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현재 위치
  1. Artists
Issue 175, Apr 2021

곽 훈
Kwak Hoon

선회하는 힘, 역동의 생명력

북아메리카 북극해 연안 이누이트(Innuit)족 사이에선 ‘바다의 신’ 세드나(Sedna) 신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남자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세드나는 아버지 안구타(Anguta)가 키우던 개와 결혼하는데, 일련의 사건으로 남편은 아버지에게 살해돼 수장되고 자신 역시 바다에 버려진다. 살기 위해 애처롭게 뱃전을 붙잡은 세드나의 손가락은 하나씩 잘려 나가 고래, 바다표범 등이 되었고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바다의 지배자가 탄생했다는 이야기다. 고대 이누이트족에게 바다 속 동물은 단순히 사냥과 포획의 대상이 아닌, 자신들의 전신이자 영혼,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래를 잡는 행위는 신을 육지로 모셔오는 의식과 같았고 이는 영적(靈的) 트랜스 단계, 즉 신의 강령을 뜻하는 이누이트어 ‘할라잇(Halaayt)’으로 일컬어진다. 곽훈의 동명 시리즈는 30여 년 전 그가 알래스카 여행 중 만난 고래의 뼈와 ‘할라잇’ 어원에 기인한다. 신화와 전통, 역사는 그에게 생명이자 지구, 신체이자 정신이며 작품 창작 과정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 김미혜 기자 ● 이미지 작가, 피앤씨갤러리, 대구미술관 제공

'메이드 인 대구Ⅱ' 전시 전경 2020-2021 대구미술관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김미혜 기자

Tags

망망대해 한가운데 이누이트족과 거대한 고래의 힘을 담아낸 ‘할라잇’을 비롯, 현대 고고학자가 1,000년 전 무덤을 발굴하는 순간을 상상해 그린 ‘주문(Incantation)’, 원래의 글 일부나 전체를 지우고 다시 재활용하는 고대 이집트 경전을 소재로 한 ‘팔림세스트(Palimpsest)’, 동양 철학에서 생명의 시작을 뜻하는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표현한 ‘기(氣)’, 삶과 죽음을 통한 순환적 흐름의 이미지를 시각화한 ‘겁(Kalpa)’까지 곽훈의 수많은 작품 시리즈는 신화적, 주술적 이야기 혹은 개인적 기억과 심상을 바탕으로 한다. 한 편의 대하소설처럼 묵직하고 장엄한 그의 작품 세계는 특별한 의도나 의미를 찾으려 애쓰기보다 플롯을 따라 자연스레 모든 감각을 맡기고 흘려보낼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그가 지나온 삶의 궤적부터 살펴봐야 한다.


곽훈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일제강점기 시대 대구에서 태어났다. 해방의 기쁨과 자유를 채 누리기도 전 그의 10대 시절은 한국전쟁으로, 20대는 4·19혁명과 5·16군사 정변으로 얼룩졌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진학했지만 그림 그릴 여유가 없었던 탓에 졸업 후 그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는 대신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택한다. 하지만 이 역시 녹록지 않았다. 당시 정치 세태와 집안 사정이 얽혀 ‘동정 보고 대상자’로 분류돼 극심한 감시를 받았기 때문. 여기에 미술 교사라 위조지폐를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까지 더해져 6개월에 한 번씩 서대문 경찰서에서 학교로 찾아오곤 했다. 이런 그의 사정을 안타까워한 정희경 교장은 “외국에 갈 수 있으면 빨리 가라”고 조언했고, 1975년 곽훈은 결국 도미를 결정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퍼포먼스 1995





‘그림 그리는 일은 그만두겠다’고 다짐하며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으나, 첫 직장으로 뉴욕의 한 광고 회사 디자이너로 취직하면서 그는 다시 미술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후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곽훈은 모아둔 돈을 들고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대학원 로스앤젤레스(UCLA),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대학원 롱비치(UC Long Beach)에서 수학한 그는 재학 시절 조신 이안코(Josine Ianco) 로스앤젤레스 시립미술관(Los Angeles Municipal Art Gallery) 관장에게 발탁되어 에릭 시걸(Erich Segal), 래디 존 딜(Laddie John Dill)과 함께 <신진 ’81(Newcomers ’81)>전에 참여한다. 그가 미국 미술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작가로서 진정한 첫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이다.


