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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1, Aug 2017

미술 수업

Art Lessons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불안감 때문일까. 가끔은 내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일정한 교육을 마친 후 직업을 갖고, 좌충우돌하며 한 분야를 나름대로 깨우치는 일이 자연스러워 보여도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임과 마찬가지다. 좌충우돌까진 겨우겨우 한다 해도, 앞으로 나아가기는 대개 뜻대로 되지 않는다. 특히 미술계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생태계에선 별다른 인연 없이 배움을 구하는 일이, 반대로 누굴 가르치는 것도 녹록찮다. 학교를 떠난 후에는 더더욱 기회가 적다. 그렇기에 예술을 체득하고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면서, 전시든 비평이든 단 몇 줄의 감상이든 누군가의 피드백이 고프다는 이들이 많다.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박지혜 '완벽하게 쓸모없는' 2016 플립시계 33×12×8.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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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혜, 홍승혜, 최병석, 한진수, 천미림, 정현, 문선아, 김현진,이양헌, 문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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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 끝에 마련했다. 말 그대로 미술 수업. 작가, 비평가, 기획자 등 미술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진짜’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내용일지 들어보고자 했다. 멘토링이라는 말은 너무 기계적이다 싶었다. 후배와 선배란 말에도 이미 위계나 어폐가 있을지 모르나, 말 그대로 같은 분야에서 앞서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선배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우선 신진 작가, 기획자, 비평가부터 물색했다. 조건은 데뷔 3년 미만으로 최근 획기적인 활동을 선보인 인물을 위주로 추천받았다. 선정된 신예는 무엇을 어떻게 시작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나 작업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지 조언을 구하고 싶은 최애(!) 선배를 점찍었다. 작업(작품, 전시, 기획안, 비평문 등)을 내보이고 그에 관해서만 평가를 받는 방식도 고려되었으나, 그보다 직업적인 고민과 갖춰야 할 태도 등에 대한 조언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많아 기획의 범위를 유동적으로 열어두었다. 


그렇게 최대한 제약도, 조건도 달지 않고 다섯 쌍의 만남을 주선했다. 후배는 기다렸다는 듯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그간 품었던 수많은 질문을 쏟아내기도 했다. 선배는 그 무렵의 자신을 떠올리며 기꺼운 마음으로,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응답했다.먼저 작가 박지혜는 선배 홍승혜에게 자신과 작업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글의 말미에서 다섯 개의 질문을 보냈고, 홍승혜는 후배의 물음에 따뜻하게 응했다. 또 한 명의 작가 최병석은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속의 말을 풀어놨다. 선배 한진수는 후배의 현실적인 토로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위로했다. 신진 기획자로는 천미림과 문선아가 참여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선배에게 다가갔다. 천미림과 선배 정현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답했다. 문선아는 선배 김현진에게 구체적인 질문 공세를 펼치며 선배의 노하우를 탐했다. 마지막은 신진비평가 이양헌이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린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전의 평문을 쓰고 선배비평가 문혜진이 메타비평 하는 형식으로 꾸렸다.


이처럼 다양한 형식과 방법을 동원했으나, 미술 수업은 결국 ‘개인 교습’에 가까운 모습으로 완성됐다. 그러나 이들의 고민과 질문이 결코 사적이지만은 않다. 비슷한 조건에서 자신의 반경을 넓혀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한정된 지면과 시간의 제약으로 더 많은 사람과 기회를 공유하지 못한 점은 편집부도 아쉽다. 그러니 또 다른 미술 수업을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부디 노크하시라.





SPECIAL FEATURE Ⅰ

박지혜(Park, ji-hye) + 홍승혜(hong, seung-hye)

 

SPECIAL FEATURE 

최병석(choi, byeong-seok) + 한진수(han, jin-su)

 

SPECIAL FEATURE 

천미림(cheon, mee-rim) + 정현(jung, hyun)

 

SPECIAL FEATURE 

문선아(moon, sun-a) + 김현진(kim, hyun-jin)

 

SPECIAL FEATURE 

이양헌(lee, yang-heon) + 문혜진(moon, hye-jin)

 


 


한진수 <Pond of Life> 2016

깃털글리세린모터 가변설치





Special feature 

박지혜(Park, ji-hye) + 홍승혜(hong, seung-hye)

 


박지혜 [신진 작가]


안녕하세요, 미술계 안팎에서 발장구를 치고 있는 박지혜입니다. 나이를 먹어 가고 사회적 위치가 복잡해질수록 자기소개가 점점 어려워지네요. 비정규직 교사, 일용직 잡부, 작가 어시스턴트, 프리랜서 디자이너, 무직…. 무엇이든 좋습니다. 생업 전선의 모든 화살표가 향하고 있는 ‘예술가’만은 아직 마주하기가 부담스럽지만요. 작업 이야기를 꺼내면 반려견 또는 (경험하지 않았어도)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어떤 성격을 가진 자리에서든 한 번쯤은 언급을 해요. 수년 만에 만난 동창들이 자녀 양육에 대한 고민과 은근한 자랑을 털어놓는 것과 비슷할까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는 얘기처럼 볼멘소리를 곁들이는 것이 뒤의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네, 저는 투덜이가 맞습니다. 물론 혼자 세상 번뇌 모두 짊어진 듯한 엄살은 아니에요. 예술 생산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인지하고 있음에도 침묵하는-또는 그마저 모를 정도로 불합리한-현상을 소재로 가져와 짓궂은 장난을 치는 편입니다. 하지만 불만 거리를 자꾸 찾아내서 그렇지, 최근 저의 생활은 예상 가능한 불안함과 규칙적인 질환으로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매사 부정적인(전투적인)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결코.


사실 가장 근본적인 기질은 소싯적부터 장르 불문으로 만들고-고장 내고-고치던 습관입니다. 세 가지 중 전공으로 삼기에는 아무래도 만드는 쪽이 나았으니, 조각 전공으로 학업을 이어갔어요. 그동안 특기를 살려 너무 열심히 일을 했고요. 성인이 되면서부터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는데, 늘 두 가지 이상의 일이었죠. 생계를 걱정해야 할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고 가까운 미래조차 예측할 수 없다 보니 일정 수준으로 대비가 필요했을 뿐이죠. 생산적인-무엇을 만들고 돈을 버는-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실수나 지출(특히 병원비)이 발생하는 식이에요. 바보 같은 제로섬(zero-sum) 게임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친구들이 농담처럼 말하는 ‘박지혜를 갈았다.’는 표현은 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과정의 괴로움이 휘발된 목적의 자리를 대체했거든요. 동시에 사람이 하는 일의 위험요소, 변수, (계약) 조건 등을 따지는 소위 ‘일머리’가 생활 전반에 진하게 스미기 시작했어요. 불확실한 약속들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철저한 계산이 필요하니까요.


활동을 거듭할수록 최종 보고인 전시가 마치 연예인의 SNS 공식 계정 같아 보였어요. 수백 장 컷 중 남들이 관심 가질만한 것으로 선별한 정제된 이미지들.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숨겨야 했는데, 그 이유가 불필요하기 때문인지 잘못되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요. 사고의 흐름에서 굉장히 거슬리는 이 구멍들을 짚고 넘어가면 안 되는 걸까요? 가급적 긍정적인 평가로 서로를 격려해온 동료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이었습니다. 결국, 비용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난제들을 가능한 외면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재 저의 태도는 골판지, 포맥스 등 가벼운 재료에 무리한 노동을 쏟아붓고 칼같이 작품만 모셔왔던 기존 방식에서 확실히 바뀌어 있습니다. ‘예술 노동’, ‘예술인 복지’ 등의 이슈가 부상한 사회적 흐름도 한몫했지만, 피부에 더욱 와 닿는 사연은 단 한 번의 전시(촬영) 이후 처연하게 버려지는 작품이 네다섯 트럭을 넘어가는 비극이었어요. 단호한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을 작업장으로 사용하는 만큼 이 일은 혼자만의 취미 활동이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첫 삽으로서 하드웨어 스펙-꽤 쓸만한 손재주와 보기 좋은 외양-을 내려놓고 최전방에 다른 요소를 배치하기로 했어요. 또한, 다양한 이유로 전시장까지 진입하는 경로에 내팽개친 실패와 궁상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고요.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한번 정해진 신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도 함께했습니다.


