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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80, Sep 2021

퍼포먼스: 시대에 반응하는 예술

Performance: Art that Responds to the Times

행위의 시간적 과정을 중시하는 퍼포먼스 아트는 동시대 예술을 가장 자유롭게 표현하는 매체로 그 중요성 또한 날로 커지고 있다. 2019년 경기도미술관이 국내 최초로 퍼포먼스의 ‘개념’을 작품으로 수집, 소장한 것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 국공립 기관들도 그 소장의 기회를 넓히고 있다. 이렇듯 퍼포먼스 아트의 미술사적 가치는 물론 시장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이에 관해 좀 더 심도 깊게 살피는 기획을 마련한다.
● 기획 윤진섭 미술평론가, 정일주 편집장 ● 진행 편집부

클레다 & 쁘띠피에르(Clédat & Petitpierre) 'Les baigneurs' 2017 © Yvan Cléd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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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미술평론가,고동연 미술사가,문재선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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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퍼포먼스의 국내외 현황을 아우르며 동시대 미술에서 퍼포먼스가 차지하는 위상과 문화적 파급력, 융합적 성격이 무엇인지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이어 미국 사례를 중심으로 1960년대 주요 퍼포먼스 역사 이전, 혹은 언저리에서 벌어진 사례를 통해 공연예술에 한정된 경계 허물기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다원 예술 등으로 확장된 이론적 계보를 되짚는다. 끝으로 팬데믹 상황으로 변화한 매체의 플랫폼과 지각변동을 살펴봄으로써 퍼포먼스 아트의 현재와 미래의 지형도를 그려본다. 이 특집은 기획자이자 작가, 평론가로 한국 퍼포먼스 역사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윤진섭 선생과 함께 만들었다.



SPECIAL FEATURE No. 1 

팬데믹 시대의 퍼포먼스와 사이버 예술_윤진섭  


SPECIAL FEATURE No. 2 

뉴욕 퍼포먼스 아트의 미술사적 내러티브를 

비평적으로 재고하다_고동연   


SPECIAL FEATURE No. 3 

접촉 예술의 낯선 대면, 퍼포먼스의 변곡점_문재선  





김석환 <어디로 갈거나> 2009





Special Feature No. 1

팬데믹 시대의 퍼포먼스와  사이버 예술

● 윤진섭 미술평론가



“나의 영혼이여, 불멸의 생을 탐하지 말라. 다만 가능의 영역을 파고들라.”

(핀다로스 <아폴론 축전>(퓌티아) 찬가Ⅲ)



위의 잠언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해변의 묘지>란 유명한 시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니 천만년 살 것처럼 유난 떨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이나 찾아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시의 끝 연에서 발레리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절규한다. 「퍼블릭아트」 9월호에서 다룰 특집은 퍼포먼스(Performance Art)다. 우리말로 행위예술 혹은 행위 미술이라고 부르는 예술의 매체다. 장르가 아니다. 흔히 퍼포먼스가 회화나 조각과 같은 미술의 장르인 것처럼 착각하나 유사할 뿐 실은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퍼포먼스의 개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처럼 유연해서 시대에 맞춰 변신을 잘한다.


예를 들어보자. 1990년대 후반 한 강연에서 나는 200명의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한 적이 있다. “여러분, 지금부터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빨간 점 하나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그만’ 할 때까지 그걸로 자유롭게 ‘드로잉’을 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죠?” 이 사건(event)은 미술계에 보고되지 않았다. 그 후 비슷한 시도가 서너 차례 더 있었지만, 청중들이 수십 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과연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흔적이 없는 퍼포먼스! 그렇다면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이 ‘비물질화’된 드로잉의 금전적 가치는 얼마일까? 과연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일까? 이 퍼포먼스의 제안자인 나는 그 점이 궁금하다. 


그런데 최근 이와 유사한 사례가 미술계에서 일어났다. 암호화폐를 사용하여 디지털 미술 작품을 구입,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이다. 이는 원화(原畫)가 아니라 디지털 가상 이미지를 사고파는 데 필요한 기술(NFT)의 발달에 따른 결과다. ‘대체 불가능한 토큰(Non-Fungible Token)’을 뜻하는 NFT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가상자산이 지닌 ‘희소성’과 ‘유일성’ 때문이다.1) 미술에서의 오리지널리티(orginality), 즉 원본성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 유일성은 고전적인 의미에서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예컨대 <모나리자>의 ‘오리지널리티’는 루브르미술관에 걸려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작품 단 한 점에 유일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사진과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지구상에는 수많은 모나리자의 복제 이미지가 떠돌고 있다. 잘 알려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L.H.O.O.Q>(1919)는 이러한 상황을 비튼 것이다.



윤진섭 ‘행위예술의 뿌리줄기 개념도’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한국행위미술 1967-2017>

(2018, 대구미술관)




아무튼 복제 이미지는 작품의 원본에 비해 ‘아우라(aura)’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치 면에서 현저하게 떨어진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에서 오리지널 작품이 지닌 ‘이곳 그리고 지금(das Hier und Jetzt)’, 즉 “작품이 존재하는 그곳에서의 일회적 현존”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벤야민에 의하면 오리지널 작품의 진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이 ‘이곳 그리고 지금’, 즉 일회적 현존의 개념이다. 예컨대 청동 제품에 대한 화학적 분석은 진품의 규명에 따른 진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2) 따라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의 개념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현재와 같은 NFT나 메타버스의 플랫폼에서 디지털 복제 이미지가 원본으로 높은 대접을 받으며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3) 다음의 인용문은 예술 분야에 나타난 NFT의 양상에 대한 현저한 예다.