이때 곽훈이 선보인 작품은 ‘주문’ 연작이다. 지극히 샤머니즘적인 그림은 6·25전쟁 당시 숨진 사람들의 시신이 거적이나 가마니로 둘러싸여 있던 것을 목격한 작가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현상과 개인적 경험 그리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덧입힌 작품으로 그는 미국 컬렉터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과감하고 거침없는 필치와 대조적으로 그림에 담긴 관념과 심상은 서정적이면서 은유적이고, 선, 형, 색채 등의 표현법은 추상표현주의적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이안코는 곽훈의 작품에 대해 “처음 흥미를 갖게 만들었고 또 지금도 갖고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것은 사색에 잠긴 고요함과 강한 에너지와 끊임없는 개혁을 모두 합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 시리즈 Ⅲ 1985 합판 라이스지에 혼합재료 55×28in





미국 생활 초기부터 그려왔던 ‘찻잔(Bowl)’ 연작 역시 한국전쟁의 기억을 바탕으로 ‘주문’ 시리즈와 그 내용적 결을 같이 한다. 군인들을 위해 학교를 내어주어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과 교실 밖에서 수업을 들으며 가교실을 지었다. 땅을 파던 중 묻혀있던 수많은 신라 시대 유물들이 발견됐고, 교사들은 정교하면서도 간결한 형태의 유산을 학생들에게 정물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 옛날 한국 도공들이 사용했던 공식적인 언어를 익히게 된 계기다. 혼란과 위험 속에서도 기어코 꽃을 피운 아름다움, 이 기억은 그의 뇌리에 깊이 남아 훗날 ‘찻잔’ 연작으로 새롭게 싹을 틔운다. 두 연작으로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받은 곽훈은 트랙션 갤러리(Traction Gallery), 아트 스페이스 갤러리(Art Space Gallery), 칼 본스타인 갤러리(Karl Bornstein Gallery) 등 미국 유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하고 응모한 공모전에 모두 당선되는 등 점차 작가로서의 입지와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1995년에는 김인겸, 전수천, 윤형근과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한국관 개관작가로 참여, 거대한 설치 퍼포먼스 작품을 내보이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 <겁/소리, 마르코폴로가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인가>는 50m 길이 소나무 바지랑대에 북 모양의 옹기가 일정한 높이로 걸려있고 불교의 핵심 주제 ‘깨달음과 수행’을 대표하는 비구니들의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소리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질로 형상화한 작품은 국제적으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그를 안정적인 성공 궤도에 올려놓는다.





‘주문’ 시리즈 ⅩⅡ 1980 종이에 혼합재료 23×17 1/2in





회화뿐 아니라 도자 역시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영역이다. 작가에 따르면 학생이었을 적 옛 가마터를 직접 찾아가 도자를 만들곤 했는데, 현재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 터에서도 커다란 가마를 발견할 수 있다. 진흙이 불을 거쳐 도자가 되는 과정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변화 그 자체였으며 흙, 물, 유약, 불, 금의 오행(五行)이 모두 담긴 결과물은 세상의 가장 완벽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은 작가가 예술가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시각에 의문을 던지고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한편 회색계통의 색조와 바위처럼 견고한 형상의 ‘겁’ 시리즈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와도 굳건한 힘과 의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표상한다. 자못 엄숙하고 철학적인 작품은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전에 활기찬 필치로 그렸던 것들과 달리 계획적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물감의 층을 의도적으로 비비고 긁어 쪼아내는 표현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할퀴고 문지른 흔적들이 고스란히 그림에 나타나고, 이에 대한 자각은 변형된 색채와 능란하게 변조된 텍스처를 타고 생동하는 에너지의 힘을 비로소 느끼게 한다. 





‘할라잇’ 시리즈 2019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388cm 이미지 제공: 대구미술관





‘나는 누구인가?’, ‘나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그림은 무엇인가?’ 미국에서는 한국 작가로, 한국에서는 미국 작가로 정의되며 끝없이 자신의 뿌리를 고민해야만 했던 곽훈. 그가 지나온 치열하고 지난한 억겁의 세월은 단순히 80년이라는 시간의 언어로만은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큐레이터,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교수를 역임한 수잔 라슨(Susan C. Larsen) 박사는 그를 “강한 정신력과 용기를 가지고 시공간을 섭렵해온 하나의 궤적”이라 설명했다. 라슨의 말처럼 단단하고 진한 힘과 생명력으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해온 곽훈의 세계는 세상의 모든 삶과 존재를 연결하며 오늘도 고귀하고 위대한 숨을 빚어내고 있다.  PA





곽훈





작가 곽훈은 1941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동양적 관조의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한국관 개관작가로 참여하며 그 우수성과 역량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미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호주, 이탈리아, 홍콩 등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개최하고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열린 그룹전에서 작품을 선보인 그는 현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