작업은 제가 처해 있는 환경과 제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간의 성격에 맞춘 최적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평소 숨 가쁘게 바빠하던 제가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무척 한가하고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낯선 장소와 소소한 분쟁이 소재의 원천이자 실전 경기장이에요. 공산품, 각종 서식 중 효율성의 명분으로 본래의 쓰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형식을 발견하고, 비슷한 메커니즘으로 사회 시스템과 예술 생산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을 소환합니다. 예를 들어, 당연하지 않은 희생(양보/생략)의 아주 하찮은 목적을 폰트 파괴형 화환 리본으로 구현하거나(<그 어느날>, 2017) 한 분의 임을 선발하고자 무명씨들을 녹여 없애는(<noname.sir>, 2017)식의 웃픈 스토리에요. 집요하게 관찰, 리서치, 테스트를 한 다음에는 실현 가능성을 냉철하게 평가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주제의 시의성, 커버 가능한 범주, 작업자의 일과, 예산과 재료의 특성, 날씨까지 광범위한 항목들을 점검하지요. 변치 않는 전제는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


이후의 제작 과정은 신속 정확하게 진행됩니다. 미처 예상 못 한 일이 생기면 다음 출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A, B, C 안까지 최대한 준비를 해요. 마지막 대안은 ‘당황에 대처하는 자세’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요. 한 치 앞을 담보할 수 없는데 언제나 부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우리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애매한 포지션으로 예언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어떤 현장이든 즉각 투입될 수 있는-유연함을 가장한-불안하고 비정형화된 삶의 패턴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더 이상의 변수가 없는 고정/기성의 조건들로부터 일정 부분 구속받는 것이 보험으로 작용하기도 하지요. 똘똘한 학생들도 눈앞에 백지를 두면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인과 관계가 뒤집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만, 디폴트값의 근거를 차근차근 추적하고 필요에 맞게 재조합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 표준-단위-규격-양식의 합리성을 의심해보는 한편 다수의 합의에서 배제된 소수의견을 복기하려고 합니다. 나아가 특정 분위기나 반복적인 표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상을 예리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관점으로 작가적 목소리를 만드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그 관점이 지나치게 편향되거나 너무 구체적이어서 흥미로운 개입의 요소를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들쭉날쭉한 결과물이 이미 익숙한 사고의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은 딜레마입니다. ‘나만 재미있는 농담’을 굳이 작업의 형태로 힘들여 공유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 맥락에서 파생된 질문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Q1. 악기 연주자들은 학위 과정을 마친 뒤로 레슨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대신 곡을 해석하는 데 조언을 구하거나 견해를 들어보는 정도에요. 미술 계통에서 작가에게 필요한 제3의 눈은 무엇을 위함이며, 누구와 어떤 지점을 논해야 할까요? 


Q2. 한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선택에 의한 보편성은 검증된 것입니까? 작가는 검증된 사실에 대해 얼마만큼 신뢰/의심할 수 있습니까?


Q3.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복제에 관해 냉정한 반면 한 사람의 작업 세계를 독해할 때 통일된 양식 또는 공통 지류를 찾으려 합니다. 그것은 왜 필요한가요/필요하지 않은가요?


Q4. 저는 행운이든 건강이든, 어떠한 성향까지도 한 번에 몰아 쓰거나 치우치게 되면 그 보상성으로 반대급부의 일들이 생기는 총량의 법칙을 믿는 편입니다. 생업과 작업 사이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알고 싶습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고 싶거든요.


Q5. 작가로서 만렙[滿+level]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일까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어떤 자리나 성공의 금전적 조건 말고요.



빼곡한 물음표는 언제까지고 대답을 튕겨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면 흉한 일이 생긴다던 학교 동상 괴담처럼 끝을 보기가 두렵기도 해요. 그럼에도 질문을 계속하는 원동력은 마르지 않는 호기심 또는 제가 서 있는 위치의 책임감, 그리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무엇일 것입니다.  



박지혜는 1987년 부산 출생으로, 작업이 어려워 보이는 곳을 골라 다니며 다양한 것들을 만들고 부수는 작가이다. 중,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겸하며 입체, 디자인, 설치, 사운드, 출판까지 필요한 대부분의 업무를 1인 스튜디오 체계로 소화하고 있다. <붉은방>(2014), <홀리홀리홀>(2015), <NO ONE IN CHARGE>(2017) 등 3회의 개인전과 <제34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전>(2012), 제3회 아마도애뉴얼날레 <목하진행중>(2015), <공감오류; 기꺼운 만남>(2016)을 비롯한 다수의 단체전과 2인전  <환상회로>(2016)에 참가하였다.

 



 

 

홍승혜 <점·선·면> 2016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전시 전경 사진 김도균





홍승혜 [선배 작가]

 

박지혜) 악기 연주자들은 학위 과정을 마친 뒤로 레슨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대신 곡을 해석하는 데 조언을 구하거나 견해를 들어보는 정도에요. 미술 계통에서 작가에게 필요한 제3의 눈은 무엇을 위함이며, 누구와 어떤 지점을 논해야 할까요?


홍승혜) 평생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혼자서 그림을 그렸던 헨리 다거(Henry Dager)가 생각나네요. 다거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확신이 있다면 누군가의 견해는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가 남긴 그림들이 미술계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미술사적으로 거론되지만, 그는 애초에 직업 미술가가 아니었습니다. 미술이라는 직업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숫자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관람객이 필요합니다. 직업은 취미와 달리 어떤 형태로든 유통이 기반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견해에 열려 있는 것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특별히 대화를 나누고 싶은 관람객이 있습니다. 제 경우는 제가 미술적으로 지지하고 인간적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저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깨끗한 거울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작가님이 제게 질문을 던진 것은 저를 지지하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 여기고 싶습니다. 미술 내적인 부분에서 미술 외적인 부분, 그리고 현실적 문제에서 이상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논할 수 있는 지점은 실로 끝이 없겠죠. 이러한 논의들은 작가를 세상과 관계 맺게 하고, 그들이 자기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될 때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지혜) 한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선택에 의한 보편성은 검증된 것입니까? 작가는 검증된 사실에 대해 얼마만큼 신뢰/의심할 수 있습니까?


홍승혜) 관람객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앞서 말한 것이 작가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편성이란 본래 모든 대상에 두루 미치는 성질을 말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은 바로 그러한 보편성에서 벗어날 때 빛을 발하니까요. 그래서 다수의 선택이라 해서 반드시 검증된 것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남들은 다들 좋아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분명히 있죠. 그 반대도 있을 수 있고요. 그런 나 자신이 중요하고, 그런 관점을 공유하는 ‘특정한’ 관람객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전파되면 관람객의 숫자는 점차 늘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자연스러운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특수성과 다양성이 본질인 예술에 있어 처음부터 불특정 다수를 의식하는 일은 무의미하게 여겨집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는 매우 상대적이고, 그래서 작가는 검증됐다고 여겨지는 사실을 얼마든지 의심할 수 있습니다.


박지혜)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복제에 관해 냉정한 반면 한 사람의 작업 세계를 독해할 때 통일된 양식 또는 공통 지류를 찾으려 합니다. 그것은 왜 필요한가요/필요하지 않은가요?


홍승혜) 좋아하는 작가를 떠올리면 그것이 형태든 색채든 언어든, 또는 태도든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려지는 게 없다면 그 사람의 세계는 불확실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한 작가를 특징짓는 공통 지류는 필요합니다. 통일된 양식보다는 공통된 지류라는 표현을 선호하는데, 작업은 ‘외모’보다는 ‘성격’에 더 큰 비중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님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텍스트를 읽으면서 하나의 확고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창작의 굳건한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고, 그래서 바뀌기 어려운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이같이 확고한 성격을 기반으로 ‘시대의 요구와는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영역’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그 관심이 곧 시대의 요구가 되는 날까지 정진하는 것이 작가님의 역할이겠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이상향을 끊임없이 무모하게 제시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작업세계가 어떤 모양으로 펼쳐질지라도 바로 그 성격이 본인의 정체성을 대변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박지혜) 저는 행운이든 건강이든, 어떠한 성향까지도 한 번에 몰아 쓰거나 치우치게 되면 그 보상성으로 반대급부의 일들이 생기는 총량의 법칙을 믿는 편입니다. 생업과 작업 사이에서 지속 가능한 균형을 알고 싶습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고 싶거든요.


홍승혜) 하하. 오래 살고 싶다는 말씀이 작가님 작업 세계에 가득한 냉소를 다소 희석시키는 것 같아 즐거워졌습니다. 저 또한 말씀하신 총량의 법칙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계속 충전할 수 있는 로봇이 아닌 이상 인간의 에너지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작업이 생업이 될 수 있다면 최고의 경지겠으나 애석하게도 그런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죠. 주지하듯 예술은 보편적 가치와 거리가 있을 때 흥미롭고, 그래서 그 어떤 분야보다도 경제적으로 안정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요. 직업 미술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고요. 저 또한 일찌감치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교직에 몸담기 위해 노력했고, 오랜 세월 작업과 생업을 병행해온 셈입니다. 맞아요. 아프지 말아야 해요. 질병은 대개 총량의 법칙을 무시했을 때 생겨납니다. 예술에 목숨 걸면 다시는 예술 못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지속 불가능해지는 거죠. 생업이 필요불가결하다면, 그러한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제 경우, 주제 파악, 자기도취, 그리고 자족과 긍정 같은 생활 태도가 작업적 갈등을 해소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균형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박지혜) 작가로서 만렙[滿+level]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일까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어떤 자리나 성공의 금전적 조건 말고요.