“NFT는 가상자산에 희소성과 유일성이란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 디지털 예술품, 온라인 스포츠, 게임 아이템 거래 분야 등을 중심으로 그 영향력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Beeple)이 만든 10초짜리 비디오 클립은 온라인에서 언제든지 무료로 시청할 수 있지만, 2021년 2월 NFT 거래소에서 660만 달러(한화 약 74억 원)에 판매됐다. 또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엘론 머스크(Elon Musk)의 아내이자 가수인 그라임스(Grimes)는 2021년 3월 NFT기술이 적용된 ‘워 님프’라는 제목의 디지털 그림 컬렉션 10점을 온라인 경매에 부쳤는데 20분 만에 580만 달러(한화 약 65억 원)에 낙찰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네이버 지식백과)


2018년 대구미술관이 주최한 전시 <한국 행위미술 50년 : 1967-2017/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의 협력 큐레이터인 나는 전시도록에서 ‘행위예술의 뿌리줄기 개념도(Rhizomatous Map of Performance Art)’를 제시한 바 있다. 이 도형을 유심히 살펴보면 퍼포먼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현재의 양상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전망이다. 맨 외곽을 주목해보자.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용어들이 적혀 있다. 사이보그, 빅 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살, 로봇공학, 휴머노이드(Humanoid), 사회적 관계망, 인공지능 등이다. 여기에는 지금 논의하는 NFT와 메타버스(Metaverse/Meta+Universe) 등이 누락됐는데, 그 이유는 이 개념도를 구상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용어들이 대체로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경호 <오병이어> 2017




코로나19로 대변되는 팬데믹 상황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로 대변되는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에서 새로운 퍼포먼스의 양상을 낳았다. 아바타(avatar)가 그것이다. 인간의 몸을 대신한 이 아바타는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아의 분신으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게다가 요즘 들어 유행하는 본캐(본캐릭터)와 부캐(부캐릭터)의 개념은 아바타와 더불어 자아 확장의 추세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몰아가고 있다. 마치 장주(莊周)의 ‘호접몽(胡蝶夢)’이 살아 숨 쉬는 듯한 현재의 디지털 기반 퍼포먼스는 폭넓은 문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4) 그것은 현실과 가상을 왕래하면서 체험하게 되는 관객 참여, 즉 게임에서 아바타를 키우거나 새로운 환경을 설정하는 일 등등 사용자(참여자)의 창의력이 발휘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찍이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호모 루덴스(Homo Ludens)』에서 모든 문화에는 놀이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파악한 것처럼, 웹상에서 전개되는 디지털 퍼포먼스는 각종 게임에서 보듯이 무엇보다 놀이적인 측면이 강하다.


2020년 초,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가 야기한 팬데믹 상황은 비대면을 강요함으로써 인류를 ‘웹(Web)’이 지배하는 가상의 세계로 몰아넣고 있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가 야기한 비대면 상황은 인간을 점차 현실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내몰고 있다. 인간의 자연 침범과 그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으로 대변되는 팬데믹 상황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낳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NFT나 메타버스에 관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도래할 문화적 변형의 양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생태와 자연환경에 대한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어서 주목된다.


둥근 지구본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색의 포도주를 마시는 김석환의 퍼포먼스는 환경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에 대한 은유다. 그는 자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관객들에게도 마실 것을 권유한다. 관객들은 다 함께 동참하는 가운데 살기에 점점 척박해져 가는 지구환경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쓰고 있던 검정 우산의 천을 벗기고 우산대로 지구본 중심을 관통하여 참새구이를 하듯 빙빙 돌려 모닥불을 쬐는 행위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외계인과의 교신을 시도하는 퍼포먼스를 발표한 작가는 문재선이다. 파리를 의인화한 이 등장인물(문재선)은 팬티만 걸친 몸에 검정색 벨트를 감고 안테나를 비롯하여 양손에 든 탐지봉 등 교신에 필요한 장비들은 외계인과의 접촉의 상징물들이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작가는 통신장비를 등에 지고 머리에 장착된 안테나와 손에 든 탐지봉으로 발표장소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교신을 시도하는 동작을 취한다. 물론 실제로 통신기능을 갖춘 장비는 아니지만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외계인과 접촉하려 한다.




First year Studio Residency artist Okwui Okpokwasili 

<Poor People’s TV Room (solo)>  

Performed at Lincoln Center Atrium 2015 

Photo: Caitlin McCarthy




이경호의 퍼포먼스는 설치작업과 병행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아티스트이기도 한 그는 지구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는 2008년부터 생태 문제와 기후변화를 주제로 작업을 펼쳐왔다. 실생활에서도 전기차를 몰고 있는 그는 생태문제를 탐구하는 학술단체 ‘지구와 사람’에 동참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연구한다. 울산 ‘태화강국제설치미술제’에서 발표한 <오병이어>가 대표작이다. 이경호는 또한 검정색 비닐봉지를 허공에 띄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과정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작품을 국내외 여러 나라에서 펼친 바 있다. 카메라가 비닐봉지를 추적한 시선의 동선을 연결하면 마치 수묵화의 선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 작업이다.


