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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38, Mar 2018

한국 미술정책의 현재를 묻다

Korean Art Policy Today

현 정부가 발표한 미술진흥 중장기 정책의 비전은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사람 중심의 미술문화’로, 이에 입각해 주요 추진전략을 세우고 해당 핵심 과제를 만들고 있다. 창작자 보수제도부터 전시 관람 비용 소득공제나 미술품 유통 기반 확립, 세제 개선,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까지 개별 과제들은 지엽적인 것과 거시적 내용을 아우르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이처럼 문화체육관광부가 그려둔 큰 그림에 미술계 의견을 수합해 ‘미술진흥법(안)’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책을 집행할 수 있는 살림살이는 얼마나 마련되어 있을까.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예산은 5조 2,578억 원으로 정부 전체예산의 1.2%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중에서도 문화예술에 1조 6,387억 원을 쓴다는 계획이다. 한정된 금액으로 얼마나 규모 있게 운영할 것인지가 관건인 셈이다. 귀추가 주목된 시점, 우리는 “철학의 부재, 현실과의 괴리, 비효율적인 운영”이라는 비판을 딛고 보다 명확한 실체를 갖추기 위해 필요한, 오늘날 한국 미술정책을 점검하고 나아갈 방향에 관한 여러 전문가들의 제언을 묶어 본다.
● 기획 편집부 ● 진행 이가진 기자

백남준 '태내기 자서전' 1981, 1932년 뉴욕타임즈에 드로잉 후 양장제본 가변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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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준 교수,박소현 교수,안규철 교수,권미성 대표,안진국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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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무방비 미술계?_김세준

 

SPECIAL FEATURE Ⅱ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2018-2022)’을 어떻게 볼 것인가_박소현

 

SPECIAL FEATURE -

미술 분야 중장기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제안_안규철

 

SPECIAL FEATURE -

중소(中小) 갤러리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_권미성

 

SPECIAL FEATURE -

몫 없는 자들의 몫 찾기, 그 가능성에 대한 의문_안진국





민성홍 <Rolling on the ground>

(inside view) 2017 Found objects, landscape painting,

 wood, wheel, mirror 160×55×55cm 사진 제공: 민성홍





Special feature 

무방비 미술계?

● 김세준 숙명여자대학교 문화관광학부 교수

 


2018년 초 미술계와 문화계 전체를 바라보는 내부와 외부의 시선은 매우 착잡하다. 2017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대변되는 헌정 초유의 사건으로 생긴 광장 민주주의의 실험은 정권교체라는 큰 결과를 이루었음에도 미술계가 바라는 문화정책의 변화가 현장에서 체감되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국내 정치 환경과4차 산업혁명으로까지 불리는 미래사회의 경제적 환경과 신자유주의 이후에 전 세계적으로 심화된 분배의 불평등과 청년고용의 문제 등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이제 일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불안한 문화예술계 외부환경의 추세는 미술계에서도 매우 심각하게 논의가 필요하다. 그동안 자족적 미학의 선을 지지하였던 개인 창작과 문화 향수의 정통성은 블랙리스트에서 드러났듯이 한편 위선적이기까지 했던 권력과 경제적 영향에서 미술계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현 미술정책의 무엇이 남아야 하고 무엇이 변화해야 하는지를 점검해야 애써 이룬 현재의 정책적인 기회를 살릴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소 포괄적인 우리나라 문화정책의 배경과 미술정책의 대안적 방향에 관해 논의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개발은 시민 혹은 지역사회 주도이기보다는 국가주도로 대기업 중심의 압축성장으로 이루어졌다. 서양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경제적 발전이라는 개념과 동일하게 수용하고 국가는 공동체의 통합을 위한 단일화된 상징으로서 문화정책을 간주하고 일정한 수준의 복리를 위해 국가가 직접 문화정책을 설계하고 미술계 등 관련 영역에 자원을 보급하여 진흥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우리 문화정책은 고유한 문화를 유산으로 단순화하고, 전통을 구습으로 간주하여 근대화와 산업화의 극복할 대상으로 삼았다. 우리보다 먼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서양의 문화를 모형으로 끝없이 추월할 대상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열등하게 보는것이 지금 우리 미술문화의 배경이다. 또한, 블랙리스트 소송에서 나온 국가와 문화를 동일하게 보는 점은 한·중·일 특유의 오래된 관료집단사회의 특수한 요소이다. , 일반적으로 집단중심사회의 심리는 개인중심사회의 심리와 비교했을 때 집단 내 동일성을 다양함에 비해 우선하고 비교적 평준화·지속화를 중시한다는 연구에 의하면 지난 몇 년간 정부의 문화정책의 근간이었던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미술의 일반화가 어떠한 방향으로 국내에서 흘러가고 국제적으로는 고유한 우리의 미술이 어떻게 비칠지 추론된다. 