홍승혜) 작가로서 만렙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일까? 작가님의 질문지에 이미 명확한 답이 존재하고 있네요. ‘마르지 않는 호기심’, ‘서 있는 위치의 책임감’, 그리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무엇’으로 충만한 지금, 여기가 작가로서의 최상의 레벨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런 것들이 계속 질문하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죠. 모든 것이 이루어져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어지면 삶은 허무해지고, 끝까지 차고 나면 기우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면 흉한 일이 생기는 거죠.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관현악곡 <볼레로>가 생각납니다. 3박자의 느린 춤곡인 <볼레로>는 처음에는 고요한 베이스드럼으로 시작하는데, 악기가 하나둘씩 보태지며 단조로울 만치 일정한 속도로 볼륨이 고조되다가 화려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돌연히 끝이 납니다. 이상적인 작가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조금씩 꾸준히 성장하다 만렙에 도달해 멋지게 막이 내리는.  



홍승혜는 198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도불, 1986년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86년부터 현재까지 20여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국내외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1997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유기적 기하학>을 시작으로 컴퓨터 픽셀의 구축을 기반으로 한 실재 공간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에 재직 중이다.




) 최병석 <헬멧> 2015 플라스틱 프로펠러, 나무 손잡이, 

볼트, 너트, 와셔, 플라스틱 헬멧, 가죽, 동파이프 58×23×22cm 

)최병석 <토끼를 배려 하는 토끼 덫> 2013 나무, 철사,  70×26×40cm 






Special feature 

최병석(choi, byeong-seok) + 한진수(han, jin-su)

 


최병석 [신진 작가]

 

나는 만드는 것이 좋아서 작가가 되었다작업을 할 때는 내가 어린 시절 꿈꾸던 ‘만능 만들기 박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게 된다항상 즐겁지만은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손으로 만들어 입체 형태로 보여줄 때 행복감을 느낀다처음 시작했던 작업은 덫을 소재로 한 조각 작업이었다덫이 단순한 사냥의 도구가 아닌당시 나의 모습과 아주 닮았다고 생각 하였다덫에 미끼를 올려두고 사냥감을 잡지 못하고 아주 오랜 시간 기다리는 것처럼 나도 작업을 하지만 누구에게 보여줄 기회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더욱 만들기에 몰두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전시 공모에 지원했었다당시에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냥꾼>이라는 제목의 작업들을 진행하였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냥꾼>은 운 좋게도 첫 개인전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 개인전 <숲속 생활 연구소>를 통해 본격적인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숲속 생활 연구소>는 취미인 캠핑에서 시작한 작업이다숲속에서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당시 캠핑을 하며 상상하던 것들을 구체화된 도구나 장비로 구현해보려 했던 작업이다. 1년의 전시 준비 기간 중 6개월을 캠핑하고, 6개월은 마음껏 만들기에 집중했었다그 도구들이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편리하기를 바라며 제작한 것이 아니라 나의 엉뚱했던 상상들이 온전히 관람객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진행했다전시 공간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지만숲속에 살고 있는 어느 괴짜 과학자와 그의 연구소를 떠올리며 작업했다.


첫 개인전 이후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게 되었고 스스로에게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작가로서 느낀 가장 큰 변화였다하지만 먹고 살길을 찾기 위해 작업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작업을 하고 싶었다그래서 남편이자 아빠이며 작가를 직업으로 하는 최병석으로서 3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을 구상하였다내가 좋아하는 만들기를 통해 작품을 만들어내고만들어낸 작품에서 파생된 굿즈가 있다면 그걸 팔아 일시적이지만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그래서 플라스틱 팔레트 위에 작은 1인용 가내수공업 공장을 만들었다전시기간 동안 <3인용 예술가>라는 작은 공장에서 아기 가죽 신발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였다물론 이런 작업들이 실제로 가계에 도움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두 번째 개인전 제목은 <더 큰 물과 배>이다내가 홀로 타고 있던 작은 배는 작은 강을 지나고 있었다결혼 후 여전히 나의 배는 작지만그 안에 아내와 아기가 위태위태하게 올라탔고 게다가 좁고 작은 강은 어느덧 파도가 치는 바다가 되어 있었다힘든 현실과 작업에 대한 강한 의지시간이 흐를수록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작업이 힘들어져 가는 상황과 내적 갈등을 전시의 주제로 가져 왔다나의 이야기를 입체 형태로 보여주는 것그토록 자신 있고 좋아하던 일이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공간에 대한 부담과 개인적인 일로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작업 시간은 그동안 작업 형태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인 작업 스타일로는 이번 전시를 진행해나가기 힘들었다만드는 기술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혼자 상상하며 만드는 것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잘 하는 것이었다그 손재주를 통해 작가가 되기까지의 교육과정을 무사히 밟아 왔고 지금까지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으나 앞으로 계속해서 이 ‘만드는 기술’만으로 작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 직면했다지금 나는 ‘크래프트 맨’ 혹은 ‘메이커’와 ‘작가’ 중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지금까지는 손재주와 기술에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얇은 살을 덧붙여 작업을 해왔지만 작가로서 경력이 쌓일수록 무엇인가 만들기 위해 그 이야기들을 핑계 삼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무너지는 것이 사실이다작업 속에 담긴 이야기나 개념 그리고 작가의 스킬과 테크닉개인전 데뷔 3년 차인 나는 어느 부분에 무게를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해준 ‘만들기의 기쁨’만으로 작업을 계속해도 괜찮은 걸까아니면 잠시 두 손을 쉬고 이야기를 탐색해야 하는 것일까?  

 


최병석은 현실의 상황 속에서 촉발되는 상상과 감정을 기초적인 재료와 철물을 활용한 도구나 장치로 구현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그는 ‘숲속 생활 연구소’ 시리즈(2014-2015)에서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온 자연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들을 선보였다상상으로 발명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던 작가는 가정을 꾸리면서 나타난 변화와 그와 동시에 맞닥뜨린 예술가로서의 고민들을 작품 〈3인용 예술가〉(2015), 개인전 <더 큰 물과 배>(2017)를 통해 담게 된다.

 



최병석 <타이머> 2015 나무깡통황동볼트너트

와셔플라스틱 병철 종스프링쥐덫 64×21×24cm


 

 

한진수 [선배 작가]


만드는 사람 혹은 작가 사이에는 어떤 경계가 있는 것일까최병석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해묵은 질문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이 질문에는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이 예술인가라는 당연하면서도 곤혹스러운 기억들이 따라붙는다어려움을 이야기하는 후배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영 시원치 않다. 별반 다르지 않다선배인지라 좀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 나 역시 예술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막막하다‘오리무중’이 이럴 듯싶다상하좌우가 구분되지 않는 평등한 현대미술에 있어 제 정의는 애초부터 유동적이다어쩌면 작가들만큼이나 많은 미술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정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그래서 정의로서의 미술을 대할 때면 마치 사람들이 꽉 찬 운동장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그도 그럴 것이다더군다나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미술은 사뭇 다른 것이다


야구 선수에게 야구의 의미가 일반적일 수 없는 것처럼 작가에게 미술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진실로 의미심장한 일이다그래서 생존 도구들을 엉뚱한 형태로 중무장시킨 그의 작업이 단지 희화적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남편이자 아빠 그리고 작가라는 그의 정체성이 만들어 낸 두 번째 개인전 <더 큰 물과 배>는 흥미진진한 혈투처럼 다가온다오랜 시간 최병석 작가의 작품을 지켜본 나는 알 수 있었다애지중지 마련한듯한 철 한 조각나무 한쪽에 서두른 기색이 어린다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웃는 것이 진짜 웃는 것은 아닌 모양새다그렇다고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다지치고 힘든 과정에서도 웃음을 보이려는 그의 작업에 미소가 저절로 인다.


내게도 불안감이 찾아낸 아이디어들이 있다학교를 졸업하고작가로 등단했을 무렵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적잖은 혼란을 겪었던 시기였다결승점이 없는 달리기를 하는 것 마냥 갈수록 지쳐 갔던 소심한 마음에 휘둘려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 작업들을 선호하던 때였다불안감에 보다 나은 작품과 훌륭한 작가가 되어야 했다. 20여 년 지난 지금돌이켜보면 같은 미소를 짓게 된다미술의 정의가 헛갈리는 상황에서 보다 나은 모든 것은 사상누각이었지만 그것을 깨닫는 것에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 미술을 행한다는 것이 작업에 꼭 유의미한 개념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현대미술이 기존의 의미를 지키거나 대변하고자 있는 것이 아닌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새로운 작업들은 대부분 어설픈 것이다몰랐던 일이 아니라면 새로울 수가 없었다그제야 모른다는 불안감은 흥미진진한 일이 되었고작업은 모자란 개념과 기술을 채우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충분해졌다무엇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는 결과물들을 통해 행위가 정의보다 선행되기 시작했으며 미술은 점점 단순한 것이 되었다작가인 내게 있어 미술은 곧 내일도 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과 관람객이 보다 오랜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일 뿐이다.