드로잉과 설치작업, 퍼포먼스를 병행하고 있는 Gena Son(손현주)은 최근 들어 다수의 대규모 대지 미술 작업을 선보인 바 있다. 안면도의 바닷가와 안동의 오지에 위치한 밀밭에서 벌인 퍼포먼스는 자연을 캔버스 삼아 펼친 강렬한 시각적 데먼스트레이션이었다. 여성의 자궁을 상징화한 ‘ㄷ’자 형태의 기와를 이용한 설치작업은 파도에 쓸려 흐트러졌으며, 드넓은 밀밭에서 펼쳐진 퍼포먼스는 검정 옷을 입은 다수의 행위자들이 검정색 연막탄을 터트려 자연 속에 강한 시각적 흔적을 남기는 쇼킹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는 최근 안면도 바닷가에서 국내외 작가들을 비롯한 관객들의 메시지가 담긴 1,000개의 주황색 튜브를 바다에 띄운 대규모 설치작업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과도한 물질문명이 낳은 폐해는 이제 지구를 파국의 곤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마스크를 쓴 채 2년째 지속되고 있는 팬데믹 상황은 물질 대 정신의 싸움에서 물질의 우승으로 판가름 나는 것 같다. 이 글의 서두에서 ‘영혼’을 언급한 이유다. 물질의 상승은 NFT와 메타버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이 분야에서 사기가 운위되는 이유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의 바람직한 기능과 소임이란 과연 무엇인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 번쯤 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그다지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PA




클레다 & 쁘띠피에르(Clédat & Petitpierre) 

<La Parade Moderne> 2013 © Yvan Clédat




[각주]

1) NFT가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 디지털 자산을 진품으로 증명하게 됨에 따라 예술 작품이 이더리움과 같은 암호화폐를 통해 고가로 거래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전통적인 경매사들도 이러한 사업에 합류하고 있으며, 메타버스상에서 거래되는 가상자산, 즉 NFT, 가상화폐, 가상토지 등의 개념은 퍼포먼스와 관련하여 볼 때 매우 흥미로운 국면을 제공한다. 예컨대 가상토지는 얼책(facebook)의 가상국가인 ‘Pajama Republic’의 가상토지를 메타버스를 통해 판매하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이 앞에서 예로 든 상상 속의 드로잉 판매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2) Walter Benjamin,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Drei Studien zur Kunstsoziologie: 차봉희 옮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현대사회와 예술』, 문학과지성사, 1980, p. 49 

3) 본성의 측면에서 볼 때 디지털의 가장 큰 단점은 무한 복제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 복제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NFT 기술을 이용하면 원본 파일에 소유자의 이름을 부여하여 소유권과 함께 작품의 가치가 파생된다. 하나의 디지털 이미지 작품이 거래되면 소유권의 이전은 물론 작품의 거래 이력이 낱낱이 명기되기 때문에 다른 이미지로의 ‘대체가 불가능(non-fungible)’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진품성의 증명이 작품의 신뢰도를 높이게 되고 따라서 금전적 가치가 발생하게 된다.

4) 이 문제를 다룬 필자의 글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윤진섭, 「현실 혹은 가상? 소셜 네트 워킹(Social Networking)과 미디어 아트의 확장-최근의 페이스북(facebook) 활동을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회 논문집, 2010 윤진섭, 「소셜네트워크와 대안적 사회교육의 가능성-나의 얼책(facebook) 활동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유럽문화예술학회 논문집, 2011




글쓴이 윤진섭은 비평가, 큐레이터, 현대미술가이자 교육자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미학과 석사, 호주 웨스턴 시드니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미술사/미술비평) 과정을 졸업했다. ‘광주비엔날레’(1995),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2004), ‘창원조각비엔날레’(2016) 등에 큐레이터 및 감독으로 참여했으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호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비평과 전시기획, 교육 활동을 이어오던 그는 2007년 이후 다시 행위 미술 활동을 재개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W.P. “Pete” Jennerjahn 

<Elizabeth Jennerjahn dancing at Black Mountain College>

 n.d. Archival pigment print from a digital scan

 Collection of Black Mountain College

 Museum + Arts Center


 



