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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42, Jul 2018

예술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가

Can Art Predict the Future?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미래파(futurist)’를 기억해보자. 이들은 정적인 예술에 반대해 동적인 감각과 새로운 형식의 미래적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다. 과거 전통적인 미학을 벗어나 기계문명을 찬미하고,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이처럼 ‘새로움’은 늘 미래를 향한 열망과 호기심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훌륭한 예술가들은 모두 미래를 내다봤다. 현재 최첨단 기술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기술의 진보는 거듭되고 있다. 지금 발생하는 일,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초석이 된다면, 우리가 사는 지금을 눈여겨보는 일만으로도 미래를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특집에서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전망하는 미래와 더불어 현대미술의 미래성, 그리고 디자인, 건축처럼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의 미래를 ‘예술’의 맥락 안에서 살펴본다. 미래는 ‘과학 기술’이란 명분을 앞세워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앞에 도래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않고 던져야 할 질문은 미래에서 ‘예술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이다.
● 기획 편집부 ● 진행 정송 기자

'Visualization of space debris orbiting around the Earth' ⓒ European Space Agency (ESA)‘The 3rd Istanbul Design Biennial: Are We Huma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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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형 아트디렉터,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미학박사,전종현 아트·컬처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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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Ⅰ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 미래_이대형

 

SPECIAL FEATURE Ⅱ

현대미술의 미래: ‘생존 실존 공존’ 그리고 시간_이지훈

 

SPECIAL FEATURE Ⅲ

수확 가속 시대의 창작: 디자인과 예술이 미래에 마주할 몇 가지 증후들_전종현





<DRONE 100 - Spaxels over Linz> 2016 More than 

100.000 spectators saw <DRONE 100 - Spaxels over Linz> 

presented by Ars Electronica and Intel. The event was part 

of the 2016 Ars Electronica Festival Credit: Ars Electronica / 

Martin Hieslmair





Special feature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 미래

● 이대형 아트디렉터, 현대자동차 아트랩

 

 

인간과 로봇은 다르다. 그 차이점은 ‘감정’이라는 영역에서 비롯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정>생각>행동으로 이어지는 연산과정을 반복하며 생존해 왔다. 먼저 느껴야 생각의 방향을 구조화 할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서 행동해 왔다. 반면 그와 정반대로 로봇은 행동>생각>감정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먼저 주어진 프로그램 조건 아래 조립과 분류 작업 등의 기계적인 행동을 하다가, AI의 도움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단계로 진입했고, 이제는 어떻게 인간처럼 느끼고 윤리적인 판단을 할 것인가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감정’은 인간에게는 ‘생각’과 ‘행동’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지만, 로봇에게는 도달하고픈 미지의 목적지이다. 이처럼 출발지와 목적지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개체의 공생을 위해 어떤 장치가 필요할까? 지난 100, 인류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너무나 적게 느껴왔다. 그렇다 보니 미래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동력으로 이성, 논리, 테크놀로지를 쉽게 떠올리며, 더욱 빠른 속도의 발전을 위해 합리성, 효율성의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그 결과가 가져올 미래에 인간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최근 심화되고 있는 AI,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서 그려지고 있는 미래의 모습은 “축복”과 “공포”가 혼재된 불확실성의 풍경화에 가깝다그러나 역설적으로 AI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그 “공포”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예술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예술은 로봇이 따라 할 수 없는 영역, 로봇과 차별화된 인간의 속성, 사회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등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 이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자. 


예술은 어떻게 미래를 변화시키는가? 이를 답하기 위해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미래’로 연결되는 관계도를 그려보았다. 인간을 대변하는 예술과 미래를 앞당기는 테크놀로지가 접점을 가지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더욱 긍정적인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AI, 디지털, 로봇으로 대변되는 미래와 인간의 관계를 “공포”가 아닌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 이미 전 세계 주요국가, 학교, 기업, 단체들이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그 해결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종결합을 통해 예술이 해야 할 일이란 테크놀로지에 제동을 걸어주기도 하고,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며, 미래의 중심에 인간이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즉 ‘발전’이 아닌 ‘방향’ 제시가 예술의 핵심이다. 





<Train Hall> 2015 Photo showing an impression

 of Train Hall at Post City crdit: tom mesic Ars Electronica, 

2015  

 