 2016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전시 전경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특히, 2000년 전후의 경제위기 정부정책의 대부분은 발전전략으로 문화영역이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되어 최근에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발전에도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산업적 측면에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문화를 매개로 공공미술, 지역축제, 도시재생 등의 프로그램으로 지역발전을 이룬 사례도 나타났다. 비엔날레 등 국제미술 행사는 지역발전과 지역 문화 향수, 문화교류를 목표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미술계와 정부의 협력이 미술 향수의 양적 증대 이외에 우리 미술의 고유성과 보편성을 글로벌 미술계가 인정하는 질적인 측면은 정체되어 있거나 지역주민과 작가는 소외되어 있다는 점은 문화영역이 경제적 발전 수단으로 주로 인식되고 나아가 이러한 목표가 성취되지 않았을 때 미술영역의 필요성도 훼손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의 미학적 경험 충족과 사회발전을 위한 문화적 실천의 맥락이 중요하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민간위원회의 모습을 띤 문화예술위원회 등 다양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의 국가주도적인 하향식 프로젝트는 작가와 애호가, 지역사회 구성원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기보다는 경제적이고 단기성과 우선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정책효과의 지속가능한 측면에서도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미술계와 지역사회의 내재적 역량 강화가 절실하다.   


시장 활성화를 위한 우리나라 개발정책의 대부분은 민간투자로 이루어진다. 민간투자를 위해 수요가 원하는 혹은 미래에 원할 상품생산을 위해 생산인력에 대한 교육과 거래를 신뢰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을 한다. 그럼 미술시장의 수요는 누구이고 민간 혹은 기업은 누구일까? 이를 위해 미술을 바라보는, 미술계를 바라보는 복잡한 인식을 먼저 확인하여야 한다. 문화에 대한 인식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보편적으로는 습관적으로 드러나는 특정한 삶의 양식으로, 고유적으로는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예술 장르를 위주로 하는 특수 영역으로, 도구적으로는 문화산업과 도시재생에서의 역할을 주로 든다. 이러한 개념으로 보면 미술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논쟁적이고 구성적이다. 정책의 설계에서 문화예술의 정의를 최종 드러난 형식으로 자의식 혹은 무비판적으로 사용되어 정책에 참여하는 정부, 기관, 작가 모두 이질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고 최종적으로는 정치, 경제 권력의 영향이 개입되어 미술이 주도하는 정책이기보다는 미술이 소모만 되는 결과가 종종 나타난다. 




<시청각 자료함> 2017 아크릴, 종이 

()593×325×477mm, ()655×250mm 촬영: 정민구

 



미술문화의 정통성은 주로 최고선을 지향하는 미학적 범주에서 시작하므로 문화소비자들, 특히 젊은층이 초기에는 관심을 갖지만 차츰 경제와 관계를 맺게 된다. 정책은 작가, 미술학교, 화랑, 미술관 등의 공동체를 보호하기보다는 정통성의 “외관”과 “체험”의 보존과 확산에 제한된다. 미술정책의 목표가 세계미술의 수도는 아니다. 그동안 행선지 도시로 불리는 도시경쟁력의 수단으로 활용된 문화수도는 맥도날드구겐하임(편집자주: 햄버거 체인처럼 분관을 세계 곳곳에 세우는 미술관)이라는 신조어를 양성하듯이 반세기 전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국제주의와 다른 지역발전을 위한 균일한 창의계급, 미술관과 도시재생사업으로 대표되는 지역문화정책은 발전이라는 이름하에 주로 ‘보편적인 외관’과 ‘일정한 체험’을 담보하며 문화 이미지 소비로 귀결되어 미술계의 미술문화의 소유권이 상실되었다. 미술문화의 정통성은 관련 공동체와 개인의 문화활동권이 존중되어야 하며 이는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던 상징과 실천의 집합체인 미술문화의 공동체에 대한 존중이다. 


그동안 시장 확대라는 이유로 수없이 많은 평이한 작품들이 만들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정책은 공동체의 좋은 협력자는 아니었다. 이는 바닥에서부터 정치적인 의지를 갖고 미술계 전반의 저항심을 일으켜 ‘문화창의력’이라는 사회적 목표를 ‘정착’시킬 수 있는 개별적인 미술복지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이다. 블랙리스트의 주도자가 역설적으로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듯이 냉소적이고 패배적인 고립된 미술가의 유형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문화창조를 위한 보편적 기준에 참여하기 위한 글로벌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문화와 시대정신과 사회변화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우리 고유 미술문화의 노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이는 미술문화 공동체가 단순히 미술계의 지엽적 이해 특히 기존의 지원금 타내기, 행사시설 유치의 단기적 목표가 아닌 대사회 문화적 메시지 발신을 위한 가치실천 지향적 공동체임을 말한다. 