Special Feature No. 2

뉴욕 퍼포먼스 아트의 

미술사적 내러티브를 비평적으로 재고하다

● 고동연 미술사가



퍼포먼스 아트, 다원 예술의 용어적 한계


미술사와 동시대 미술비평에서 미술운동과 장르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논쟁거리다. 특정 미술운동을 지칭하는 입체파, 야수파의 용어는 일군의 작가집단을 비판할 목적으로 붙여졌고, 작가는 각종 ‘분류’에 대하여 무반응으로 대응해왔다. 장르에서도 작가들은 전성기의 잘 알려진 작업 이외 성장기, 커리어 변환기에 다양한 양식과 매체를 실험하게 마련이며 다양한 공동체를 통하여 협업작업을 거치는 일도 다반사다. 이처럼 미술사적 분류나 양식적인 장르가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음에도 동시대 미술비평에서 ‘특정 용어나 분류’가 중요한 지위를 부여받는 일은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문화예술계의 몸집이 커지면서 문화정책이나 예술경영의 운영방식에 더 효과적으로 수렴되기 위하여, 복잡다단한 현대미술의 양상이 특정 용어로 포장되고 정리 정돈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논란의 중심에는 현대미술에서 흔히 ‘퍼포먼스 아트’ 그리고 다양한 예술의 장르를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불리는 ‘다원 예술’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런데 퍼포먼스 아트나 다원 예술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지난 7-8년간 미술관, 미술비평, 기금선정의 항목을 통하여 특정한 형태의 예술을 다원 예술이라는 용어로 정리하고 규정하려는 의도가 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원주의’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현재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신체와 공연예술의 무용, 음악을 결합한 예술은 매우 한정된 형태를 띤다. 부연해 설명하자면, 미술사를 통하여 연극이나 음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예들은 상당히 많아 왔는데 국내 미술관에서 수렴되고 있는 다원 예술은 1960년대 플럭서스, 여성 퍼포먼스 아트, 미니멀리즘 근방의 실험연극과 무용으로부터 파생된 예술에 매우 한정되어 있다. 혹은 ‘새로운 예술’로 주목받아온 ‘미디어 아트’나 과학적인 기재나 지식을 사용한 정도가 확대된 다원 예술의 범주에 들고는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미술사적 계보를 찾는 전시나 이론의 전문성도 편협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흔히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의 ‘9개의 밤: 연극과 공학(9 Evenings: Theatre and Engineering’ 정도가 다원 예술의 성공적인 사례로 여겨지며 각종 토크나 미술관 전시의 소재가 되고는 한다. 물론 ‘9개의 밤’이 성공적인 사례인 것은 맞지만 그만큼 미술사적 영향력에서도 재고의 대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계 허물기의 양상이 지나치게 한정된다. 즉 예술과 문학, 음악, 무용, 기술과학의 경계 허물기가 주로 한시적으로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서 만난 협업의 관계를 통해서 이뤄지고 그러한 형태만이 지원의 범주가 되다 보니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경계 허물기 현상은 오히려 찾기 힘들어졌다. 거리예술, 연극, 방과 후 미술교육 등이 관객 참여적 예술이라는 프레임으로 갇힌 것과 유사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현재 연극, 무용 등의 공연예술에 한정된 경계 허물기의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미술사적 예를 다루고자 한다. 특히 1960년대 ‘주요’ 퍼포먼스 역사 이전, 혹은 언저리에서 벌어진 예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시각예술이 다른 매체를 만났을 때 지속해서 제기되는 질문도 던져보고자 한다. 서로 다른 매체의 작가들이 소통하는 주요한 촉발제는 무엇인가? 협업은 경쟁의 과정인가, 협력의 과정인가? 시각예술과 여타 예술에서 구현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신체와 감각의 문제가 어떻게 유사하며 동시에 다른가? 행위자와 관람자의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경계선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다원주의 예술이라는 용어는 결국 시대적인 유행에 그칠 공산이 크지만, 위의 질문은 현대미술과 심지어 가상공간에서도 지속해서 제기될 쟁점이다. 따라서 퍼포먼스 아트이건, 다원 예술이건 간에 확장된 이론적 계보를 되짚어보는 일이 시급하다.




재즈바 파이브스팟 1950년대 




장면 1: 퍼포먼스 아트의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국내에서 ‘행위예술’ 전문 미술사가나 이론가는 1960년대 뉴욕 미술계에서 ‘퍼포먼스 아트’라고 불리는 일련의 현상에 대하여 통상적인 미술사적 계보를 답습한다.1) 1960년대 초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를 기점으로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던 네오다다 작가 라우센버그가 현대무용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당시 독일의 실험음악계에서 미국으로 돌아와서 활동하고 있던 존 케이지(John Cage)와 의기투합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후 케이지의 수업과 독일 커넥션을 통하여 뉴욕에 도착한, 유럽의 다다로부터 영향을 받은 젊은 실험음악인들, 플럭서스 구성원들이 저변 확대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아울러 미국 서부와 중부에서 파생된 실험연극, 히피 운동, 여성운동이 결합하여서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과 같은 무용가이자 영화인, 무용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나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이 미술관으로 다양한 ‘퍼포먼스 예술’이 흘러들어오게 된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러한 미술사적인 내러티브는 1950년대 전후 뉴욕에서 일어난 예술가와 공동체 사이 다양한 교류의 역사를 배제하고 있다. 퍼포먼스 아트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이전 역사와의 ‘단절’이 강조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반면에 1950년대 뉴욕 미술계는 예술적인 양식이나 장르의 분화, 단절을 강조하던 곳이 아니었다. 피츠버그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앤디 워홀(Andy Warhol)이 1950년대 중후반 연고지 하나 없던 뉴욕에 적응하기 위하여 찾은 곳은 이스트사이드 50가에 자리 잡고 있던 실험 연극무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은 급격한 도시화의 수혜지로서 문학, 연극, 음악, 예술의 본산지로 떠올랐고 1950년대 중반 뉴욕의 파이브 스팟을 비롯하여 주요한 재즈바들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중요한 교류 장소가 되었다. 특히 1950년대 미국의 젊은 작가를 집중적으로 대변하고자 했던 젊은 화상 티보르 나지(Tibor Nagy)는 유럽 모더니즘을 본 따고자 문학인과 예술인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루벤갤러리, 한사갤러리 또한 초창기부터 업타운의 유럽식 모더니즘이 아닌 다운타운 아상블라주, 폐품 활용 미술, 해프닝을 벌이는 젊은 작가를 대변하고자 하였다.