2018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STARTS (Science Technology Arts)’의 심사를 위해 지난 4월 일주일간 오스트리아 린츠를 찾았다. 500여 개 팀의 제안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초연결사회의 역설적 외로움, 인간과 자연의 공생, 소수자를 위한 아이디어, 지속 가능한 에너지, 해양생태계, 플라스틱의 재앙 등 대부분 현대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장르와 테크놀로지를 동원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 하나같이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을 넘어 사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예술을 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장르를 초월한 다학제적인 접근과 혼자가 아닌 그룹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구축된 거대한 네트워크 초연결사회 속에서, 자연, 생명, 자아, 물리적인 신체의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길리아 토마셀로(Giulia Tomasello)의 작품 <미래의 꽃의 여신(Future Flora)>이 대표적인 예이다. 지금껏 동물, 식물, 더 크게는 자연과의 공생의 문제에 기반한 여러 작품이 있었지만, 바이오 테크놀로지를 공부한 토마셀로는 인류세(Anthropocene)의 범위를 확장해 사람들로부터 터부시되어 온 박테리아와의 공생 가능성을 제기한다. 박테리아를 인간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는 작가의 리서치는 지금껏 억압받아온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며 여성의 성, 위생, 금기를 둘러싼 선입견을 허문다. 어떠한 세균, 박테리아도 용납하지 않는 통제된 멸균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항생제 남용. 그것은 약물학적, 심리적, 정책적 차원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양산해 냈고 그 결과 우리는 사회 곳곳 다양한 층위에서 무너져 버린 균형을 목격한다. 그의 작품은 거대 자본의 통제와 의료/과학의 권위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여성의 몸에서 가장 은밀하고 연약한 부분과 박테리아의 상관관계를 “부끄럽다”는 금기어 대신 새로운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마이크로 생태계의 시작점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해로운 세균이란 선입견이 유익한 박테리아로 바뀌고, 인간과 미생물의 공생이 시작된다이처럼 예술은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관점, 테크놀로지와 연결되는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 그리고 그것의 해석 문제 등 다양한 각도의 질문과 접근법을 낳는다. 이같이 예술이 다양한 질문을 쏟아 내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성과 감성이 결합한 좌뇌와 우뇌의 인지 작용을 통해 내면의 문제와 외부세계의 문제를 비교하고 관찰한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통하기 위한 문자와 이미지를 생산하고,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논리를 구축한다. 이렇듯 인간이란 복잡한 사회적 동물의 감정, 생각, 행동을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묘사한 것이 예술이다. 그런 이유로 예술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능하게 한다. 두발자전거에 비유하자면, ‘예술’이란 앞바퀴가 방향키 역할을 해야지만 ‘테크놀로지’라는 뒷바퀴가 올바른/새로운/창의적인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신성환 <시시각각[時視刻刻]> 

2014 오브제, 빔머, 스피커, 모니터 가변설치 

<로우테크놀로지: 미래로 돌아가다>

(서울시립미술관 2014.12.9-2015.2.1) ⓒ 서울시립미술관





개념적으로 모든 정의는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과 같다. 동그라미의 안쪽이 그 정의에 해당하는 인식의 범위이고, 동그라미의 밖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영역, 혹은 아직 정의되지 않은 영역을 의미한다. 예술은 인식의 범위를 확장해주는, 즉 동그라미의 크기를 확장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공간적인 확장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확장(과거-미래)까지도 포함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센터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두리를 관찰하며 변두리 밖의 것들까지도 동그라미의 안쪽으로 끌어들이며 인식의 범위를 확장한다. 철학적으로 원 밖은 항상 원 안보다 크다. 예술가들이 기꺼이 변두리에 서서 세상을 관찰하는 이유다. 때로는 원 밖으로 점프해서 새로운 원을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작은 원이 더 커다란 중력을 가지고 오히려 기존의 큰 원을 끌어들이는 경우도 있다. 확장된 동그라미의 크기만큼, 연결된 동그라미의 숫자만큼 더욱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것이 예술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사람들과 소통하며, 무엇보다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고 진화하는 방식이다. 


현재 전 세계 2 8,500만 명의 사람들이 시각장애를 겪고 있고, 교육기회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정보 취약 계층으로 분류되며, 또 다른 사회 불균형을 낚을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크리스티나 츠베타노바&슬라비 슬라베브(Kristina Tsvetanova &Slavi Slavev) <BLITAB>은 혁신의 핵심이 기술 그 자체보다는 인간에 대해 배려하고, 소수자 그룹에 주목할 수 있는 예술적 상상력이 더 중요함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BLITAB>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태블릿으로 실시간으로 검색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손끝으로 읽을 수 있는 촉각정보로 변환시키는 화면을 가지고 있다. 더욱 촘촘한 픽셀과 밝기, 선명도를 가지고 경쟁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경쟁 속에서 <BLITAB>은 대안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오히려 눈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즉 시각장애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이 가져온 초연결사회를 논하고 있지만, 시각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디지털 테크놀로지로의 경험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상상력에 기생하며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예술(철학/미술/문학)에 의해서 증폭되고, 기호화되며 일종의 상징/메타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루시 맥레(Lucy McRae)의 작품 <고립연구소(The Institute of Isolation)>는 ‘고립’이라는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고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이다. 작품은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가상의 연구소를 설정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생물학적 인간의 적응, 진화 가능성을 연구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유전공학, 우주여행, 감각차단 등을 통해 인간이 테크놀로지와 만나면서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고립된 한 개인에게 부여하여 적응도를 관찰하며,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존 조건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먼 미래, 인류의 모습은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주장하듯 자연적인 진화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 거기에 맞게 진화할 수 있는 신인류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Installation view of <Open Codes> 2017 ZKM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 Karlsruhe 

 Felix Grünschloß

 




테크놀로지는 상상력에 기생하며 성장해 왔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예술(철학/미술/문학)에 의해서 증폭되고, 기호화되며 일종의 상징/메타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과거를 해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루시 맥레(Lucy McRae)의 작품 <고립연구소(The Institute of Isolation)>는 ‘고립’이라는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고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영상 작품이다. 작품은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가상의 연구소를 설정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생물학적 인간의 적응, 진화 가능성을 연구하는 전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유전공학, 우주여행, 감각차단 등을 통해 인간이 테크놀로지와 만나면서 겪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고립된 한 개인에게 부여하여 적응도를 관찰하며,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라는 행성의 생존 조건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게 만든다. 