최병석 작가의 토로는 내게는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다만들기를 좋아했던 아이가 성장하면서 미술작가가 되어가는 바르고 정직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다그리고 모두가 그러하듯 그 이야기 속에는 개인의 삶과 직업적인 삶의 경계가 늘 긴장 속에 함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하지만 최병석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을 나서면서 그의 불안함과는 별개로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신의 현실을 직접 작품에 끌어들인 작품들에 선배로서한 때의 선생으로서 뿌듯하다무수한 의문 속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오늘도 최선을 행한 용기와 열정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동지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한진수는 지난 20년 동안 다다와 스팀펑크에 영향을 받은 키네틱미술을 진행해오고 있다그가 만들어낸 단순하면서도 자동화된 기계들은 무한히 반복된 움직임을 통해 불가피하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을 드러낸다만물이 유동적이며 아무것도 멈춰질 수가 없는 자연의 궁극적인 특성이 작품의 근간이다.



 

한진수 <Dragon flower> 2016 

모터대나무조화 127×137×35.5cm 

 




Special feature 

천미림(cheon, mee-rim) + 정현(jung, hyun)

 


천미림 [신진 기획자]


정현 선생님께


어떠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있음이 아니라 단지 드러남에 불과한 것도 같습니다. 예술의 그림자란 실존의 증명이 아니라 단지 한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 만들고자 애쓰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몇 년 전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술가로 불러주지 않는 삶, 애써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며 지냈습니다. 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피곤한 몸으로 작업실에 앉은 늦은 밤마다 작업에 대한 고민보다 생계를 더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때의 저에게는 작가라는 직업은 없고 작업을 한다는 행위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사회적 자아의 부재와 빈곤을 기본값으로 두고, 비생산의 미학을 마치 직업적 미덕으로 믿으며 스스로를 납득시키고자 했습니다. 한때 전부였던 세상을 놓을 때의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습니다. 


우습게도 위로보다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이후 미학연구에 관심을 둔 것은 초라한 저에게 답과 위로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예술의 무능력과 무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또 어떤 날은 내 청춘을 바친 대상의 완전함을 인정하고 과거의 삶에 의의를 부여하기 위해 성실하게 읽고 썼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닿은 비평과 전시기획 활동은 저에게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접근이었습니다. 문득 작업과 비평, 기획은 단지 그 방법론과 도구가 다를 뿐 모두 예술과 삶, 세계에 대한 자문자답을 위한 활동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의 구성에 있어 기획자로서의 저 또한 여전히 작가의 연장선에 함께 서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술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 보면 가끔 저 스스로가 꽤나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예술은 저를 열렬히 사랑해주지 않는 냉정한 애인 같습니다. 잔인한 이별 통보를 받고도 상대를 잊지 못하여 매일 밤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내는 마음입니다. 어느 날 문득, 차가운 저의 애인은 허상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상 속에서 만들어 낸 허구의 대상이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 프로젝트 기획 <우주는 대체로 텅 비어있다>는 예술의 실체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술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만약 있다면 왜 우리는 이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까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두 명의 작가와 함께 각자가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글과 이미지로서 주고받으며 서로의 조형언어로 소통하려 했습니다. 나름의 결론은 예술이란 서로의 작업세계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그 전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술의 실체란 사실상 예술가 각각의 개별세계의 집합 형상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치 수많은 행성이 부유하지만 서로 파악 가능하거나 닿을 수 없는, 사실은 텅 비어있는 무한한 우주 같다고 말입니다.


어떤 기획은 사사롭게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는 작업들에 관한 평단의 회의적 시선에 대하여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예술이 담아야 할 서사들의 조건과 형태에 대하여 고민했습니다. 만약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인간 일반의 범주 안에서 발화되고 공감될 수 있다면 이는 충분히 미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중 비극의 감정, 특히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경험과 감정이 조형의 프레임을 통해 타자에게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지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불명열>은 이때 기획되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꽤 많이 아프셨는데, 어머니의 신체에 존재하는 물리적 염증이 저에게는 감정 내 무형의 염증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술가들이 작업을 통해 삶의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에는 수많은 서사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 작업 안에서 실존적 염증을 의식하는 일, 그리고 인간 동류이기에 이러한 비극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한진수 <Queen of scarlet> 2013 

유리구, 공기펌프, 비눗물, 염료, 튜브 650×250×250cm





최근에는 기획을 통해 작가들과 함께 예술 내 새로운 움직임을 모색하고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스펙테이터> 시리즈는 두 그룹의 작가들이 각각 두 번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예술 공동체 내 관찰자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프로젝트입니다. 작업과정에서 작가들이 상호 관찰자가 되어 서로에게 개입하고 이때 발생하는 간섭을 의도적으로 작업에 부여하는 실험적 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암묵적으로 의식하던 다양한 관찰자들을 수면 위에 끌어올림으로써 작가들의 자기 작업에 대한 숙고와 더불어 각자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두는 소통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예술사회학의 관점을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통해 실천적으로 풀어보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저의 기획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을 작가들과 함께 찾아가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논문으로 생각하면 마치 공동연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기획과 기획자 역할의 범주에 대한 고민이 듭니다. 예술 활동이란 작가, 기획자, 평론가의 움직임이 실타래처럼 뒤엉켜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저의 기획들은 다양한 주체들과 함께 과정을 만들어 가는 데 집중하다 보니 서로 역할의 구획 또한 흐릿합니다. 꽉 맞물린 퍼즐 같은 활동 속에서 저의 기획과 기획자로서의 움직임의 가능 영역은 어디까지일지 알고 싶습니다. 제 기획의 실험적 성격 때문에 의도치 않게 작가들이 질문의 과정에 매몰되고 소비되어, 전시를 통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될까 경계하게 됩니다. 가령 전시를 예술의 플랫폼이라고 한다면 이 무대의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며 또 그 지점은 어디까지일지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기획에 있어 작가들의 작업과정을 온전히 드러낸다는 것이 작가 세계의 아우라를 무너뜨리고 저도 모르는 새에 자칫 그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열어두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작가 개인의 작업이 갖는 미적 영역의 권리는 온전히 작가에게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기획이 관람객이나 평단으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업을 오해하게 하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게 될까봐 우려됩니다. 전시가 담아내고 또 드러낼 수 있는, 혹은 드러냄을 경계해야 하는 작가 세계의 요소들이 있다면 무엇이며,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면서 이러한 긴장감을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내시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에게 예술이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고,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불가지의 영역입니다. 


눈을 뜨는 하루마다 주어진 삶을 내던질 만큼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싶게 의미 없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술계 내에 있기에 스스로 온전한 타자가 될 수 없으므로 예술은 평생 제게 낭만적이기만 한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도 듭니다. 그렇다면 저와는 또 다르게, 선생님의 삶에서 예술이란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계신지 또한 듣고 싶습니다. 세계를 알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그 중 경험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인식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경험언어 또한 저에게 무척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긴 글에 호흡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미림은 한양대학교 철학과에서 미학과 기술철학을 전공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대 시각예술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의식과 담론에 관심을 두고 작가들과의 상호소통 및 과정에 방점을 둔 프로젝트 전시들을 기획하고 있다. 현재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입주작가(기획,비평)이며 독립기획과 미술비평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불명열> 2016 갤러리175, 

서울 전시 전경 사진제공천미림


 


정현 [선배 기획자]


천미림 큐레이터에게


저는 「퍼블릭아트」 편집부로부터 특집 기획에 관한 소개와 더불어 한 신진 큐레이터가 제게 조언을 구한다는 얘길 듣고 잠깐 의아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일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참여를 수락한 건 사실 나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미림 씨가 보내준 글을 읽은 후 그 이유는 보다 명확해졌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걸어온 길, 그간의 행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미술을 전공했고 작가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철학을 공부한 후 전시기획자와 비평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마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작가를 관둔다고 했을 때 받았던 칭찬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는 본인만 알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너무도 열렬히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그것을 끝까지 이루려는 의지보다도 더 힘겨운 선택이지요. 그것은 닫혀있을 때만 소리가 나는 단어처럼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어떤 ‘결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당신의 전시 서문에서는 예술을 향한 무한의 애정과 그것을 알고 싶고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못합니다. 알다시피, 오늘날 미술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늘 변신하는, 아니 변신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어떤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제 미술은 정의내릴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렸죠. 마치 천미림 큐레이터의 첫 기획전 <우주는 대체로 텅 비어있다>(2015)에서 다뤘던 주제처럼 말입니다. 뭐든 첫 번째 시도는 관념적이고 웅장한 질문이 쏟아지기 마련이죠. 이 전시가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예술이 무엇인지를 파헤치려는 순수한 열정만큼이나 전시 서문에 빼곡히 적힌 문장들은 어떻게 전시가 구성되었는지를 소개하기보다는 예술의 실체가 시각적인 것이 아닌 그 너머의 것이 아닌지 되묻고 있습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비극의 탄생”이 예술의 탄생으로 이어지듯 예술의 실존이란 점점 더 시각적인 상태를 넘어선 삶의 양태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현실과 예술을 식별할 수 없을 때야말로 비로소 예술의 종말이라는 단토(Arthur Danto)의 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더 이상 예술이 실존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닐 겁니다. 