1950년대 뉴욕미술계는 문인들이 미술비평가로 활동하였던 시기였으며 ‘뉴욕 시인 스쿨(New York School)’의 주요 구성원이자 『아트뉴스(ARTnews)』 에디터, 뉴욕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였던 프랭크 오하라(Frank O’Hara), 비평가이자 시인 존 애쉬베리(John Ashbery)는 곧잘 작가들과 협업해서 연극의 대본, 그림과 이미지가 들어간 만화를 화랑의 뉴스레터에 싣곤 했다. 연극 <케네스 코크: 비극(Kenneth Koch: A Tragedy)>(1953)은 선정적인 내용으로 인해 당시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문인, 미술인, 음악인의 상생과 협업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뉴욕 시인 스쿨과 제2세대 뉴욕 추상화가들 사이에는 동성애와 재즈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했다. 리버스와 오하라는 피아노와 색소폰 연주가이기도 하였고, 1954년 비트(전후 첫 반문화, 반전 성향의 문학 문화운동)의 대표적인 시인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울부짖음(Howl)>은 작법이나 소재에 있어 뉴욕 다운타운 재즈바를 드나들면서 화가들과 공유하였던 무의식과 즉흥성에 관한 관심을 십분 반영했다. 리버스는 1964년 대표적인 흑인 비트 시인인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의 사회비판적인 연극 <노예와 화장실(The Slave & The Toilet)>의 무대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또한 미국 실험영화의 역사를 연 <풀 마이 데이지(Pull My Daisy)>(1959)는 뉴욕 다운타운의 반문화적인 예술인의 삶을 조명하고 있으며 리버스를 비롯하여 화가와 시인들이 연기자로 등장하였다. 이후 1960년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가 벌인 <가게(Store)>(1961)나 짐 다인(Jim Dine)의 <웃는 노동자(The Smiling Workman)>(1960)의 해프닝도 반문화적이고 다장르적인 뉴욕 다운타운의 토양에서 태동했다. 재즈바나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열리곤 했던 시낭송회, 영화 상영회, 이벤트에서 선보였던 아마추어적이고 표현적이며 즉흥적인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잡지 『0에서 9』 3호 내부, 1968년 1월 출간, 

베르나데트 마이어(Bernadette Mayer)와 비토 아콘치

(Vito Hannibal Acconci) 출판, 아콘치 디자인 




장면 2: 1960년대 퍼포먼스 아트와 재스퍼 존스의 기억


1960년대 퍼포먼스나 해프닝의 등장에 있어 미술사적으로 흔히 언급되지 않는 인물로 재스퍼 존스(Jasper Johns)를 들 수 있다. 존스는 오하라를 비롯하여 뉴욕 시인 스쿨이나 비트 시인들과 직간접적으로 친분을 맺어왔으며, 비토 아콘치(Vito Acconci)가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그를 인용할 만큼 후세대 퍼포먼스 작가들에게 중요한 예술가다.2) <과녁(Target)>(1955)에서 작가는 신체의 부분, 그것도 남성의 성기를 공공의 장소에서 전시했고 애초에는 관객이 문을 열었다 닫았다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존스의 1950년대 회화는 대부분 관객에게 숨은 그림을 찾듯이 이미지를 숨겨 놓는다. 특히 동성애적인 상징성을 담은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은 아콘치가 강조한 ‘어느 선까지 자신의, 혹은 나아가서 예술가의 친밀한 자아’를 내보일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구호에 익숙한 세대에게 작가와 관객의 영역은 중요한 정치적, 미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과녁>에서 신체를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흔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은 1960년대 당시 화단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두껍게 그려진 연필 선과 면은 직접적이지만 직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작가의 신체를 암시하며 수수께끼와 같이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1960년대 오노 요코(Yoko Ono)의 <컷 피스(Cut Piece)>(1964-1966)나 아콘치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s)>(1970), 아콘치가 화랑의 곳곳에서 사정하면서 그 소리를 전시공간에 재생한 <모판(Seed Bed)>(1972)은 예술가의 신체를 과연 어떻게 관객에게 드러내고 관객이 경험하게 해야 하는가에 있어 훨씬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특히 아콘치의 <모판>에서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방식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퍼포먼스가 작가에 의하여 재연(reenactment)이 아닌 텍스트로 변해가는 과정에 부합되기도 한다. 존스의 영향력은 아콘치가 음악, 문학, 예술, 무용인을 총망라하고 1969년 거리에서 실행된 퍼포먼스의 지시서를 모아서 발간한 <0부터 9까지(0 To 9)>(1968)에서 다시금 두드러진다. 우연히 책에서 발견한 문장을 따서 구성된 아콘치의 퍼포먼스는 전화번호부 책을 펼쳐서 발견한 번호를 반복적으로 읊어내는 존스의 퍼포먼스와 닮았다. 


“가장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을 그렇지 않게 보이게 한다”라는 존스의 미학적 방향성과 함께 일찍이 숫자, 문자, 지도 등과 같이 일상적이면서도 중성적으로 보이는 기호들을 끝없이 나열하는 것을 주특기로 하는 존스의 소재적인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존스는 1974년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와 협업해서 만든 판화에서 문자를 계속 겹쳐 쓰면서 단어나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반복해서 지워나가는 존스의 연필 선은 온종일 눈을 가리고 타자의 손에 이끌려 도시를 방황하거나 눈깜박임에 따라 셔터를 눌러서 사진을 찍고, 화랑의 뒷문에서 눈가림개를 하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아콘치의 퍼포먼스를 통하여 계승되었다. 철저하게 예술적 동기를 외부 조건에 맡기고 진정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을 이끌어내었던 아콘치의 자학적인 퍼포먼스는 존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lemens Kalischer

 (Visiting Photographer 1948 and 1954) 