어쩌면 먼 미래, 인류의 모습은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주장하듯 자연적인 진화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환경을 창조하고 거기에 맞게 진화할 수 있는 신인류에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디지털 시각화를 시도하고 있는 작품들의 맹점은 정보의 복잡성으로 인해 관람객들이 쉽게 피로를 느끼고, 사람들은 그것을 유의미한 정보로 읽어 내는 데 실패한다.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작품 <아카이브 드리밍(Archive Dreaming)> 역시 최근 많이 시도되고 있는 머신 러닝에 기반한 몰입형 데이터 시각화 설치작품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방대한 데이터를 건축구조물에 투사하고, 탁월한 사운드 효과와 결합해 마치 정보의 터널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몰입경험을 제공한다. 읽어내는 작품에서 온몸으로 체감하는 작품으로 발전시킨 테크놀로지는 분명 놀라운 수준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잘 묘사하는 화려한 기교 속에 숨겨진 상징 의미를 읽어 내기란 쉽지 않다. 테크놀로지가 예술을 더욱 필요로 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예술이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리티에 있다. 





OUCHHH X AUDIOFIL feat. MASOM <iOTA> 2017 

An LED installation inspired by light physics and research

 into the origins of geometry. Corresponding to the focus of the observer, 

the nature of light and its different phenomena can be seen beyond the

 perceptivity of the human mind, and attempts to translate them 

into a unified, non-spatial form Credit: Florian Voggeneder




예술이 표현하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는 실험실의 테크놀로지처럼 사람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동어 방법적 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관점에서 시대의 가치를 읽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예술이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분석해서 읽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역으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예술작품의 조건을 분석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과거에는 ‘아이디어 - 재료- 기법 - 작품’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쉬운 조건 분석이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이 점차 과정 중심, 관객참여 등 다양한 단계를 작품의 주요 요소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복잡해졌다. 주제가 아닌 관람객의 해석이, 재료가 아닌 재료가 가공되는 기법이 더 중요해졌다. 


이를 보기 좋게 도식화하면, ‘주제 - 재료 - 기법/테크놀로지 - 네러티브 1 단계 - 관람객과의 인터렉션 - 네러티브 2단계 - 사회적 영향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단계별 오리지널리티를 어떻게 부여할 것인지 고민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다양한 장르와 협업하고 새로운 기술적인 실험을 감행한다. 머신 러닝에 기반한 알고리즘을 제작하여 실시간으로 관람객들의 참여를 반영하게 하는 식으로 오리지널리티를 확보하려 하지만 최근에는 이 역시 올드 스쿨이 되었다. 기술은 오늘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내일이면 일상이 된다. 


반면 예술은 오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지만 내일이면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간 - 예술 - 테크놀로지 - 미래’라는 관계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간을 닮은 예술을 이해했을 때, 미래에도 유의미한 테크놀로지가 탄생할 수 있다끝으로 미래 세대에게 당부의 말을 남긴다. “미래를 대비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더 똑똑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더 따뜻한 사람이 되어 더 많이 느끼려고 노력하라. 그래야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낼 로봇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인간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느낄 것인지 그 방법을 모르겠는가? 당황하지 말라. 예술이 그 잃어버린 감각을 깨울 것이다.  


 

글쓴이 이대형은 21세기 예술이 어디에 거주할지 고민하고 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큐레이팅의 영역을 환경, 커뮤니티, 기술, 미래 등으로 확장시키는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카운터밸런스>를 통해 얻은 기부금을 모아 베니스 환경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으로 발전시켰다. 현대자동차 아트디렉터로서 국립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LACMA, 블룸버그, 아트유니온 등 미술관을 넘어 큐레이터, 작가,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의 프로모션 플랫폼을 기획·운영하고 있고, 최근에는 아트랩을 이끌며 제4차 산업혁명으로 변화될 미래 환경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다.  

 



 Installation view of 

<The Future is Here: A New Industrial Revolution> 

2013 Photo credit: Luke Hayes





Special feature Ⅱ

현대미술의 미래: ‘생존 실존 공존’ 그리고 시간

●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 철학·미학박사



1926년 독일 출신 문학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에세이에서 예술의 미래를 말했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소멸되는 반면 예술의 민주화 시대가 열릴 거라고 봤고, 그 예측의 대부분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2015년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는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에서 4차 산업혁명의 자동화 기술에 연관된 정치·경제·문화 변동을 이야기한다.  스티글레르는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현대 자동화 기술에도 양면성이 있다고 본다. 자동화 기술은 임금 고용에 기초한 ‘노동’을 소멸시키는 반면 인간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일’을 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또 창조적인 일은 예술 형태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100년 전 사진, 영화와 같은 자동 기술이 자연스럽게 예술의 민주화를 이끈 데 비해 현대 자동화 기술이 순기능을 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자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동화 기술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 관건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자동 완성,’ 쇼핑 사이트의 맞춤형 ‘추천 상품’ 기능을 예로 드는 것이 좋겠다. 비록 사용자의 과거 행위에 기초해 사용자의 선택을 돕지만, 사용자가 알아차리지 못한 가운데 선택을 끌어낸다. 스마트폰 문자 작성에서 ‘문구 추천’ 기능 또한 사용자의 미래적 선택을 예견하고 제안한다. 사용자의 기억과 선택, 과거와 미래, 즉 시간 의식 전체에 실시간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 실시간 개입은 혹시 사용자가 숙고할 시간을 빼앗고, 선택을 타성에 젖게 만들지는 않을까. 자동화 기술의 문제는 이처럼 인간이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내면화해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바꾸는 가능성을 크게 제한한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는 개인적 자의식이 공장 생산하듯 형성되는 상황을 낳거나, 개인을 타성(=자동성)에 빠뜨리고 정체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어떻게 하면 개인이 스스로 기억을 음미하고 미래의 행위를 결정하느냐, 어떻게 하면 해석과 종합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느냐가 자동화 시대의 문제로 대두되는 이유다. 이렇게 자동화 기술의 환경 속에서 저마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현대미술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거리예술가 레이저 3.14(Laser 3.14)의 그라피티 작품 <너의 유토피아, 나의 디스토피아(Your Utopia/ My Dystopia)>(2008)를 보자. 작품은 하나의 정해진 미래를 강요하는 사회 규범에 반대한다. 하나의 특권적 미래를 위해 개인의 현재를 이끌고 희생시키고, 개개인의 과거를 격하하는 역사철학과 이에 바탕을 둔 예술을 거부하는 것이다.