첫 기획은 이처럼 작가에서 큐레이터로, 생산자에서 제작자로 변신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입하여 과연 오늘날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미림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한국미술계에서는 십여 년 전부터 창작자로서의 큐레이터, 또는 큐레이터로서의 작가와 같은 주제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이 같은 현상도 희미해져 가는 즈음이긴 합니다만. 견고한 역할과 영역이 존재하던 시대에서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태가 된 근대 이후, 예술뿐만 아니라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고유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미술생산자 정체성의 고민은 이미 1960년대 이후 등장했다고 합니다. 『큐레이터의 역사』(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 지음) 중 발문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한 고고학적 단상」(저자: 다니엘 비언바움(Daniel Birnbaum))에는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의견이 담겨 있습니다. 


“문화적 재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모든 전통적인 박물관학적인 시도들에서 그가(헤럴드 제만(Harald Szeemann)) 벗어나 움직여 간 결과로서 큐레이터란 인물은 더 이상 관료와 문화를 파는 흥행사의 혼합으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큐레이터는 일종의 예술가로, 또는 미술 전시가 사회를 조직하는 대안적인 방식을 나타내는 힘을 지닌 정신적인 일이라는 제만의 순수한 신념에 대해 몇이 말했듯이, 메타-예술가, 유토피언 사상가, 혹은 샤먼으로 부상했습니다.”(358-359쪽) 이미 낡은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변신이 이뤄지듯 큐레이터의 변신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입니다. 




<불명열> 2016 갤러리175, 

서울 전시 전경 사진제공천미림




세상의 모든 존재는 소멸될 운명을 지니고 탄생합니다. 예술에 대한 기대와 바람의 내용이 바뀐 게 아니라 예술을 사유하는 방식에 전환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요. 두 번째 기획 전시 <불명열>(2016)은 현실에서 경험한 매우 구체적인 상실감에서 출발한 전시인 것 같습니다. ‘불명열’이란 단어가 지시하듯 이 전시는 의학적으로 알 수 없는 통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즉, 눈으로 볼 수 없는 감정에 관한 전시로 볼 수 있겠네요, 지난 전시에서와같이 당신은 기호학적 해석이나 사회적 기표들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대신 이미지 자체가 표출하는 시각적 표현의 불가독성에 더 큰 관심을 드러냅니다. 당신은 전에 비하여 큐레이터의 전형적 역할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만이 전시를 ‘공간의 시(詩)’로 여겼던 마음가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대신 차이는 분명합니다.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물질의 힘과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여전히 믿었다면, 당신은 예술을 아직까지 불확실하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보고 있으니까요. 전 지구적 거대 자본으로 형성된 미술시장의 블록화는 점점 더 예술에 대한 질문, 순수한 열정, 철학적 사유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움직임이 더욱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표면의 베일을 걷어보면 그 속에는 또 다른 정치의 장으로 배치된 세계가 펼쳐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원하는 건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술의 가능성을 믿고 싶은 건 아닐까요? 사적 삶의 경험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진단하려는 열정 자체가 생성되는 어려운 시기에 말입니다. 가장 최근 전시이자 연속적인 기획물로써 <스펙테이터:공정한 관찰자>(2017)는 다양한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 이 전시가 그간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던 미술과 시각성에 관한 천미림 개인의 비판적 태도를 하나의 실험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객관과 주관, 의식, 관념,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라 불리는 존재에 관한 상투적인 모습과 이상적인 모습을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회학적 실험도 공정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겠지요. 더불어 창작을 하나의 행동 양식으로 관찰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올해 ‘칸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황금종려상(Palme d'Or)’을 받은 스웨덴 영화 <스퀘어>(2017)가 현대미술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현대미술관의 남성 큐레이터인데 그는 영화 속에서 매우 곤혹스러운 사건과 계속 마주치는 인물입니다. 현대미술이란 모호한 대상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미술 세계의 위선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그것이 영화의 목적이나 주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 영화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현대미술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당혹감을 통해 오늘날 예술이 무엇인지를 되짚으려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스펙테이터>와 같은 실험 기반의 전시는 서로를 관찰하면서 발생하는 갈등, 부조리, 불안, 또는 욕망과 같은 조절하기 어려운 참여자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감각하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이 기획이 갖는 어려움과 한계를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은 강점이자 동시에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신은 기획자인가요, 아니면 지휘자나 감독의 역할인가요? 반대로 참여 작가는 본래의 자신인가요, 아니면 허구에 살고 있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일까요? 마지막으로 저는 한국미술계에 영향을 줄 만큼 회자되는 전시를 기획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단순한 개인적인 호기심을 탐구하는 과정이 전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공공미술에 대한 순진한 믿음 덕분에 전시를 기획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게 전시 기획이란 언어로 이뤄지는 비평의 한계에서 벗어나 작가, 장소, 공간과 시간, 현실과 부딪히는 경험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한계에서 출발하기에 어쩌면 글쓰기나 이론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죠. 어쩌면 조금은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경험들은 미술이 관념이나 이상을 표상하는 세계가 아닌 어떤 형태로든 현실과 연결된 또 다른 실재로서의 가능성과 의미들을 산출했습니다. 한편 천미림 큐레이터는 짧은 기간 동안 스스로 자신만의 좌표를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둑으로 비유하자면 포석을 두고 있는 거지요. 지금의 호흡을 잘 유지하길 바랍니다. 이름이 알려질수록 자신의 시간이 남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정교하게 들여다보기를 지속하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가장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의 활동 지켜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현은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예술가의 정체성과 작업의 상관성」이란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술비평가, 독립 전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문화연구를 접목한 미술비평을 통해 비평 활동을 배움의 방법으로 활용하며, 전시기획을 새로운 방식의 지식생산이자 주요한 연구 활동으로 여긴다. 주요 활동으로 저서 『글로벌 아트마켓 크리틱』(미메시스, 공저, 2016), 『레디메이드 리얼리티 : 박준범의 비디오 활용법』(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5)과 전시 <그 다음 몸_담론, 실천, 재현으로서의 예술>(소마미술관, 2016) 등이 있다.


 


루노 라고마르시노(Runo Lagomarsino)

 <Sea Grammar>(detail) 

2015 Slide projection loop, 80 perforated images

 in a slideprojection carousel with timer, 1 original image

 (Mediterranean Sea) Variable projection size  Runo Lagomarsino 

Photo by Andreas Meckand Terje Ostling Courtesy of the artist,

 Kukje Gallery, Seoul, and Nils Stærk, Copenhagen 

이미지제공국제갤러리

 




Special feature 

문선아(moon, sun-a) + 김현진(kim, hyun-jin)

 


문선아 + 김현진 [신진 기획자] [선배 기획자]

 

문선아전시를 만드는 실행에 있어서 그룹전과 개인전의 과정은 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작업의 맥락이 일부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과연 그룹전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오래 품고 있었고최근에는 오히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룹전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동시에작가의 맥락을 잘 보여 주는 좋은 개인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다양한 그룹전과 개인전을 진행하셨던 걸로 아는데특히 어떤 점들을 신경써 구현하셨는지 궁금합니다.(예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김현진작가의 작업 맥락을 존중하고 해치지 않으면서 그룹전을 통해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그러려면 작가의 작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되도록이면 당위성이 있도록 그 작가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러 작업 내용과 접근그 미술적 기반의 흐름을 살펴 작가에게서 근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더 확장될 수 있도록 전시를 써내려가야 하고 그것이 미술적으로도 윤리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큐레이터에게 전시는 작가의 작업을 재료로 쓰는 자기 작업이라서 종종 과한 욕망에 휩싸이게 될 때도 있습니다일차적으로 작가의 총체적인 작업 내용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하고 작가와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접근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공유하고 함께 하는 예술적 동료로 공감을 얻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호신뢰가 있고 새로운 접근을 작가 또한 흥미롭게 여기며전시의 비전이 남다르다면 또 어떤 색다른 혹은 주제 전시 내의 내러티브 위에 놓이는 접근방식을 도구적으로만 보지 않고 작가 또한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지요최근 리서치를 기반으로 탁월한 주제전을 기획하는 큐레이터들은 작가들에게 역으로 영감을 주는 경우도 있어이러한 기획방식을 꼭 부조리한 것으로만 폄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결국 문제는 그 기획 과정에서 큐레이터가 어떠한 윤리적 태도와 노력을 기울여왔는가에 달려있습니다결국 전시가 빈곤하다는 것은 작업에 대한 이해의 빈곤예술에 대한 이해와 윤리적 태도의 빈곤과 다름 아니기도 합니다.

