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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2, Jul 2018

그래픽 디자인의 미술관 입성

Graphic Design Entered the Art Museum

2015년 8월부터 10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최된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그래픽 디자인 기획전 '交, 향'은 국가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개최된 최초의 그래픽 디자인 전시로 기억한다. 물론 한국에서 말이다. 지난해 초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디자이너 안상수와 그가 설립한 대안 디자인 학교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전시회 <날개.파티>전도 개최되었다. 또 일민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사립미술관에서 디자인 전시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2014년에 개관한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1년에 1회 이상 한글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기획하는데, 여기에 주로 참여하는 작가들은 디자이너다. 이런 사건을 두고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의 한 인사는 이제 그래픽 디자인도 예술로서 당당히 미술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 글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워크룸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2014 *(필자 주) 김영진이 디자인한 워크룸 문학총서
‘제안들’의 표지는 대단히 혁신적인 그래픽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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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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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런가? 예술가들도, 미술관의 큐레이터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말해 디자인을 예술로 인정한다면, 그 디자인의 모습은 실제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디자인과 같은 모습일까? 단지 평범한 디자인, 말하자면 일종의 ‘찌라시’라든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이나 잡지, 영화 포스터 같은 것과 미술관에 입성하는 ‘그래픽 아트’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예술로서의 디자인은 진짜 순수 예술과 차이가 전혀 없이 감상 되고 컬렉션되는 걸까?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둘은 서로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인가? ‘지위’라는 용어를 사용해 말했지만, 두 영역의 전문가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창조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 사이에 ‘지위’가 존재할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밀턴 글레이저의 작품이 모마에 컬렉션된 사건 


뉴욕 현대미술관(이하 모마, Museum of Modern Art)에서는 이미 1930년대부터 산업 디자인 부서가 설립되었고, 그때부터 각종 디자인을 컬렉션해왔다. 그중에는 미국의 팝아트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1967년 작 밥 딜런(Bob Dylan) 포스터도 있다. 이 작품은 물론 웬만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유명하다. 물론 유명하다고 더 예술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밥 딜런 포스터는 대량 인쇄되어 아마도 수천 장 또는 수만 장에 달할 것이다. 그중 지금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은 것들이 빈티지 포스터를 파는 온라인 공간에서 거래되고 있다. 예술품이 갖고 있는 희소성의 가치에 위배되지만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에 컬렉션되었다. 왜 컬렉션했을까? 수량과 관계없이 작품이 갖고 있는 예술적 가치 때문이다. 그 예술적 가치란 그래픽적인 기술 면에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존의 포스터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 참신한 표현방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포스터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미 검증된 표현 방식과 스타일에 영합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 예술적 의욕을 발휘한 것이다. 





밀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Bob Dylan's Greatest Hits album_poster insert> 

1967 designed by Milton Glaser for Columbia Records  





이 말에 의아해하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지 활동하는 영역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량 미디어일 뿐 디자이너도 예술가처럼 나름의 예술 의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하는 분야가 대량 미디어라는 점이 바로 문제다. 디자이너는 자기 의지대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누군가의 의뢰로 디자인은 시작된다. 밥 딜런 포스터는 CBS 레코드가 밀턴 글레이저에게 돈을 주고 의뢰한 것이다. 당시 밥 딜런은 오토바이 사고로 앓아 누웠고 사람들 사이에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밥 딜런의 히트 앨범을 준비 중이던 CBS는 밥 딜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이끌어내 달라고 밀턴 글레이저에게 요구했다. 


이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작 방향이다. 이 요구 조건을 따르지 않으면 포스터는 거부되고 다시 수정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디자이너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 그는 계약된 돈을 못 받게 될 것이고 배도 고파질 것이다. 그는 기분이 나쁘지만 단념하고 제작 방향을 수용할 것이다. 이렇게 작업하는 예술가는 아무도 없다. 이런 요구를 받게 되면 예술가는 분노가 폭발할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인 밀턴 글레이저는 그 뜻에 순순히 따랐다. 그 결과 밥 딜런 외모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풍성한 곱슬머리를 아주 채도가 높은 컬러의 아르누보식 곡선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안은 CBS의 대표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을 것이고 컨펌이 떨어져 수천 장, 수만 장으로 인쇄되어 오늘날 우리 눈앞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그래픽 디자인 기획전