William Shrauger, Merce Cunningham, and Elaine de 

Kooning in the Black Mountain College  production of 

<The Ruse of the Medusa> (translated by M.C. Richards), 

Summer 1948 Vintage gelatin silver print Collection 

of Black Mountain College Museum + Arts Center




나가는 말: 1950-1960년 뉴욕 퍼포먼스 아트 소사


1960년대 뉴욕미술계에서 퍼포먼스 아트, 해프닝, 플럭서스의 이벤트는 반문화의 급부상, 제2차 세계대전 후 젊은 관객층의 등장, 반전 연극, 반전 무용, 실험영화의 등장, 과학을 둘러싼 정부의 문화정책 등 그야말로 셀 수 없이 많은 역사적 요인들에 의하여 탄생하였다. 그러나 미술사적인 연구가 한정된 몇 계보에 치우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며 최근 7-8년간 ‘퍼포먼스 아트’를 비롯하여 다원 예술, 미디어아트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내에서도 축약된 미술사의 내러티브가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1960년대 등장한 뉴욕형 ‘다원예술’은 이미 1950년대 태동한 미술, 문학, 재즈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 기반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1960년대의 자학적인 퍼포먼스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 신사실주의나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베케트 연극 등 문학의 영향력을 새롭게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짐 다인(Jim Dine)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식의 해프닝 정의에 반대하면서 브레히트나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의 잔혹극으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오히려 1960년대 퍼포먼스 아트나 경계 허물기 예술에 대한 미술사는 역사적 기록과 서술이 결과론적으로 미술관 전시에 포함된 이벤트 위주로 기억되고 집필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플럭서스를 비롯하여 실험적인 그룹들이 그와 같은 서술방식에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로 아콘치의 <0부터 9까지> 거리예술 이벤트는 최근 새로 책으로 발간되기 전까지 작가들이 공유하는 낡은 복사지의 기록문건을 통해서 전문가들에게 알려져 왔다. 원래 기록의 형태나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지닌 우월적인 지위를 포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상기할 만하다. 이런 측면에서 미디어 퍼포먼스, 다원 미술이라는 용어가 유용하고 편리하지만 다양한 작가 공동체나 협업 활동에 관한 현장의 이야기를 억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게다가 국내 다원 예술이 지나치게 정부 주도의 프로젝트 만들어지고 있으며 레지던시, 대안공간, 미술관, 연구프로젝트로 이뤄지는 일종의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기에, 이론가이자 미술사가로서 우려하는 바가 크다. PA





마르코스 루텐스(Marcos Lutyens) <Perdurity>

 2015 Hampton Court Palace, London, 

UK Sponsored by Royal Salute




[각주]

1) 분류에 대한 집착은 모순되게도 다원주의가 문제시하는 모더니즘과 연관된다. 대부분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이미 1950년대 그린버그식의 비평에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모더니즘이든 반 모더니즘이건 간에 분류나 정리에 대한 강한 욕구는 모순되게도 미술비평의 전문화, 체계화를 꿈꾸었던 그린버그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60년대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2) 원래 문학도였던 아콘치는 1964년 뉴욕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존스의 작업을 통하여 자아 성찰의 과정으로서 자신의 문학 활동에 회의를 지니게 되었다고 토로한다. 그런데도 아콘치의 행위예술은 존스의 영향으로 철저하게 자아 탐구를 우선으로 한다는 점에서 1960년대 말 ‘개념적인 퍼포먼스’로 불리기도 하였다. Agostina Bevilacqua, “Vito Acconci. From the space of the page to the space of reality: A metamorphosis of the language,” XIBT Art Magazine, October 2019; www.xibtmagazine.com/en/2019/10/vito-acconci-from  -the-space-of-the-page-to-the-space-of-reality, 2021년 8월 10일 접속 



글쓴이 고동연은 국내외 아트 레지던시의 멘토, 운영위원, 비평가로 활동해오고 있으며 2017, 2018 고양 야외조각축제의 커미셔너를 역임한 바 있다. 최근 저서로는 『소프트파워에서 굿즈까지: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현대미술과 예술대중화 전략들』(2018)과 『The Korean War and Post-memory Generation: The Arts and FIlms in South Korea(한국 전쟁과 후-기억 세대: 한국 동시대미술과 영화)』(런던, 러틀리지, 2021)가 있다. 




성능경 <알람(Alarm)> 2018 

<10주년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국립아시아전당 창조원 복합2관, 광주





Special Feature No. 3 

접촉 예술의 낯선 대면, 퍼포먼스의 변곡점

● 문재선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예술감독



플랫폼의 변신


퍼포먼스 아트(Performance Art), 라이브 아트(Live Art)1)의 현장은 대체적으로 직접적인 대면 예술 활동에 주안점을 두고 지속해왔다. 직접 방문을 통한 교환예술 활동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현재 코로나 현황으로 인하여 국제예술 교류의 현장들이 대부분 멈춰 서있는 상태다. 관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기저로 발생하는 라이브의 작품 발표 성향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가 간 예술교류 현장의 빈도는 매우 높았고, 대륙별 국가 간 예술교류의 친밀도는 매우 가까웠다. 마치 국내 타 도시를 오가듯 서울에서 뉴욕, 파리, 베를린, 홍콩, 양곤 등 여러 도시를 자주 왕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공기 국제선은 대부분 운항을 중단하고 있어 국제 퍼포먼스 아트 현장을 일구는 기관들은 대부분 무기한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라이브의 현장들이 10% 미만으로 줄어들게 된 것이다.


팬데믹 상황에서의 미디어 매체를 활용한 퍼포먼스 발표 방안의 대안이 있는지, 비대면 상황에서의 퍼포먼스 발표 방안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륙별 예술 현장의 기수들이 긴급 회동을 하기도 했다. 온라인 국제세미나를 개최해 몇 주 동안 토론을 벌인다든지, 온라인 생방송을 통해 작품 발표를 지속함으로써 국제예술 플랫폼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5월에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그레이스 익스히비션 스페이스(Grace Exhibition Space)가 주최한 ‘온라인 라이브: 퍼포먼스 아트 인 뉴욕시티(ONLINE LIVE: Performance Art in New York City)’ 프로그램에서 ‘한국의 라이브 퍼포먼스 아트(Live Performance Art from South Korea)’를 공동 기획하기도 했다. 


