 텍스트들을 기호화한 <텍스트 습작(Study for a Text)>은 강박과 집착에 가까울 만큼 선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필렙의 완전무결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조형 요소인 선으로 구축할 수 있는 이미지·언어적 표상, 그 무한한 가능성을 입증한다.




Norbert Filep <SPIRAL>
2018 Pencil on paper 50×70cm



작가는 자신의 드로잉과 텍스트 작업은 모든 것이 비물질화되는 디지털 데이터 시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마치 컴퓨터의 연산을 연상시키듯 정확하게 재단된 선들을 반복하여 겹겹이 층계를 쌓아올린 그의 작업이 흥미로운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드로잉 기법은 비물질화·기호화되는 디지털 데이터의 생성 원리 그 자체를 역으로 적용하여 물질화된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비물질성’으로 정의되는 디지털 데이터 시대의 초상인 동시에 그 저항의 표현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마치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을 형상화한 듯, 가로, 세로의 길이가 20cm인 정사각형 종이에 그려진 선 드로잉 1,000장을 벽면에 정렬하여 설치한 <픽셀(Pixel)>, 그 광경은 오늘날 수많은 디지털 데이터들이 생산, 반복, 축척, 유통, 재생산되는 시스템의 은유이자 종이, 문자와 같은 물리적인 매체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디지털화 현상을 남긴 실재하는 유형의 기록이다.


이 밖에도 회화를 넘어, 다른 장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작가들도 있다. 가스파르 스질라르(Gaspar Szilard)가 그중 하나로, 독특한 이력으로 먼저 눈길을 끈다. 작가이자 프로 복서이기도 한 그는 복싱 스포츠와 예술을 결합시키며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사실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구타이(Gutai) 그룹이 벌인 구체미술 운동과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행위 예술에 영향을 받은 그는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우연성’을 복싱에 대입시켜 각각의 동작과 움직임에 응축되어 있는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물리적으로 환원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는 복싱 경기 혹은 행위가 일어나는 동안 그 속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요소들, 예컨대 힘과 집중력, 감정들을 정제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물상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많은 퍼포먼스 작가들이 비디오나 사진이란 매체로 관찰된 행위를 기록하는 것과 달리 경기 자체를 퍼포먼스로 사건화시키거나, 행위를 쉬포르(support)에 직접 가하는 식으로 물리적 체험에 바탕을 둔 액션 페인팅과 조각들을 남긴다. 벽면이나 펀칭 백을 점토와 종이로 감싼 후, 실제 복싱을 하여 그 흔적을 남긴 ‘행위(Action)’ 연작, 사람을 펀칭 백으로 공중에 매달아 치는 <인간 펀칭 백(Human Punch Bag)>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의 몸, 종이, 점토 위에 새겨진 선명하게 남은 주먹 자국들과 핏빛 상처들, 그것은 인간의 신체가 발산할 수 있는 힘의 궤적이자,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증표로서 그 의미가 깊다.


지금까지 클루지 학파와 그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루마니아의 예술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지만, 소리 없이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계 아트신에서 가장 주요한 주체는 결국 역량 있는 예술가들이며, 그들을 양성하고 배출하기 위한 지속적인 시스템과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클루지 학파라는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세계를 무대로 이제 날갯짓을 펼친 곳,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이곳의 이름이 더욱 자주 들려오기를 기대해 보는 바다. PA



글쓴이 정지윤은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현대미술과 뉴미디어학을 전공, 「미디어 시대시각 예술의 해체미학」을 연구했으며, 현재 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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