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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3, Aug 2018

베를린, 그래피티의 도시

Germany

Graffiti in Berlin
A Fine Line between Art and Vandalism

지난 6월 독일 베를린시가 기증하여 청계천 변에 전시된 베를린 장벽에 한 예술가가 그래피티를 새로 그렸다. 현재 그는 베를린 장벽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형법상 공용물건손상의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태극마크와 건곤감리 인용해 평화와 자유를 표현하기 위해 그렸다’라고 밝힌 그의 진술은 거센 비난 여론을 조금도 잠재우지 못했다. 다수의 언론에선 무명의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서베를린 시기에 그려진 오리지널 그래피티를 훼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사에 인용된 한 미술관계자의 전언처럼, 그래피티는 종종 누가 그렸는지 여부에 따라 때로는 ‘작품이 그려졌다’라고 표현되기도 하고, ‘건물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 박은지 독일통신원 ● 사진 1UP, Mural Art Festival, URBAN NATION 제공

Photos by Martha Cooper, Smiley by 1UP C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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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지 독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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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을 방문한 이 중, 최장 길이로 장벽이 보존되어있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에서조차 서베를린 시기에 그려진 그 ‘오리지널 그래피티’를 찾을 수 없어 실망했던 경험이 있을지 모른다. 장벽의 양쪽 벽면 또한 근래에 그려진 그래피티로 가득 차 있어 안내판으로 겨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위치가 가늠될 뿐이다. 그래피티 도시로서 베를린의 명성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박제된 이미지가 아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새로이 그려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하는 그래피티에 의해 현재 진행 중이다. 정작 이런 도시에 살면서 그래피티에 관해 주의를 기울여본 일이라곤 말끔히 정리된 지 며칠 되지 않아 금세 얼룩덜룩해진 집 주변을 보고 불만을 토로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지 한 때의 에피소드로 금세 묻혀버릴 이 사건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냉전의 상징이자 분단국가의 지표로서 베를린을 동쪽과 서쪽을 등분하여 세워졌고, 1989년 붕괴되기 전까지 동전의 양면처럼 30여 년간 서로 다른 역사가 각인되었다. 사회주의 국가 체제 하에 놓여있던 동독의 장벽은 삼엄한 경비 하에 콘크리트 벽면이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서베를린을 향해 마주 선 벽은 60-70년대 혁명적 포스터와 구호가 도배된 공공 게시판으로, 80년대는 그래피티 일러스트레이션과 태깅(Tagging) 등이 얽히고설킨 캔버스 역할을 했다. 베를린의 그래피티신은 터키와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 남부 유럽에서 서독으로 이주한 젊은이들이 힙합의 한 요소로써 그래피티를 수용한 것이 발단이었다. . 





Christian Bohmer for URBAN NATION One Wall Community 

Walls Projects at Bulowstraße, Berlin, Germany Photo: Nika Kramer  




이후 암스테르담과 파리, 런던 등 유럽의 대도시는 물론이고 힙합과 그래피티 문화의 중심지였던 뉴욕의 아티스트들을 매혹시키는 제2의 그래피티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1986년 당시 28살의 젊은 작가였던 키스 해링(Keith Haring)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그래피티 제작 과정은 역사적인 순간으로 회자되기도 하는데 서베를린 인권단체의 비호를 받으며 그가 장벽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동안 동독 국경 수비대의 엄중한 경계태세가 취해졌고 벽의 반대편에선 수많은 서독 시민과 경찰관, 기자들, 그리고 미국의 육군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명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스스로 “지금까지 본 가장 큰 서커스”라고 회고했던 키스 해링은 노란색 바탕에 붉은색과 검은색을 사용하여 두 인물을 형상화한 드로잉을 통해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숨진 사람들을 추모하고 독일의 통일을 기원하고자 했다.1) 1989년 장벽이 무너진 이후, 베를린은 전 세계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을 더욱더 강력하게 끌어들이는 자석과도 같았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다니엘 토우(Daniel Thouw)는 이에 대해 “당시 서베를린에 비해 동베를린은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하고 불법거주지 또는 미개발지역이 다수 있었으며, 장벽이 붕괴된 이후 이 지역이 누구에게나 개방되면서 그래피티를 그릴 공간이 필요했던 아티스트들을 매료시켰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 1980년대 전례 없는 호황기를 맞은 그래피티는 뉴욕과 베를린 등 대도시의 빈민가에서만 목격된 것은 아니었다. 





One Truth in Heide Strasse 20, Berlin Art Bang e.V. Image by Thomas Schlorke Photography 

 4. Elle in Wiener Strasse 42, Berlin Art Bang e.V. Image by Thomas Schlorke Photography





지저분한 벽 낙서로 치부되던 그래피티가 행동주의 미술과 같이 전위주의적인 경향을 띤 새로운 미술 장르로 해석되면서 이를 주제로 한 기획전과 비엔날레, 아트 페어 등이 개최되었다. 1982년 카셀 ‘도쿠멘타(Documenta)’에 키스 해링과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가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Aperto 84>와 ‘쾰른 아트페어(ART COLOGNE)’의 특별전<Szene New York> 등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대거 소개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큰 관심과 환대를 받으며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 다수의 예술가는 여전히 초대받지 못한 도시의 불청객이었다. 