이는 뉴욕-서울 도시를 서로 직접 왕래해야 했던 지난 2020년 전시계획의 대안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크나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마찬가지로 남미 지역의 칠레 산티아고 ‘국제 퍼포먼스 트리엔날레 대포름(Trienal Internacional de Performance DEFORMES)’에서도 당초 계획과는 다르게 퍼포먼스 영상기록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2)를 주최해오고 있어, 원래는 공동주최라는 큰 규모로 아시아 지역 퍼포먼스 자료들을 공유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방문하기로 했으나 모두 무산되었고, 아쉽게도 개인 참가로 축소하여 진행됐다. 물리적 먼 거리로 인해 직접 교류가 쉽지 않았던 남미 지역과의 교류가 어렵사리 성사되었으나, 수순을 밟는 마냥 준비 단계에 그친 셈이 되었다. 이렇듯 역동적인 라이브의 현장들이 침체되는 양상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새로운 대안책 마련을 위한 방안들이 도처에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다. 




파티마 조닷(Fatimah Jawdat) 

<죽은 사유(Dead Thoughts)> 2017 이라크 바그다드 

<10주년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퍼포먼스의 지각변동


일찍이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정통주의 미학에 반기를 들고 나섰던 아방가르드 문화예술 운동을 잠시 들여다보자. 지난 2009년에는 ‘세계 퍼포먼스 아트 100년’을 대대적으로 기억하고 2016년에는 ‘다다 100주년’을 기념하였던 해였다. 그리고 2018년 국내에서는 ‘한국 행위미술 50년’을 기념하는 전시와 페스티벌이 줄이어 벌어졌다. 그만큼 제도에서 벗어나 있던 퍼포먼스 아트라는 언더그라운드 활동들이 이제는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 속으로 들어와 중요한 단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3) 그만큼 현대미술의 범주를 확장해나가는 현장은 어느 때 보다 더 필수적인 과정임에 틀림없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혁신적인 현시대의 문화와 사회적 역사를 반영하는 예술 활동은 그 확장과 변형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현재를 담아내는 예술의 언어는 진화를 거듭하고, 수많은 예술 현장들은 또 다른 소통을 담보로 계속 태어나고 있다. 경계가 무너진 현대예술 사이에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접촉하는 현대 예술가들의 태도 변화와 도전이 요구되어진다. 그래서 퍼포먼스 아트는 형식을 말하기 이전에 그러한 규정할 수 없는 예술의 범주를 읽어낼 수 있는 해방된 하나의 통로이고,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 행위를 동반한 확장으로써 새로운 전환을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현대도시의 변화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꿈꾸며 미디어 감각(sensibility) 장치를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는 새로운 소통을 위한 도전의 연속이 뒤따른다. 더욱더 윤택한 삶을 위해서는 신기술 개발과 더불어 인간의 모습을 닮은 균형적인 감정(feeling)과 감성(emotion) 활동 부문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슈퍼파워를 주로 꿈꾸는 포스트 냉전시대의 도시문화는 불안과 위험에 관한 징후를 떨쳐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재난과 질병이 빈번한 작금의 시기에 물량주의와 속도주의에 기반한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든다. 시대에 반응하고 다층적인 감각인상(感覺印象)을 견인하는 공감각(synesthesia)을 일으킬 수 있는 이러한 퍼포먼스 아트의 현장들이 줄어든다면 세상 속에서 새로운 소통을 담보로 담아내야 하는 미래에 대한 확산 의지는 꺾여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무한한 퍼포먼스 예술의 창작 발표와 교류가 지속되도록 퍼포먼스 예술 공간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변화를 헤쳐나갈 수 있는 실험실과 같은 퍼포먼스 활동을 위한 전용 공간이 더욱더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 서로 간에 직접 만날 수 없다면 온라인 방송국을 개설하여 전 세계 생방송을 전개하고, 오프라인에서는 다시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리면서 물질과 비물질을 망라하는 아카이빙을 통해 간접적인 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이건용 <달팽이 걸음> 1978/2021 