<Digital Archaeology> 2014 Installation view of

 <Digital Revolution> Barbican Centre 

ⓒ Matthew G Lloyd/ Getty Images #digitalrevolution  





멕시코시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벨기에 출신 예술가 프란시스 알리(Francis Alÿs)도 생각해보자. <때론 무엇을 만든다는 것이 무위로 돌아갈 수 있어(Some-times Making Something Leads to Nothing)> (1997)이 상징적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멕시코시티 거리에서 작가가 무려 아홉 시간에 걸쳐 커다란 얼음덩이가 작은 얼음덩이로 녹을 때까지 묵묵하게 밀고 나가는 과정을 그린 퍼포먼스 작품이다. 마치 고대 중국 사상가인 노자(老子)의 유위(有爲, 함)와 무위(無爲, 함이 없음)의 변증법을 표현하는 것 같다. 이런 작품들은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처럼 하나의 미래에 특권을 주지 않는다. 사실 20세기 초 ‘미래파’를 포함해 하나의 미래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단선적, 발전적 역사·예술철학은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패러다임의 후예로 산업화 또는 생존(subsistence)의 시간성을 내건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런 작품들은 하나의 미래를 비롯해 모더니즘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인 결정적 순간, 또는 생산적 순간에 특권을 주지도 않는다. 


결정적 순간은 그 완전한 순간으로 나아가는 과거·현재의 과정을 희생하고 삭제한다는 점에서 특권적 미래와 동급이다. 그 결과로 결정적 순간이나 특권적 미래는 영원·보편·초월을 표현하지만, 시간의 과정이나 지속을 담지 않는다. 시간성의 외피를 썼지만 실제로는 시간성을 띠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앞에서 예로 든 작품들은 마치 ‘현재를 되살리자!’고 외치는 것 같으며, 시간 지속 자체의 경험, 즉 다양한 시간, 지속하는, 덧없는, 반복하는, 무작위의, 실시간의 시간을 예술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 예술을 ‘실존(existence)의 시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Ebola> Photo by: Sahir Ugur Eren 

‘The 3rd Istanbul Design Biennial: Are We Human’ 2016




실존의 시간 예술


현대미술의 미래는 ‘생존의 시간’보다 ‘실존의 시간’ 예술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실존의 시간 예술은 비생산적 시간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성, 타자, 소수자의 일상적 과정과 현재적 시간을 그리는 실존의 시간 예술은 점점 더 가치를 확산하고 있다. 행위예술, 뉴미디어아트 뿐만 아니라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 영역 전반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기승전결’ 서사구조를 따르지 않고, 목적론 없는 시간성 자체를 예술작품 속에 담는다. 시간성 자체를 표현하는 작가로는 빌 비올라(Bill Viola)가 대표적일 것이다. <트리스탄의 승천(Tristan’s Ascension)>(2005)은 기승전결 구조를 역전시킨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타티아나 트루베(Tatiana Trouvé)의 설치작품 <암묵적 활동의 사무실(Bureau d’activités implicites)>(1997-2007)은 훨씬 일상적이고 자전적이다. 무명작가인 자신이 작성한 이력서, 자기소개서, 프로젝트 기획서, 교부금 신청서, 취업 지원 서류 등을 10년에 걸쳐 건축적 모듈로 분류하고 행정 공간 형태로 설치, 확장해나갔다. 매우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시간을 표현하지만, 보편적 공감을 촉발한다. 비디오작가 이광기의 <뉴-리메이크>(2013)는 루이비통 가방을 가위로 잘게 잘라내고 접착제로 다시 붙이는 과정을 담았고, <세상은 생각보다 어이없이 돌아간다>(2011)는 생선으로 회를 완성한 다음, 회 접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과정을 담았다. 


완결된 ‘결정적 순간’을 해체하고, 시간을 재구성하는 모습을 그린다. 또 <세상의 빈틈>(2013)은 천천히 양치질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으로 비생산적 시간의 지속 자체를 체감하게 해준다. 이들은 ‘앞으로 전진’을 유예(suspension)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표현하는 공간적 장치로 탈-원근법적인 수평 구도가 자주 활용되며, 시간적 장치로는 정지 화면, 시간 재배치, 비(非)인과적 서사들의 동시적 전개, 과거·현재·미래의 동등화 또는 동시·현재화를 들 수 있다. 전준호·문경원의 <세상의 저편>(2012)이 세상 종말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병치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비디오작가 조승호의 <이동하는 수평선>(2009)은 그야말로 수평선의 지속적 이동을 통한 탈-원근법,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반복 속에서 유예의 시간을 그린다.