 <, > 2015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전경





미술관 컬렉션의 기준은 자유가 아닌 개성 


이런 예술 작품, 그 제작 과정이 현대 예술가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이런 작품이 미술관의 높은 문턱을 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현대 미술관은 그 작품이 디자이너건 예술가이건 다른 이의 의뢰로 시작되었든 작가 스스로의 의지로 시작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그것이 시각 예술로서 정당한 가치를 가진다면 컬렉션하고 전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그 기준이란 당대의 평범한 표현방식을 넘어선 어떤 새로움과 개성을 보여주었느냐는 점일 것이다. 나는 특히 희소성과 표현의 자유(작가의 자발적 의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밥 딜런 포스터는 모마에 컬렉션되었으니 그런 인정을 받은 것이다. 좀 더 과거, 그러니까 현대 예술의 개념이 탄생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99% 이상이 커미션의 형태로 제작된 것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 2(Julius )의 의뢰로 시작되었다. 현대 예술이 탄생하기 전 가장 위대한 화가의 한 명으로, 또 거의 현대 아티스트의 개념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수많은 인물화 역시 당시 급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의 사람들로부터 의뢰받은 것이다. 자발적이냐 의뢰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개성이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분명한 표현 방식이 있는 디자이너의 대량 인쇄된 솔 바스(Saul Bass)1955년 작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 영화 포스터(이 포스터는 크리스티(Christies)에서 경매되어 팔렸다)는 당대 이류 예술가의 작품보다 훨씬 더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것은 분명 아니다. 나는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오해로부터 디자인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며 예술적 가치도 없는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음이 걱정이다. 미술관 역시도 디자인 전시가 흥행이 된다는 시류에 영합해 디자인 전시를 기획하는데 전시된 작품들이 매우 기형적인 것을 발견한다. 단지 직업이 디자이너인 사람들의 작품일 뿐 그가 만들어낸 것은 그저 예술의 흉내이기 때문에 기형적이라고 표현해보았다. , 이점에 대해서 좀 더 짚고 넘어가자. 





안상수 <홀려라>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2591mm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전경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는 현대 예술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엄연히 다르다


19세기 오늘날의 현대 예술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쿠르베(Gustave Courb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돈을 쉽게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대 예술가는 자기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작업하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키고자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표현방식을 할 수 없이 쓰거나 무엇인가를 이상화하는 것이다. 아카데미풍 예술이 그러했다. 따라서 그들은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에 새롭게 나타난 이런 예술가의 활동을 미술사학자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했다. “미술이 추구하는 참된 목적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그 밖의 다른 목적들이 모두 포기되었을 때에만 근거를 가질 수 있다.”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개성과 예술적 성취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돈과 명예까지도.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돈과 명예를 거부하거나 싫어한 건 결코 아니다. 


단지 타협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예술 의지를 꺾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타협해야 한다. 아니 타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디자인의 결과물은 타협의 산물이다. 디자이너라고 예술 의지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디자인을 할 때에는, 다시 말해 클라이언트가 있는 일을 할 때에는 그들의 말을 경청해서 가능한 한 요청 사항을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 과정에서 예술적 표현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과거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를 비롯해 루치안 베른하르트(Lucian Bernhard),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최근의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그러한 작업 환경에서도 개성과 혁신을 발휘하면서 시각 예술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왔다


2015년에 개최된 한·일 그래픽 디자인 전시회에 출품된 거의 대다수의 작품 역시도 그렇게 제작된 책 표지, 포스터, 올림픽 마스코트, 패키지들이다. 그것은 분명한 실용적 목적으로 누군가의 의뢰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래픽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사람들이 ‘그래픽 아트’ 또는 ‘커뮤니케이션 아트’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품들, 아니 작품으로 시작되지 않은 그냥 포스터, 앨범 커버, 책 표지 같은 것이지만, 그 예술성이 비범한 것에 붙이는 말이다. 만약 어떤 디자이너가 예술적 실험으로 포스터를 만들고 그것을 대량인쇄하지 않고 갤러리에서만 전시했다면, 그것은 그래픽 아트가 아니라 예술 작품이다.  





김현 <24회 서울올림픽대회 마스코트 ‘호돌이’> 1983

 




디자인은 디자인 자체의 문법으로 미술관에서 전시되어야 한다 


문제는 단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거나 또는 디자인을 업으로 삼았던 디자이너가 작업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작품 전시를 ‘디자인 전시’라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된다. 디자이너 또한 미술관에서 전시를 목표로 한다고 하면 그때부터 어쭙잖은 예술가 흉내를 내려고 하는데, 그래픽 아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그런 것을 무시한 채 관념적인 작품을 만든다면 그것을 굳이 왜 디자인 전시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들도 대량 인쇄된 디자인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특정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흉내내거나 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 현상의 하나로서 대중미술을 인용하거나 응용할 뿐이다. 팝아트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미술관에서 전시를 한다고 하면 예술가적 자세와 태도를 흉내 내려고 한다. 괜히 관념적이고 난해한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심지어는 큐레이터들조차 그것을 요구하는 듯하다. 디자이너를 옭아매는 여러 조건, 클라이언트, , 수정, 타협과 같은 조건 안에서 제작된 작품만이 그래픽 아트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미술관이 이 시대에 분명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반드시 영구 소장해야 할 ‘디자인’을 가려 뽑아내야 한다면,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가 자유롭게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대량생산되어 우리 눈에 밟혔던, 하지만 개성이 있고 표현력이 뛰어난 그런 실용적 디자인이어야 할 것이다.  

 


글쓴이 김신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했다. 1994년 디자인하우스 월간 『미술공예』 기자로 입사해 다음 해 자매지 『월간 디자인』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2011 2월까지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으로 모두 199회의 잡지 기획과 제작에 참여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있었으며 2014년부터 조직으로부터 독립해 프리랜스 칼럼니스트로 여러 신문과 잡지, 온라인 미디어에 디자인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과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앞으로도 꾸준히 저술 활동과 강의를 통해 디자인 이론의 대중화에 매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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