경기도미술관 퍼포먼스 전경 

이미지 제공: 경기도미술관




변화를 앞선 유무형의 기록들 


다매체 실험의 서막을 이루었고 변혁의 시대를 견인하였던 퍼포먼스 아트는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의 예술계에서 회고전, 아카이브전, 세미나 등을 통해 재조명이 수차례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는 현재에도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지난 한국 퍼포먼스 아트의 50년을 기념하는 전시 <저항과 도전의 이단아들 ‘한국의 행위미술 1967-2017’>(대구미술관, 2018)4)에서는 아시아 행위미술 네트워크라는 특별전이 열려 아시아 지역 퍼포먼스 아트의 아카이브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를 아우르는 아카이브가 소개되고 네트워크의 맵이 전시되기도 하였다. 오는 11월에 열리게 될 2021년 판아시아’5)는 ‘In Finite: Live Hive’라는 주제로 다시 준비되고 있다. 시의성의 유한한 시대이지만 무한한 지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국제예술 교류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한 자리이며, 라이브의 예술 현장을 기록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IN FINITE(유한한/무한한)’는 현재의 시의성(한계) 앞에서 삶의 변곡점을 발견해나갈 수 있는 무한한 퍼포먼스 예술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코로나 현황으로 인한 세상의 ‘유한한(Finite)’ 멈춤은, 삶을 이끌어나가는 방식, 교류와 소통의 방식, 그리고 대면하는 방법을 송두리째 바꿔나가도록 재촉한다. 현대예술의 ‘무한한(Infinite)’ 잠재성을 통해, 질병과 재난이 빈번한 작금의 시기에 물량주의와 속도주의에 기반한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물질(오프라인)과 비물질(온라인)이라는 유형과 ‘무형(Live)’의 예술을 ‘기록(Hive)’하는 방식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탐구를 이어나가서 지속적인 작품 연구와 새로운 방식의 국제적인 연대를 찾아내고자 한다. 혁신을 꿈꾸며 계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미디어의 세상 속에서, 이러한 균형적 발전을 통해 상실된 인간의 정서적 활동을 가미하고자 하며 새롭고도 낯선 소통에 관한 필요성을 환기하고자 한다.6)


2008년부터 기록되어 온 아시아 퍼포먼스 아트, 라이브 아트 기관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퍼포먼스 작품 기록들의 전시를 앞두고 있다.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기 어려운 현시점에서 국내 예술가들이 모여 라이브의 작품 발표를 하고, 국외의 예술가들은 온라인 생방송을 통해 각국의 현지에서 작품 발표를 한다. 그리고 10주년 판아시아를 기념하기 위해 폴란드 3개 도시에서 개최되었던 ‘민주주의 맥락에서 바라본 폴란드-한국의 퍼포먼스 아트’7) 국제세미나와 작품 발표 교류전을 다시 한국에서 온라인 세미나를 통해 개최하게 된다. 올해에는 미얀마의 대표 기관도 함께 참여하여 민주주의의 맥락에서 바라본 국제 퍼포먼스 아트의 실제적인 현황을 논의할 계획이다. 


새로운 변모를 준비하기 위해 ‘인피니트 미디어: 소로 브로드캐스트(Infinite Media: SORO Broadcast)’라는 방송국 개설과 더불어 ‘스페이스 소파(Space SOPA)’라는 퍼포먼스 공간 오픈을 준비 중이다. 멈춰 서버린 라이브 예술 현장을 다시 지속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고, 끊임없이 삶의 변곡점을 찾아 나서는 현장이 되기를 바란다. PA




수르야×정연두 <DMZ 극장-철원 평화극장> 

퍼포먼스 장면 2021




[각주]

1) ‘라이브 아트’ 용어는 1980년대 중반에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분류를 회피하거나 확장되는 예술 작품들을 생각하는 예술가들은 굳이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예술가들은 퍼포먼스로도, 연극으로도 불릴 수도 없거나, 전적으로 무용도 아닌 당시의 어떠한 카테고리에도 어울리지 않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래 퍼포먼스 아트가 미국에서 확립된 장르로 되어오는 동안 라이브 아트는 라이브를 근간으로 하는 예술 작품들의 다양성을 인지해가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조슈아 소페어(Joshua Sofaer), “What is Live Art?”, 2002-, DVD, 영국 

2) 2008년부터 한국에서 개최되고 있는 국제예술협력기구이자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를 아우르는 30여 개국의 퍼포먼스 아트, 라이브 아트 기관, 예술가들의 교류전이다. 2018년에는 10주년을 기념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창조원, 일민미술관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3) 문재선, 「퍼포먼스의 해방구(解放區), 전용 공간의 필요성」, 『서울아트가이드』, 2018년 9월호

4) 국제화 시기(2000-): 특별전 <아시아 행위미술 문재선 컬렉션>

5) PAN Asia(Performance Art Network Asia):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여 아시아 각 국가가 지니고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과 그들의 현재 사회 상황을 퍼포먼스 아트의 연계와 협력을 통해 서로 공감하며, 아시아적 정서와 우정의 교류를 통해 국가 간의 개별적인 특수성과 차이점 그리고 ‘아시아’라는 공통점과 보편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한국을 아시아 퍼포먼스 아트의 정보 거점 및 교류의 플랫폼으로 조성하고 아카이브(2008-2021)를 구축하여 협력에 의한 아시아 현대미술-라이브 아트, 퍼포먼스 아트의 방향성과 정체성을 재조명하고 교환예술 활동을 통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정립하며, 지속적 삶의 담론을 형성하고자 한다. 

6) 2021년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주제 내용 중에서 발췌

7) “Something in Common? Polish and Korean Performannce Art in Democaracy”, 폴란드-Art & Documentation Association+한국-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http://www.journal.doc.art.pl/pdf22/art_and_documentation_22_something_in_common_intro.pdf, 2021년 8월 24일 접속




데린 겐서(Derin Gençer)

 <기억 층위를 걷기(Walking through the layers of memory)> 

2018 <10주년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 

국립아시아전당 창조원 복합2관, 광주




글쓴이 문재선은 2008년부터 현재까지 판아시아(퍼포먼스 아트 네트워크 아시아)의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고, 2018년에는 인도 찬디가르에서 개최된 ‘모니힐즈 퍼포먼스 아트 비엔날레(Morni Hills Performance Art Biennale)’의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2016년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라이브러리파크 아카이빙 프로젝트’에서 ‘아시아의 퍼포먼스 아트-자원 분포 현황 및 콜렉션 구축 심화방안 연구’의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총체예술을 표방하는 ‘SORO 퍼포먼스 유닛’ 예술그룹의 작가,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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