인세인박 <이데올로기는 가고 이미지만 남았다> 

2015 혼합매체, 싱글 채널 비디오, 

사운드, 가변크기 <슈퍼전파-미디어바이러스>

(백남준아트센터 2015.7.16.-2015.10.4)  





네덜란드 출신의 비디오 작가 반 데르 베르베(Guido van der Werve)의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Nummer acht,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2007)는 핀란드 극지방에서 제작한 것으로 쇄빙선 코앞에 선 작가가 쇄빙선의 전진과 함께 걸어오는 과정을 원거리,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카메라가 작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작가와 같은 속도로 후진하며 촬영한 결과로 작가와 쇄빙선이 전진해오는 감각이 끝없는 얼음의 수평선 속에서 상쇄되며, 오직 얼음이 갈라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덧없는 운동의 지속만이 체험된다. 실존적 시간성을 집어삼키는 현대사회 시스템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시간 개념을 보면, 더는 단일한 미래나 특권적 순간으로 몰아세우는 ‘보편적 시간’ 흐름은 없다. 각자 소속된 집단이나 개인에 따라 다르게 경험된다는 것, 또 비생산성과 소멸의 경험을 담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유토피아적 목적의식이나 미래의 비전보다는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주목한 『햄릿』의 대사처럼 ‘시간의 탈구(Time is out of joint)’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미술의 미래가 이처럼 생존보다는 실존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가운데 우리는 현대미술의 또 다른 시간성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공존(consistency)의 시간이며, 그 형식은 인터렉티브(interactive)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터렉티브 예술은 관객 참여로 작품이 이뤄지는 예술을 말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술에서는 상호성의 주체가 단지 인간으로 한정되진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공존 개념을 재규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제프리 쇼(Jeffrey Shaw)

 <읽을 수 있는 도시(The Legible City)> 

1989-1991 version 2013 Computer graphic installation 

Collection of ZKM |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 

Photo: courtesy of the artist 어두운 공간에 고정되어 있는 

자전거 설치 작품 <읽을 수 있는 도시>에서 관객은 맨해튼, 암스테르담, 

카를스루에 거리를 달린다. 각기 다른 도시의 3차원 거리 전경이 보이는 

스크린 앞에 놓인 자전거를 타는 참여자가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도시의 전경은 길의 방향을 따라 컴퓨터로 생성된 3차원의 ‘문자’ 빌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문자들은 그 장소만의 문학적,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글: 키아라 마치니)  





공존의 시간 예술, 인터렉티브


미래 사회에서 공존은 개체가 전체 속에서 조화롭게 사는 것도 아니고, 개체와 개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도 아니다. 전자는 전통사회나 전체주의 사회이고, 후자는 단순한 병렬관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공존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이 말한 통개인화(transindividuation) 관계에 가까울 듯하다. 통개인화는 개체가 바뀌며 전체를 바꾸고,    또 전체가 바뀌며 개체를 재규정하는 양방향 작용이 있을 때 이뤄진다. 그것은 이미 개체화된 ‘나’와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우리’ 자체가 서로를 가로지르고 넘어서고 변화시키며 또 다른 방식으로 개체화하는 과정이다. 시몽동이 상호관계를 뜻하는 ‘인터inter-’ 대신 ‘넘어서기(초월)’ ‘가로지르기’를 뜻하는 ‘트랜스trans-’를 사용한 이유다. ‘인터’가 기존의 구조 속에 확립된 개체들의 관계를 말하는 반면 ‘트랜스’의 개체들은 현재 환경에 잠복한 또 다른 잠재성을 바탕으로 삼아 색다른 개체로 거듭나며 새 관계를 형성한다.


이 관점에서 앞으로의 인터렉티브 예술은 단순히 관람자와 작품의 상호작용에 머물기보다는 두 존재가 만나는 장 속에서 각자가 새 개체로 거듭나며 새 관계를 형성하는 예술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인터렉티브 예술에서 두 존재의 성격은 대체로 디지털 정보를 감각 대상으로 바꾸는 방식 속에서 규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과 기계장치의 관계로 한정될 이유는 없다. 건축 집단 에르에지(R&Sie(n))는 건축기계와 환경 데이터의 인터렉티브 건축을 선보였다. 비아브(Viab)란 기계가 환경 데이터를 분석하며 건축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기계가 하나의 주체로 등장한다. <난 들었다(I’ve heard about)>(2005)가 시초다. 프랑스의 식물학자 파트리크 블랑(Patrick Blanc)은 수직정원(vertical garden) 작업을 한다. 이것은 조경 디자인을 넘어 식물 하나하나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 연출을 통해, 이질적인 식물들이 아름답게 살아가는 공존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이 경우는 식물이 상호성의 주체로 등장한다. 파리 케브랑리 박물관(Musée du Quai Branly, 2012) 작업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앞으로의 인터렉티브 예술이 ‘기계 자연 사람’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되리란 점을 예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인공지능과 함께 감각과 지능 개념의 확장을 요청한다. 감각과 지능을 ‘관계와 상황에서 전개되는 역동적 능력’으로 본다면, 꼭 인간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고, 뇌의 한 부분에 국지적으로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감각과 지능은 뇌를 포함한 몸과 환경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자연 전체 관계에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인터렉티브 예술은 훨씬 더 풍성한 통개인화 관계에서 공존의 시간 예술이 될 것으로 보인다.