 


문선아최근 베를린의 세계 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에서 열린 <2 or 3 Tigers>에 큐레이터로 참여하시는 등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영어 구사 능력을 제외하고 해외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큐레이터에게 어떤 특성들이 요구될까요혹은 어떤 단계를 거쳐 인터내셔널한 큐레이터로 활동하게 되셨는지 그 과정을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현진큐레이터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큐레이터로 되어가고 성장해가는 단계가 있는 것인데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구성하는 개인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물론 이것은 어떠한 공동체적인 확장을 가질 수 있는 세계관이어야 하겠지요그 세계관의 특수성이나 내용을 통해 한 지역에 머물러 있어도 사실 그 무엇보다 국제적일 수도 있고해외에 있어도 한낮 어떤 좁은 지방에 머물러 있는 자 일 수도 있습니다활동방식일에 대한 선택프로젝트이동해 머무르고 경험하는 현실과 지역 등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통해 선택하고 도전하거나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저는 유럽에서 여러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기도 했지만또 매우 배척이 내재한 환경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대 초 중반 말뫼 같은 작은 유럽의 도시가 한때 매우 국제적이었던 시기를 경험하면서 국제성을 큰 도시나 패권적인 국가 현장에 두지 않고 세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울을 아주 오래 떠나있지도 않았고서울과 한국동아시아라는 지점을 제외하고 저를 생각해 본 적도 별로 없습니다다만 내 발로 찾아가 끊임없이 직접 보는 경험스스로 확신이 설 때까지 관찰하고 생각하고 더 큰 흐름과 작은 흐름의 관계를 연결해 생각해 보려 했고국내는 물론 국외의 여러 동료들과 서로의 세계관에 입각해 대화를 지속하면서 각기 다른 지역과 위치에서 끊임없이 교류하고 자극을 주고받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그들은 때로는 유명한 이들이기도 하지만전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개인적으로는 사교에 재능이 별로 없고넓은 사교를 통한 인간관계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노력을 해야 해서 사실상 피곤하기 때문에자연적으로 나눌 내용이 없으면 관계가 잘 이어지지도 않습니다어떠한 세계관을 기반으로 내용과 논쟁을 공유할 수 있고 서로를 끊임없이 정체되지 않도록 고무하는 동료관계와 좁더라도 그러한 내용이 있는 현장을 개인적으로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그들과 함께 가급적 좋은 기회들을 공유하고 나누면서 서로 끊임없이 배움을 주고받으려고 할 뿐입니다.




니나 카넬(Nina Canell) <Shedding Sheaths (H)>(detail)

 2015 Fibre-optic cable sheaths, concrete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rko Art Center, Seoul  Nina Canell Photo by 

Robin Watkins Courtesy of the artist, Kukje Gallery, Seoul, 

and Galerie Barbara Wien, Berlin 이미지제공국제갤러리



 

문선아큐레이터들의 기반은 리서치라고 생각합니다또한 그 경우가 작가나 전시의 주제에 대한 리서치로 나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작가의 경우평소 어떤 식으로 리서치를 진행하시는지그 방식이 국내 작가와 해외 작가의 경우가 다른지 궁금합니다또한 주제에 대해 리서치를 하시는 경우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시는지 그 일반적인 과정이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마인드 매핑을 해서 단어에 대한 접근에서 시작한다든지구체적인 단계나 과정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가나 주제에 대한 리서치에 있어 특별히 이용하시는 채널이 있는지요?

 

김현진저는 이론을 전공했기도 했고학부 때부터 여러 스터디 모임이나 잡지 발간 활동글쓰기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찾아 공부하는 환경에 있었습니다저희 때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많은 한계가 있기도 했지만문화개방으로 역동적인 확장과 다양성이 아카데미 밖에 활발히 벌어지고 있어서 학교 밖에서 젊은 학자들을 통해 철학사회과학문화이론 등의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흡수하는 것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고현장 또한 역동적이어서 직접 보고 관찰하고 확인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개인적으로는 90년대 중반부터 영문 이론서들이나 여러 사회과학 책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습니다어떤 생각이 들거나 궁금할 때 바로 뒤적여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손닿는 곳에 책들이 있는 것을 선호하고그래서 지금도 여행을 갈 때 대부분 열어보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이론서들을 무겁게 싸 들고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리서치나 공부의 양이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충분치 않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작가 리서치는 꾸준히 해야 하는 영역인데 단순히 작품 영역만이 아니라 지역 맥락에서 그 작가의 작업에 대한 상관관계를 함께 이해하고자 하며그러려면 그 지역의 지정학적사회정치적 현장에 대한 포괄적인 시야도 필요해서 현장 리서치에서 작가의 작품만 살피지는 않습니다작품을 기본으로 살피게 되는 작가 리서치는 굉장히 많은 작가와 작품 속에서 가려내고 간파해야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을 길러두어야 합니다저는 제 스스로 확신을 갖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누가 추천을 한다고 단순히 받아들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또 어떤 지역 리서치를 했다고 해서 그 지역 작가를 바로 소개하거나 하는 일도 잘 하지 않습니다웬만하면 한 곳을 여러 번 방문해서 지역의 복잡한 맥락을 더 깊이 확인해보고자 하는 점이 있고작가와 작품에 대해서 좋은 직감이 있어도 성급히 접근하기보다는 그 작가의 총체적 작업 맥락을 살피고 작업 내 언어의 연속성이나 그 기반을 확인하여 확신이 들 때까지 개인적으로는 좀 여러 차례 살피는 단계를 거치는 편입니다


보통 제가 같이 일하는 해외 작가들은 보통 2-3년 이상을 관찰한 후 같이 프로젝트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이제 막 작가 활동을 시작했거나 활동이 정체되어 있어도 제가 보는 어떤 가능성이 있을 때는 그 지점에서 대화를 해서 작업을 더 발전시켜보기도 하고요. 리서치 과정에서도 역시 좋은 리서치 내용을 가진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생각이 막히거나 지역 방문 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할 때 실제적인 조언이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그러니 주변에 자신에게 시야가 넓을 뿐 아니라 그 심도도 깊고 역시 신뢰할 만한 내용을 가진 동료들이 있으면 좋겠지요또 그들과 상생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 자극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과서적으로 들리겠지만근본적으로는 누구든 세상을 감지하는 눈과 감각분석적인 사고와 시각동시대성과 역사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질문을 안고 있고또 읽고 쓰는 활동을 하고형태가 무엇이든 자기 작업을 심도 있게 지속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리서치는 자기활동과 작업의 기본적인 일부일 뿐입니다또 더불어 좀 더 예리한 통찰력과 반성적 사고 능력을 키우면 그것은 남다른 리서치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예술 활동과 관련된 모든 일에 좀 더 남다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해 줍니다.

 


문선아아르코 미술관의 디렉터를 역임하셨습니다큐레이터와 디렉터의 역할이 어떻게 다르고각각 어떤 점들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김현진기관이 디렉터를 영입할 때 우선은 기관이 어떠한 디렉터를 구상하는지기대하는 역할이 프로그램 디렉팅에 있는지보다 행정적 운영에 있는지 그러한 점을 우선 분명히 해야 합니다예를 들어 기획역량에 집중된 예술감독형일지기관 운영에 더 집중된 것일지 혹은 이 둘 다를 적절히 조합하되 그 비율을 어느 정도로 기대하는지 등등을 기관이 먼저 구체적으로 고민해서 그에 맡는 디렉터를 영입하고 디렉터가 자기 역량을 충분히 펼칠 수 있도록 구조를 적용하거나 만들어 나가도록혹은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조직적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영입된 디렉터는 이미 그러한 전제에서 기관을 성장시킬 내용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는 있으나 구조가 잘못되어있거나 기관 스스로 그런 역할에 대한 이해와 비전이 부재한 상태거나 디렉터가 그 역량을 펼칠 수 없는 구조를 쇄신하지 않는 경우 현재 국내 공공 기관들에게서 반복되는 많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며전문가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거나 서로 반목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입니다조직이 변화를 원치 않으면서 새로운 디렉터에게 역할을 기대하는 것만큼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기만적인 것도 없습니다.  

 


문선아는 독립 큐레이터로 철학과 미술 이론을 전공했다. 2013년부터 2년 간 월간 「퍼블릭아트」의 기자로 활동했고,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개관전 <플라스틱 신화들>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여했다현재 미디어와 세대 이론에 기반 해 미디어의 보편화가 사회의 구조와 관계시각예술에 미치는 영향관계를 살피는 <시대정신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다그 첫 번째 전시 <시대정신-사이키델릭블루>는 지난해 아마도예술공간에서 개최됐다런던의 테이트 인텐시브 프로그램 2017을 거쳤으며암스테르담의 드 아펠 큐레이토리얼 프로그램 2017-2018년 펠로우로 선정되어 참여 예정이다.



