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라마(Carol Rama)의 그림에서 제목을 빌려온 <Luogo e Segni>전은 앞서 열거한 작가를 비롯 총 서른여섯 명의 도시, 사회, 정치, 역사적 설정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10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현대미술 반열에 오른, 예술 어법을 성립한 작가들로만 전시는 꾸려졌지만 주최 측은 그 중 열일곱 명의 작가가 푼타 델라 도가나, 더 정확하게는 피노 회장의 컬렉션에 처음 초대됐음을 유난히 강조한다. 아마 이 특별한 언급은 17명 작가들이 이 전시의 참여를 계기로 얼마나 역량이 강화될지 지켜보라는 의미의 일종의 기득권을 드러내는 것인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피노 컬렉션에 의해 작가적 명성이 수직 상승한 케이스가 하나 둘이 아니니까.
Sturtevant <Felix Gonzalez-Torres America America>
2004 Installation View <Luogo e Segni> at Punta
della Dogana, 2019 Pinault Collection ⓒ Palazzo Grassi
Potography Delfino Sisto Legnani e Marco Cappelletti
푼타 델라 도가나 그리고 팔라조 그라시(Palazzo Grassi)의 디렉터인 마틴 베노드(Martin Bethenod)와 독립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모나 메쿠어(Mouna Mekouar)가 공동 기획한 전시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Untitled(Blood)>로 시작된다. 사실 이 작품은 지금껏 푼타 델라 도가나의 <Mapping the studio: Artists from the collection of François Pinault>(2009-2011), <Slip of the Tongue>(2015-2016), <Dancing with Myself>(2018)와 팔라조 그라시의 <Where Are We Going? Works chosen from the collection of François Pinault>(2006) 등 여러 전시에 등장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감정을 단전시키고 전시의 몰입을 최고조로 이끄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이 빨간 구슬 설치작품은 이번에도 신의 한수로 등장했다. 1957년 쿠바에서 태어나 39세에 에이즈로 숨을 거둘 때까지 부조리와 불평등, 동성애 혐오, 질병 및 사망 같은 주제를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성한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은 극적으로 섬세하기 때문이다. 그의 각 작품은 대중과 공유하고 싶어 한 일종의 자전적 프로젝트였으며 시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풍부하게 감성을 자극한다. 천정에서 길게 내리 떨어지는 곤잘레스-토레스의 구슬발을 걷고 전시장에 입장하는 순간 로니 혼의 조각, 루이스 부르조아의 드로잉이 관람객을 맞는다.
Hicham Berrada <Mesk-Ellil> 2015-2019
Installation View <Luogo e Segni> at Punta della Dogana,
2019 Courtesy the artist and kamel mennour ⓒ Palazzo Grassi
Photography Delfino Sisto Legnani e Marco Cappelletti
공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각 기억에 단초를 제공하는 사인을 주요 키워드로 삼았다는 전시엔 참여 작가들의 메타포가 경쟁적으로 펼쳐진다. 일정한 움직임, 형이상학적 성격, 그리고 모든 의미를 포용하는 잠재력을 지닌 물을 주제로 한 로니 혼의 대표작 <Well and Truly>가 한쪽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푸른색, 푸른 녹색, 밝은 회색 그리고 뽀얀 흰색 등으로 완성된 10개의 유리블록은 방문객들로 하여금 마치 얼어붙은 것 같은 실린더를 들여다보며 유리의 반투명, 모호한 깊이, 자연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움직임을 관찰토록 유도한다. 그의 작품은 전시 공간을 만든 안도 타다오(Tadao Ando)의 작품과 조응하며 베니스의 하늘빛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주최 측이 로니 혼의 작품을 “이번 기획의 지리적, 상징적 심장”이라 표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Roni Horn <Well and Truly> 2009-2010
Installation View <Luogo e Segni> at Punta della Dogana,
2019 Pinault Collection ⓒ Palazzo Grassi
Photography Delfino Sisto Legnani e Marco Cappelletti
Philippe Parreno <Marilyn> 2012
Video projection 23 min Pinault Collection
ⓒ Palazzo Grassi Photo by Jung Iljoo
한편, 필립 파레노는 이 전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메커니즘에 직접 개입해 임시 또는 가변 길이의 에피소드가 발생하는 환경을 조성, 전시 자체를 예술적 대상으로 만들었다. 두툼한 커튼을 젖히고 들어선 공간에 총 23분짜리 파레노의 영화 <Marilyn>이 돈다. 과학 소설, 오컬트 과학, 철학과 우화에 대한 강렬한 언급과 함께 공간 안에는 정제된 사운드도 작동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에는 1950년대 미국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2006년에 제작된 조명 설치 시리즈 ‘Marquee’가 있는데, 간헐적인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이 엠블럼은 사건의 가능성, 예술 작품 그 자체를 소개하면서 관람객에게 또 다른 작품의 감상 기회도 제공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순히 파레노의 비디오를 보기 위한 곳으로 인식된 방은 비디오가 끝나자 반전을 선사한다.
앞이 보이지 않던 블랙 룸은 조명이 밝아질수록 하얀 샤로 만들어진 화이트 큐브로 변모하며 파레노가 초대한 에텔 아드난(Etel Adnan)의 회화에 오롯이 초점을 맞춘다. 상황이 이쯤되면 지금까지 본 파레노의 비디오가 주인공인지 아니면 베테랑 화가의 그림들이 정작 더 중요한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관람객이 겪는 이 혼돈과 사고의 얼개가 파레노의 작품 취지인 셈이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1925년 태어난 에텔 아드난은 글쓰기와 그림이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표현하는 모드라 여기고 쓰기와 드로잉을 섞는 작가. “쓰는 것은 그릴 것(To write is to draw)”이라고 말하는 그는 시인으로 칭송된다. 뉴욕에서 베이루트, 소살리토에서 파리까지 작가가 발견하고 가로챘던 도시와 풍경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긴 작업들은 파레노의 정제된 영상 작품과 기묘한 조화를 이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