Installation view of <Open Codes> 2017 ZKM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 Karlsruhe

 Photo credit: Dennis Dorwarth





확장된 시간 예술 


미술의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순수한 사실이나 예측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포함되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미술은 단지 한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그 트렌드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가치 평가를 포함하니까 말이다. 앞에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자동화 기술이 순기능을 하려면 각자의 자각적 노력이 필요하고, 자동화 기술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 관건이라는 생각을 말했다. 이 관점에서 앞으로의 예술은 생존보다 실존과 공존의 시간 예술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동화 기술이 제시하는 하나의 정해진 미래보다 ‘생성하는 현재’를 통해, 즉 현재 지속성의 체험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희망을 여는 시간의 예술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예술은 ‘완결된 오브제’보다는 사건과 (지속)과정을 담아내는 퍼포먼스와 뉴미디어 예술의 발전을 더욱 요청할 것 같다. 이와 더불어 공존의 시간 예술 형식인 인터렉티브도 자연과 우주로 개념 확장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사람과 기계와 자연이 함께하는 예술이 태어나는 것이다. 시몽동의 말처럼 인간은 기계보다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 인간은 기계들의 경쟁자가 아니라 기계들의 관계를 조정·조직하고 기계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발명가가 될 수 있다. 다만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처럼 기계와 상호 협력적으로 공생하려면, 자동화 기술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우리 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의 예술은 이 내면화의 바탕에서 꽃필 것 같다. 이처럼 실존과 공존의 시간 예술이 확장되고 깊어질 때 우리는 좀 더 풍요로운 미적 세계를 누릴 것으로 믿는다.  



글쓴이 이지훈은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아트뮤 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 철학과 예술을 융합하는 예술비평·기획을 하며, 영화의전당에서 영화인문학 프로그램 <이지훈의 시네필로(CinePhilo)>를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존재의 미학』, 『예술과 연금술』 등이 있고, 『철학, 예술을 읽다』,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을 비롯해 10여권의 공저가 있다.





루 양(Lu Yang) <Delusional Mandala> 2015 Video Still

 ‘The 3rd Istanbul Design Biennial: Are We Human’ 

2016  






Special feature Ⅲ

수확 가속 시대의 창작: 

디자인과 예술이 미래에 마주할 몇 가지 증후들

● 전종현 아트·컬처 저널리스트



‘수확 가속의 법칙(The Law of Accelerating Returns)’이란 말이 있다. 구글에서 인공지능(AI) 개발에 여생을 쏟아붓고 있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주창한 것으로 시간이 갈수록 가속화되는 기술 발전이 선형에서 기하급수적인 양상을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수확 가속 법칙에 따르면 기술, 특히 인공 지능의 지적 능력이 인간 지능의 총합을 뛰어넘는 시점이 도래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시점이 오는데 이를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한다. 특이점이 과연 도래할는지, 대체 언제 가능한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보급은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 디자인과 건축, 그리고 예술에 어떤 파급을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현재와 근미래에서 창작자가 직면할 사회적 역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술의 발전은 창작 도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현재 대중에게 잘 알려진 표면적 예로 3D 프린팅이 있다. 인조물의 발생 양식이 지금껏 외부에서 내부로 수렴하는 관점을 보인 반면, 안에서 밖으로 적층하며 물리적 형태를 만드는 3D 프린팅 기술은 모자, 옷, 액세서리 등 소품부터 의자 같은 작은 형태의 창작물을 넘어 휴먼 스케일을 벗어난 건축—장소의 제약을 넘은 경제적 효율과 다양성을 확보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 실험—에까지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유기적 요소를 재료 삼아 만드는 음식과 인공 장기 등은 관심 있는 독자가 개인적으로 찾아보길 권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내적 변화는 바로 알고리즘의 활용이다. 컴퓨터 연산의 비약적인 발달과 기술 공학의 진보로 인해 데이터 변수를 입력하고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원하는 형상을 즉각적으로 눈앞에 구현하게 되면서 가상의 시행착오를 통해 물리적 공간에 구현된 작업과 초기 아이디어 사이의 간격은 극적으로 좁혀지고 있다. 건축에서는 도시 단위로까지 폭넓게 쓰이는 ‘빌딩 정보 모델링(BIM)’을 비롯해 ‘파라메트릭 디자인(parametric design)’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 비정형 건축으로 인식되는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원형의 아이디어—단순하게 심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초기 스케치가 아니라, 건물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고유의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한 것—을 상정한 후 건물과 관련된 수많은 데이터를 변수화하여 알고리즘과 유기적으로 연결한 후 무한히 증식되는 대안들을 기반으로 최적의 결과물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나 중국 하얼빈의 오페라 하우스를 만든 MAD 건축사무소의 마 얀송(Ma Yansong)을 구글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양정욱 <언제나 피로는 꿈과 함께> 