김현진은 전시기획, 미술 비평, 저작자 및 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르코미술관 관장/전시감독(2014년 1월-2015년 6월) 및 2008년 제 7회 광주비엔날레   <연례보고>의 공동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최근 프로젝트로는 <2 or 3 Tigers>(세계문화의 집, 베를린, 2017), 공연 <십 년 만 부탁합니다Ten Years>(문래예술공장, 남산 아트센터, 서울, 2016-2017), <Two Hours>(Tina Kim Gallery, New York, 2016), <니나카넬-Satin Ion>, <남화연-시간의 기술>(아르코미술관, 서울, 2015), <Tradition (Un)Realized>(아르코미술관, 서울, 2014) 등이 있다. 베를린 세계문화의 집 프로그램 자문위원(2014-2016)을 역임했으며, 현재 홍콩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자문위원이다.

 



<Gridded Currents>전 설치 전경 

이미지제공국제갤러리






Special feature 

이양헌(lee, yang-heon) + 문혜진(moon, hye-jin)

 

 

이양헌 [신진 비평가]


오 시간들이여시간은 없구나_<오 친구들이여친구는 없구나>전 리뷰


2009년 『옥토버(October)』 가을호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현대미술을 전공하는 구미지역의 다수의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에게 ‘동시대성’(The contemporary)에 관한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랜트 캐스터(Grant Kester), 권미원(Miwon Kwon),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 등이 참여한 이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상황을 예술실천과 이론이 봉착한 일종의 교착상태로 상정하고 있으며, ‘동시대미술’이 가지는 범주의 역설에 주목하였다. 동시대성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역사적 규정이나 개념적 정의, 비평적 기준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론화되지 않는 핵심적인 가치로서 오늘날 미술계 구석구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성’을, 나아가 동시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현재’(The present)라는 시간축으로 군집화 된,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지고 있거나 오늘날 제작된 모든 미술을 배제 없이 포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새롭고 최신의 것인 동시에 지금여기(Nowhere)와 시차 없이 조율된 시간성의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동시대성을 선취하려는 열망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깊어지는 열병, ‘최신’ 예술담론을 향한 이론가들의 강박, 무엇보다 가장 ‘동시대적인’ 것과 공명하려는 제도권의 욕망으로 두드러진다. 이제 막 문을 연 포스트-신생공간부터 가장 보수적인 국립기관까지 컨템포러리(Contemporary)한 자장 안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브랜드 헤리티지를 통해 주요 제도권의 위치를 선점한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호명한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6년 개관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는 김민애, 김윤하, 김희천, 박길종, 백경호, 윤향로라는 이미 ‘젊음’ 혹은 ‘신진’으로 상징화된 작가군을 불러 모아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다. 전시 서문에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작가들을 통해 각자의 현재와 대면시키고, 아직 실현되지 않는 ‘서로의 미래’로 투영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혹은 과거와 연접을 통해 미래를 산출해내는 동시대적 ‘지금’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취해야 할 동시대성은 어떤 시간인가? 


작가들을 매개해 동시대적인 것에 머물거나 이를 포착해내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분절된 기표, 파편화된 텍스트가 부유하는 김민애의 <파시드>에 가로막힌다. 불투명한 가벽으로 둘러싸인 미로는 동선을 제한하는 동시에 기입된 구문들을 독해하게 하면서 전시장과 작가 사이의 중첩된 과거사적 지층, 그 시간의 궤적으로 관람객들을 이끈다. 마치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김민애가 수집한 하이퍼텍스트는 오래된 지표로 쓰여 진 이정표라는 점에서 대상이 남긴 기억과 역사를 수집해 동시대를 전사해내는 크로노스적 시간관 혹은 기념비로서의 현재와 같다.


이러한 시간-감각은 김윤하와 박길종, 백경호의 작품에서도 각각 발견되는데,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상을 주관의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김윤하는 당구 큐대, 대걸레, 플라스틱 의자, 테니스공 등을 비정형의 모뉴먼트(monument)로 쌓아 올려, 전시장의 10년을 경유했던 작가들을 일별해냈다. 일종의 안티-오마주로서 이 트로피들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무화시키기도 하지만 각각의 사물들은 지난 10년을 현재화하는 성좌로 기능하면서 회고를 통해 동시대에 내려앉는다. 반면, 박길종은 공간의 흔적 혹은 물성의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거나 개척해 낸 재료들의 집합은 <내 친구의 친구들은 내 친구들이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르메스를 거쳐 간 작가들의 것이면서 길종상가와 박길종 자신의 것인 동시에 시대 안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료를 참조해 ‘현재’를 번안해 내는 제작자의 시도는 과거를 불러들여 현재를 대질하려는 전시의 기획과 정확하게 포개져 있다. 무엇보다 과거를 경유해 현재에 당도하려는 시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작업은 백경호가 제시하는 다섯 명의 인물(혹은 회화)들인데, 다층의 레이어와 혼성화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것이 회화의 역사를 경유했음에도 종국에 동시대적 풍경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기념비로서의 현재를 전면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선형적 시간 속에서 가산(加算)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편, 과거의 총체로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전시장에 놓인 또 다른 시간은 ‘현재주의(Presentism)’와 ‘비동시성(Asynchronism)’이라는 상이한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소녀 변신물 애니메이션에서 에너지가 방출하는 장면을 캡처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으로 재매개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인터넷 분기 이후 세계를 인지하는 새로운 시각장의 알고리즘 혹은 열화와 초평면에 의해 지지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 사이에서 독해될 수 있지만, 특정한 순간을 이미지로 결빙해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이 ‘유사회화’는 시간의 과잉적 낭비라는 차원에서 현재주의에 연동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부정과 과거와의 거리두기에 참여하는 현재주의는 지금의 순간을 사고의 지평이자 종착지로 간주하면서 동시대의 지루한 지속을 드러내는데, 데이터가 언제나 현시적으로 실행되는 것처럼 인터넷을 통해 에르메스의 지난 10년을 대면하는 윤향로의 경험도 그 자체로 현재적인 시간 안에서 순환한다. 


특정한 순간을 지속해 현재에 거주하는 윤향로와는 대조적으로 김희천은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동시대성에 접근하는 듯 보인다. 시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멈블>은 웹 2.0과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눈부시게 성장한 이후 도래한 동시대의 풍경 안에서 다중-시간과 유동하는 공간성에 대한 한편의 에세이필름으로 상영된다. 실재와 가상의 이중간섭이 일으킨 현기증은 VR을 착용한 맹인 안내견과 기이한 꿈을 말하는 작가의 어머니를 거쳐 공사 중인 가상의 에르메스에서 ‘개’를 찾아다니는 남성에게로 이어진다. 이미 사라진(혹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개를 부르는 이 남성은 증강현실 안에서 일종의 시간착오를 겪는 듯 보이는데, 마치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 빠르거나 늦게, ‘이미’ 그리고 ‘아직’으로만 동시대를 경험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로 동시대성을 설명하면서 그 핵심에 어떤 불일치와 단절, 시간적 파열을 상정한 것과 연결된다. 동시대를 바라보는 비동시적 관점은 1년과 7년 사이의 간극처럼 그 시차를 벌려 당대를 반시대적인 위치에서 고찰해낸다. 동시대성은 이렇게 균질한 선형시간이거나 정체된 현재로, 혹은 비동시적인 시간들로 우리 앞에 산재해 있다. 작가들이 발산하는 다종의 ‘지금-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의 겹침과 이접된(disjunct) 관계에서 현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진정한 동시대성이란 복수의 시간들임을 보여준다. 다시 전시의 제목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전해지는 인용구,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을 보자. 


그것은 우정의 이중성과 타자의 현존을 말하지만, 가장 현재적인 시간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그 불가능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친구들을 부르듯 오직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만 온전히 조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동시대 안에서 우리는 현재를 따라잡으려는 열망 대신 과거의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사건을 매듭짓고, 미래를 비평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동시대를 정의할 수 있을까? 햄릿의 한 구절을 빌려 그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이양헌은 미술사와 미술이론을 전공했고 동시대예술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특히, 비평적 수행과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 포스트시네마 담론을 연구하는 프로젝트 팀 MMM에 가담하고 있으며, ‘동시대성’을 주제로 논문을 진행 중이다. <비평실천>(2017) 등을 기획했다.