베를린시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공공기물 훼손과 사유재산 침해 등으로 형사처분을 받았다는 이전의 기록은 당시 빠르게 팽창했던 그래피티 문화가 양극단의 반응을 불러왔음을 짐작하게 한다.3) 그래피티가 예술작품인가 또는 범죄행위인가에 관한 갑론을박은 여전히 치열하다. 그래피티가 도시의 역동성을 진작시키고, 자본논리와 상업구조에 자유롭지 못한 도시를 보다 주체적이고 비판적 시각으로 재점유하는 방식이라는 점,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유폐를 드러내며 대중적인 담론을 이끌어낸다는 점 등은 그래피티의 순기능으로 꼽힌다. 반면 공공 벽면과 기물, 사유 재산을 파괴하는 사회범죄로 보는 관점에서 그래피티는 오로지 작가의 본능적인 욕구를 표출한 결과물이자 유희적인 측면에만 집중한 자기목적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Artworks by Young Jarus (right) and Bosoletti (left)

 for URBAN NATION, One Wall Project, Photo: Nika Kramer  

 




베를린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팀 1UP의 활동은 최근에 그래피티에 관한 문화적인 논쟁을 재점화시켰다. 범죄 스릴러물에 가까운 그들의 다큐멘터리 영상은 현재 유튜브(Youtube)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지만, 20-30대의 남성을 주축으로 활동한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안에 부쳐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공공장소와 지하철 차체, 건물 벽면과 지붕, 계단 등 스프레이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이 ‘1UP’을 그려 넣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태킹은 모두 불법이다. 이를 두고 제도권과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점철된 본래 ‘그래피티의 무법자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며 두둔하는 의견도 있지만, 의미전달과 대중적인 공감을 도외시한 태깅이나 바밍(Bombing)은 시대를 역행하는 불법 낙서일 뿐이라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베를린시는 도시를 깨끗하고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는 책임과 동시에 독일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관광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그래피티신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있다. 때문에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 이어가는 대신 그래피티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예컨대 작년에 개관한 어반 네이션 뮤지엄(Urban Nation Museum for Urban Contemporary Art)은 지역 커뮤니티와 협업을 바탕으로 하여 공공미술의 새로운 장르로서 그래피티와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를 선보이는 프로젝트들을 선보이고 있다. 





Sink and Nuno Viegas in Ostseestrasse 18, 

Berlin Art Bang e.V. Image by millionmotions.com  





미술관은 본관의 건물을 캔버스로 활용할 뿐 아니라 지역(Bülowstrasse)에 위치한 건물과 상점들, 주민센터의 파사드와 입구 등을 작가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지난 노인공동주택 프로젝트의 경우 고령의 노인으로 구성된 거주지를 재정비하는 차원에서 주민의 초상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과 위트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하여 상대적으로 침체되었던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난 5월에 개최된 ‘뮤랄 아트 페스티벌(Mural Art Festival)’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100여 명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를 베를린으로 초대하여 도시 전체에 산발적으로 위치한 20여 곳의 건물에 그래피티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한 이례적인 대규모 벽화축제였다. 


다니엘은 한국에서 일어난 ‘베를린 장벽 그래피티 사건’ 대해 “그래피티를 그린 장소 또는 건물이 사적 소유라면 사전 동의는 명백히 필요하지만, 해당 장소가 공공성을 띠거나 공공기물인 경우 그것을 예술로 봐야 할지 또는 반달리즘으로 정리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답했다. 지난 기사를 읽고 새삼 베를린의 그래피티 신을 되짚어 보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베를린 장벽의 그래피티는 반세기 동안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사회적, 문화적 요인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수 겹의 레이어로 구성된 것이다. 어떤 일말의 대중적 논쟁 없이 단순히 젊은 작가의 과도한 관심 끌기로 치부되고 문화재를 파괴한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받은 지난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진하게 아쉽다.   

 

[각주]

1)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1986 10 24일 자 

(https://www. nytimes.com/1986/10/24/arts/keith-haring-paints-mural-on-berlin-wall.html)

2) 독일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다니엘 토우(Daniel Thouw)와의 문답은 7 11일과 18일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3) 올리버 헹켈(Olivar Henkel) Spray City-Graffiti in Berlin Schwarzkopf. p. 28.

 


글쓴이 박은지는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취득 후, 국립현대미술관 인턴을 거쳐()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국제교류를 위한 전시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베를린 예술대학교(UDK) 미술교육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아티스트 북을 리서치하고 그것에 관한 이론 및 전시기획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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