2013 나무, 실, 모터, pvc 2300×2800×2300cm 

<로우테크놀로지: 미래로 돌아가다>

(서울시립미술관 2014.12.9-2015.2.1) ⓒ 서울시립미술관





BIM이나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가상의 세계에 디지털 정보로 구현한 건축물을 기반으로 진행된다. 이는 곧 향후 정보처리 기술이 더 발전하면 머리 착용 디스플레이(HMD)를 끼고 디지털 건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건축은 물리적 구현이 선행되는 업종의 필수불가결한 특성 때문에 경직된 제작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지털 건축물은 실제 장소와 유사한 날씨, 바람, 빛을 상정하고 건축 요소의 재료와 공간, 동선을 체험하며 통합적인 피드백을 미리 확보할 수 있다. 아직 지어지지 않은 구조물을 경험하는 기회는 건축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것이다. 이런 알고리즘을 활용한 ‘컴퓨테이션 디자인(compu-tation design)’의 핵심은 바로 AI다. 높은 수준의 연산을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 뇌의 뉴런이 대응하는 방식을 활용해 지식을 축적하는 ‘딥 러닝(deep learning)’으로 날개를 단 AI는 이제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자부하던 창작 분야까지 침투하고 있다. 


현재 AI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고, 바흐(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을 분석해 바흐 풍의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며,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화풍을 연습해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물을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딥 러닝을 기반으로 자가 학습하는 AI의 진화 과정은 과거 예술 분야에서 만연하던 도제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화가 지망생이 대가의 그림체와 붓 터치를 베끼고, 연습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화법을 도출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프로세스와 비교해 어떤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가. 오히려 AI는 사람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자가 학습을 시도할 수 있어 반복적이거나 단순한 창작은 자동화 기능으로 순식간에 해결하며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딥 러닝으로 진보한 AI는 디자인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요즘 화두가 되는 ‘생성적 디자인(generative design)’이 단적인 예다. 특정 회사나 기관의 홈페이지를 들어갈 때마다 매번 무작위적으로 달라지는 로고를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무수히 변화하는 로고는 기존 종이나 사이니지(signage)처럼 변하지 않는 확정적 디스플레이에 기반을 둔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문법을 깨부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에서 계속 변하는 서체나 이미지 등 시각적인 다양성을 표현하는 소극적인 단계를 벗어나 이제 생성적 디자인은 디자인의 뼈대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AI를 활용한 웹 디자인 제작 사이트는 기본 디자인 요소(이미지, 텍스트)와 목적, 톤앤매너를 분석한 정보 구조를 기반으로 맞춤형 템플릿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고 있다. 산업 디자인 영역에서는 오토데스크(Autodesk)가 7년간의 연구 끝에 내놓은 프로그램인 ‘드림캐처(Dreamcatcher)’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드라간 일리치(Dragan Ili助⃝) <Roboaction(s) A1 K1> 

2016 A post-media art practice that combines 

drawing, movement, sound and video at the Alchemists of our 

Time Exhebition at POSTCITY Credit: Florian Voggeneder  





기본 골격을 잡은 후 변수를 입력하면 AI가 분석한, 공학적 구조와 경제적 효율성을 만족시키는 수많은 중간 결과물이 탄생한다.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지 못한 디자인까지 제시함으로써 제작 원가를 낮추고 더 안전하면서도 심미적으로 이채로운 결과를 도출하는 상황이 이미 시작됐다. 독일의 건축가, 마이클 한스마이어(Michael Hans-meyer)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복잡한 구조를 지닌 건축 형태를 실험하고 있다. 종이를 접고 자르는 방법론을 기반으로 한 알고리즘을 고대 그리스 양식의 기둥에 접목해 수백만 가지의 표정을 가진 장식적 기둥을 탄생시킨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하고 세밀한 기둥의 디지털 정보는 AI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불가능한 시도다. 3D 프린터를 통해 1:1 스케일 크기의 물리적 기둥으로 현실에 소환한 작업은 작년 광주에서 열린 ‘2017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 소개된 바 있다.  큰 줄기에 속한 소소한 작업은 알고리즘을 이용해 스스로 처리하고, 창작자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새로운 구조까지 제시하는 AI 창작의 시대에 디자이너와 건축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지난 6월 18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칸 라이언즈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에서는 ‘창의성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창의력의 산물인 광고 산업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대담을 나눴는데, AI가 아이데이션(Ideation)과 콘셉트 도출 속도를 높이고, 창작자의 주체성과 스토리텔링 파워를 강화하면서 결과적으로 광고 제작 과정의 명료성을 크게 개선한다는 이야기가 골자였다. 미국의 유력 매체인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의 표현을 빌리자면, 앞으로의 디자인은 한 마디로 ‘하이브리드 디자인(hybrid design)’이다. AI와 인간은 역동적인 상호 작용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결과물을 함께 만들어낸다. 곧 ‘컴퓨터 창의력(computational creativity)’이 앞으로의 창작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창작자-디자이너와 건축뿐만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을 이용해 창의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모든 직군의 역할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앞서 밝혔듯이 앞으로 알고리즘의 중요성은 더는 말할 필요도 없다. 창작물의 구조와 기능, 형태는 모두 알고리즘에서 비롯될 것이다. 하이브리드 디자인 시대에는 AI라는 비(非) 사물 지능의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관리하며, 더 나아가 교육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핵심 역할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크리에이터에서 큐레이터, 그리고 에듀케이터로 직무 특성이 확장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기술 발전에 따른 디자인과 건축의 변화가 실물을 가진 대상에 초점을 맞췄지만, 미래에는 가상현실이 디자인과 건축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디지털 데이터로 구현된 가상 세계는 우주처럼 끝이 없다. 