 



김민애 <파사드> 2017 PVC tent, steel frame,

 lightings, adhesive sheets Dimension variable

 

 


 

문혜진 [선배 비평가]


친구들과 시간들에 대한 또 다른 단상


‘미술 수업’이라는 주제의 청탁을 받았을 때 다소 난감했던 것은 작업과 다른 비평의 특수성 때문이다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비평에 대한 피드백은 글 자체에 대한 메타 비평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데이것이 자칫 위로부터 아래로의 지적처럼 보이기에 십상인 까닭이다그렇다고 하나 마나 한 일반론적 조언도 바람직하지 않았기에실질적이면서도 수용 가능한 형식이 무엇일지 고민했다최종적으로먼저 경험한 한 명의 관람객으로서 해당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나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양헌(이하 필자)의 글은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오 친구들이여친구는 없구나>에 대한 리뷰다통일성과 완결성이라는 점에서 글은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오 시간들이여시간은 없구나”라는 제목은 글 전체의 내용을 압축해야 하는 제목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필자가 분석의 잣대이자 글의 키워드로 삼은 것은 동시대성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유명한 『옥토버』지의 2009년 설문 조사를 필두로기획 의도와 작품 해석에 ‘지금 여기’라는 시간성을 적용시킨다필자는 오늘날 한국미술계가 동시대성을 젊고 새로운 최신의 작업/작가로 동일시하고이러한 개념이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전시기획에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다고 본다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우리가 선취해야 할 동시대성이 어떤 시간인지를 질문하며 각각의 작업을 시간성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여기서 도입-전개-결론으로 전개되는 글의 외적 형식은 무리 없이 매끄러운 편이며글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기교도 어느 이상 갖춰져 있다. (전시 제목을 패러디한 글의 제목이나 글 말미 햄릿(Hamlet)의 구절 등이 일례다.)


형식이 기본기를 갖추고 있으니 살펴봐야할 점은 내용이겠다이 지점에서 읽는 자로서 내게 든 가장 큰 의문은 글쓴이의 입장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다시 말해 이 글만으로는 글쓴이가 전시기획이나 개별 작업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가 모호하다필자는 해당 전시기획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인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인가동시대성이라는 키워드가 해당 전시기획의 평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가각각의 작업이 기획 의도에 얼마나 부합한다고 보는가작업의 개념과 형식적 구현이 잘 연결되는가이와 관련해 각 작업이 모두 흡족한 수준인가그렇다면 왜 그러하고그렇지 않다면 어떤 부분이 아쉬운가보다 성공적인 작업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작업은 무엇인가리뷰에 포함되어야 할 이 모든 문제들은 답해지지 않거나 모호한 채 넘어간다이 점이 글의 성격을 애매하게 만든다현재 상태에서 이 글은 전시 서문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필자의 비평적 관점이 드러나지 않은 채 작업을 (다른 관점에서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읽는 입장에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필자가 이 전시를 왜 리뷰 대상으로 선택했는가다한 달 동안 열리는 무수한 전시 중 글쓰기의 대상으로 선택할 때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보통 강한 인상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 특징도 매력도 없는 전시를 왜 굳이 힘들여 쓰겠나.) 물론 비평가로 활동하게 되면 현실적으로 리뷰 대상의 선택은 스스로가 아니라 매체인 경우가 다수기는 하다하지만 그 경우에도 (비평 외적인 다른 요인이 있지 않은 한좋지도 싫지도 않은 전시를 수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해당 전시가 어떤 부분에서 마음에 들었거나 반대로 동의하기 어려울 경우 보통 글을 쓴다바꿔 말하면 해당 전시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때(본인의 입장이 분명할 때리뷰를 쓰게 된다는 뜻이다그래야 왜 글을 쓰는지무엇을 말하고 싶은지가 분명해지고글의 관점도 명료해지며설득력도 올라간다읽는 자 또한 자연스럽게 글쓴이의 주장과 자신이 본 바를 비교하며 입장을 설정할 수 있다전시에 대한 기록해석평가라는 리뷰의 목적을 생각하면글쓴이의 관점은 다른 종류의 글쓰기에 비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입장이 모호해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이 전시에 대한 필자의 의견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는 없다.) 다만 노파심에 덧붙이자면예의를 차리느라 지나치게 자기 검열을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나이나 경력에 따른 수직적 위계가 강한 한국식 관례에서본인보다 연배가 높은 기획자/작가나 힘 있는 주요 기관의 전시에 대해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다현실적으로 이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우며 바람직하지도 않다하지만 글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좌우되면 곤란하다결국글 쓰는 자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자신이 발설한 말과 글이요그것의 내용 및 질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전시처럼 기획 의도가 애매한(혹은 너무 분명한전시를 리뷰할 경우명확한 입장을 세우지 않으면 안 그래도 모호한 개념이 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기관의 개관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의 취지와 선정된 젊은 작가들이 어떻게 일치하나에르메스의 과거를 반영한 신작이 자축을 넘어 지금여기의 한국미술의 현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가이런 질문들이 기획 의도와 관련해 던질 수 있는 물음들일 것이다“작가들을 매개해 동시대적인 것에 머물거나 이를 포착해내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자의 질문은 너무 일반적이라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용어 및 개념의 사용이다이론 전공자인 필자는 시간성이라는 개념과 관련해 여러 텍스트를 성실히 읽고 용어들을 차용했다그런데 설명이 부족하거나 적용이 명료하지 않아 독자가 해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이를테면과거 에르메스의 전시에서 추출한 문구들로 구성된 김민애의 작업을 “대상이 남긴 기억과 역사를 수집해 동시대를 전사해내는 크로노스적 시간관”이라고 설명한 부분이 그러하다여기서 크로노스가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지 알 수 없어 독해가 막힌다


(크로노스는 보통 주관적 시간인 카이로스와 대비해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을 뜻하는데그 의미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김윤하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쓴 “안티-오마주”라는 말 또한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과거 에르메스 전시작에서 형식적 특징을 직관적으로 추출해 재구성한 김윤하의 작업은 “기념비로서의 현재”라는 해석에 잘 부합하는 사례다하지만 이 작업을 친()-오마주가 아니라 반()-오마주라고 지칭하려면 납득이 되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선배의 작업을 작업 소재로 사용한 것 자체가 반-오마주와 개념적 동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설명 부족과 개념의 모호함은 글 전반에 적용되는 문제인데특히 백경호와 윤향로에 대한 부분은 개념과 실체 사이의 간극이 커서 설득력이 떨어진다회화사의 여러 양식과 재료표현을 뒤섞은 백경호의 작업이 기존의 선례(일례로 1980-90년대의 혼성모방 회화)와 차별되는 지점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 작업이 왜 동시대적인지를 납득하기 어렵다단순히 2017년에 제작했다고 동시대적이란 뜻은 아니지 않은가윤향로 작업에 대한 부분 역시 “에르메스의 지난 10년”과 어떻게 결부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소재가 애니메이션 이미지일 뿐 최종적으로 전통적인 캔버스-물감 형식을 따른 작업을 ‘유사회화’라고 부르는 것도 추가 설명이 없으면 혼선을 가져온다만약 반복적인 아날로그-디지털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유사회화가 아닌 다른 표현이 혼란을 덜어줄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앞서 말한 설명 부족이고다른 하나는 생각과 표현 사이의 간극이다두 가지 모두 줄이려면 모종의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전자의 경우는 읽는 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상황과 목적에 맞게 말하는 경험을 쌓아야 하고후자의 경우는 착상한 아이디어가 원안에 가깝게 언어화되도록 꾸준히 훈련을 해야 한다특히 미술비평의 경우 작가나 기획자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일이 많아서스스로 착안한 개념과 작업이 잘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아이디어와 그것의 언어화그렇게 언어화된 개념과 작업 사이의 거리를 계속 점검하면서 간격을 좁히도록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축적으로서의 현재’와 ‘비동시적인 파편적 현재’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출품작을 분류해보려고 한 글의 전체적 취지는 좋다고 본다주최 측의 설명과 다른 방식으로 출품작을 읽어보려 한 시도기 때문이다. (좀 더 명료한 비평적 입장과 더불어용어를 정확히 사용하고 설명이 적절히 추가되었다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훨씬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윤향로 작업이 어떻게 비동시적이고 그것이 김희천의 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세부 분석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그래야 읽는 이를 설득하고 의도한 바를 전할 수 있다이를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한정된 지면에서 모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모든 작가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키워드를 시간성으로 잡았으면 시간성과 관련된 부분만 선택하고 분석하면 된다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지나치게 일반적인 이야기는 지면 낭비니 제외해도 된다


동시대성과 관련된 글의 도입과 결론 문단은 어느 글에나 적용될 수 있는 무색무취의 내용이다. (이접된 과거와 미래를 통해 현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일반론은 소략하고 전시 내용과 직결된 구체적인 문제 제기로 바로 들어가는 편이 깔끔하다이를테면 도입부의 경우 동시대성의 개념 정의보다최근의 한국미술계가 젊은 작가들을 소비하는 방식이 과거와 어떻게 다르며 제도권인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이들을 소환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논하는 것이 글의 밀도를 높이는 길이다결론 역시 앞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게 짜임새 있다이 전시에서 동시대성이 의미가 있는지출품작을 이 개념과 결부시킬 수 있을지이 전시가 동시대 한국미술의 지형에 유의미한 것인지이런 질문에 대한 필자의 견해 말이다. 

 


문혜진은 비평가번역가미술사 연구자다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으며사진비평상으로 등단했다서울대건국대인하대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했고여러 매체에 미술비평을 기고하고 있다쓴 책으로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2015), 옮긴 책으로 『사진이론사진 해석을 둘러싼 논쟁과 실천의 역사』(공역, 2016), 『테마현대미술노트』(201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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