Installation view of <Open Codes> 2017 ZKM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 Karlsruhe 

Photo credit: Dennis Dorwarth  





인간 감각의 중추를 건드리며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흐릿한 경계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신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이 주는 사용자 경험은 감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한계가 없다. 게다가 가상현실이 물리적 장소와 결합한다면 그 층위는 훨씬 복잡해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가상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현실의 실제성과 더불어 현실과 연결되는 관계성의 단단한 구축이다. 창작자에게 가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이 주어질 것이 자명한 이유다. 결국 미래의 디자인과 건축은 도시라는 물리적인 장소에서 필수불가결한 미적, 경험적 기능체이자 동시에 우주처럼 거대한 가상 세계 속 비물리적 경험의 발현체로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지분율을 높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예술은 어떻게 될까? 2025년을 예측한 『유엔 미래보고서』는 예술과 관련된 미래 직종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요약하면, ‘미래 예술가(future artist)’라는 새로운 직군은 기술 발전과 사회 변화로 인해 음악, 미술, 무용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작업하는 협동 문화가 당연시되고, 이때 이 복합적 다원 예술은 초연결사회에 깔린 네트워크와 커뮤니티 망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며, 기술과 신소재를 활용한 예술 활동은 당연시되고 예술의 창조가 교육과 놀이와 연결되는 접점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뻔한 추측이다. 이런 예측 가능한 아이디어의 총합을 넘어 예술이 미래에도 왜 여전히 필요한지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기술 발전으로 편리함이 증대하고, 자동화로 인해 여가가 늘어나는 삶은 지금 생각하기에 지극히 이상적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걸 누리는 미래에도 그 가치는 여전할까. 인간은 선천적으로 의미를 찾는 존재다. 다양한 개인적 신념을 기반으로 경험과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존재 이유를 찾길 원한다. 모든 것이 풍요로울 것만 같은 미래 사회가 꼭 절대적인 행복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왜 사는지’ 정신적인 고양감을 충족시킬 때 인간은 비로소 상대적이나마 만족감을 얻는다. 미국의 작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그의 저서 『문학은 자유다(Literature Is Freedom)』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르돔리서치(Boredomresearch (Vicky Isley & Paul Smith))

 <Robots in Distress> 2017 Future Emerging 

Art & Technology, LifeSpace Dundee, 

2017 Courtesy of the artists





“작가의 일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그들을 흔드는 것이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을 열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백남준)이며 예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AI 시대의 예술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결국 휴머니티다. 이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다. 디자인과 건축은 이 휴머니티에 대한 갈증이 미래에 대한 창작자의 태도임을 인지하고 있다.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국제 학술제, ‘슈퍼휴머니티: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디자인하는가’는 디자인과 건축의 관점에서 다뤄야 할 미래의 인간상을 과학자, 미학자, 건축가, 역사가의 입으로 듣는 기회였다. 격년으로 열리는 ‘이스탄불 디자인 비엔날레 2017(2017 Istanbul Design Biennale)’의 작년 주제는 ‘우리는 인간인가? 종의 디자인: 2초, 2일, 2년, 200년, 20만 년’이었다. 


베아트리츠 콜로미나(Beatriz Colomina)와 마크 위글리(Mark Wigley)라는 저명한 건축 이론가가 공동 큐레이터를 맡았는데 그들은 “디자인은 언제나 인간의 디자인이었으며 인간을 위한 서비스 형태로 존재해왔다”며 기술이 발전해도 디자인의 본령은 휴머니티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래의 예술은 디자인과 건축이 대면하는 것 이상으로 큰 변화와 혼란을 겪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창작자, 직업인, 시민 등 여러 층위에서 요구하는 역할에 부응할 것이다. 환영의 세계에서 현실의 아날로그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 인간과 기계 사이에 인간의 특수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 아래 휴머니티를 자극하고 대중이 인지할 수 있는 경험적 환경을 조성할 것이다. 


이는 건축 공간, 혹은 디자인 사물을 통해 답보될 수도 있으며, 디지털 세계 안에서 환영적 교육의 일종으로 디자인하여 커뮤니티를 통해 엔터테인먼트로 보급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의 1인 크리에이터처럼 즉각적인 피드백, 실시간 대화, 관계성 확대를 통해 작가 스스로 인플루언서(influencer)가 되어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의외로 따로 있다. 바로 기술에 대한 열린 마음과 호기심이다.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소중한 부분을 되돌아보게 하는 행위다. 예술가는 이를 표현함으로써 우리 삶에 이바지한다. 새로운 표현의 문을 활짝 여는 기술의 발전에 맞춰 예술가 또한 새로운 기술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미디어 아트센터 독일 ZKM의 초대 소장을 역임했던 미디어 아티스트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말은 수확 가속의 창작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한 예술가가 가져야 할 미래적 태도에 대해 비범한 힌트를 남긴다.  



글쓴이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으며 현재 예술과 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DESIGN』과 『SPACE』에서 기자로 일했고 『CA』 한국판과 『web』에서 편집위원과 기획위원을 맡았었다. 최근까지 『Noblesse』에서 라이프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프리미엄 남성지를 만들었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정회원이며 대한전시학회 이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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