그럼 미술계를 살리는 정통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정책에서 무엇이 남아야 하고 무엇이 변화해야 할까? 변화를 지킬 미술의 정신은 무엇일까? 이미 셀피(Selfie)로 대표되는 현상에서 많은 젊은 문화 이미지 소비자는 미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기보다는, 사진의 배경이 되는 미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위한 미술을 그냥 보고 있다. 최근 해외 박물관의 조사에서 관람객 평균 전시된 미술품 한 점을 보는 시간이15초라는 발견은 관람자 중 3%가 한 점 당 15분을 본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모바일시대의 과도한 정보와 이미지에 따른 사람들의 피곤함, 소비의 익숙함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애호가와 작가는 각자의 충족감을 위해 변화한 창작과 향수를 하고 있다. 이는 사회 안에서 치열하게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더 이상 국가의 전유물이 아닌 미술문화의 가능성을 찾아본다. 미술문화의 정통성은 협의의 예술의 자족적 이미지를 넘는 참여와 교류를 통한 실천적인 작가정신을 구현하여 내재적인 회복과 발언과 외재적인 사회적 변화의 축에 나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책에서는 서울과 지역의 균형발전이 단순히 지표적인 발전이 아닌 고유성의 보편성 해석으로 동아리와 기관 등 다수의 작은 미술문화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무엇보다 교류를 위한 공동목표 및 협치역량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이 우선된다. 미술정책의 장기적 비전을 위해서는 정책단위 밑의 작은 프로그램들의 자발적 제안과 참여를 유도하는 환경조성과 연구와 개발이 중요하다. 지금은 관주도의 시장 확대를 위한 미술정책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미술문화인지 공동체간 논의로 이질적 정의에 대한 상호학습과 인식 후 협치에 대한 내재적 역량의 확보가 필수이다. 잘 사는 것(good living)이 잘 사는 것(good buying)만이 아니라는 인식의 확대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인 집단사회에서 국가주도 문화에 대한 정의의 변화를 기대한다.  

 


글쓴이 김세준은 국내외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였고 주로 문화정책, 예술경영, 국제문화교류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현재 부산비엔날레, 백남준아트센터, 문화역 서울284 등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예술경영학회장을 맡고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문화관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성필 <Harmony in Havana> 

2015 설치 전경 28×33m





Special feature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2018-2022)’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박소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양한 층위와 영역들에 관한 계획들이 발표되었거나 준비되고 있다. 이번 정부의 문화정책은 정권교체를 낳은 핵심영역이었던 만큼, 그 출발부터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요구받아 왔다. 이미 블랙리스트 범죄와 대통령 탄핵, 그리고 대선을 거쳐 새 정부가 탄생하는 과정들 속에서 현장으로부터의 각종 토론과 의견수렴, 이에 대한 정부 차원의 거듭된 대책 발표와 공개토론 등이 이어졌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열띤 공론장이 만들어진 점만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2 7, 문화체육관광부는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2018-2022)’의 공청회를 개최했다. 아직 확정된 계획은 아니지만, 향후 5년간 미술정책의 목표와 방향, 그에 따른 세부 정책과제들을 짐작케 하는 이 계획은 앞으로 발표 예정인 ‘문화비전2030’ 및 ‘새 예술정책’을 상위계획으로 하는 부문별 중장기계획의 하나이다.


 따라서 ‘문화비전2030’ 및 ‘새 예술정책’의 발표와 연동하여 수정, 확정되는 정책체계 속에 있는 계획이다. 그런만큼 이번 미술 분야 중장기 계획은 직접적으로 특정 법률에 근거해 수립, 시행되는 것은 아니나 실행상의 구속력과 책임이 따르는 것이 된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계획은 큰 틀에서 지난 정부에서 수립한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2014-2018)’을 갱신하고 보완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번 발표 자료에 기재되어 있듯이, 이러한 연속성은 지난 정부 들어 처음 수립된 미술 분야 중장기 계획이 대부분 달성되지 못하고 진행형이라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연히 제기되었어야 할 질문들이 생략되어 있다. 왜 지난 중장기 계획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진행형에 머물러 있는가? 그것은 계획의 한계인가, 아니면 실행 상의 문제인가? 


또한, 이 계획 수립 이후 시행되었던 제도나 사업은 계획에 따른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근거에 의한 것인가? 후자일 경우, ‘중장기 계획’의 행정적 용도는 무엇인가? ‘진행형’인 제도나 사업들이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제도나 사업의 문제점이 ‘인프라 부족’이나 ‘공유·향유 관련 사업 부족’이라는 추상적 정책언어로 수습된 것은 적절한가? 문제 진단이나 평가가 엄밀하지 않다면, 그로부터 도출된 해법은 길을 잃기 쉽다. ‘현황-문제점-대안’ 또는 ‘비전-목표-추진전략-핵심과제’라는 정책논리의 ‘형식’이나 ‘구조’는 자칫 내용 면에서의 논리적 타당성을 획득한 듯한 착시현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권대훈 <Willowwacks> 2012 레진, 

아크릴릭 페인트, 린넨, 우드 보드 111×208×148cm





따라서 비전이나 목표로 제시되는 중장기 계획의 정책기조부터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비전이나 목표는 그저 전략이나 정책과제와 같은 각론들을 포장하는 상투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과 목표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 또는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정책가치를 공식화한 것으로서, 향후 5년간 전략이나 정책과제를 수정·보완하거나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근거이자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번 계획은 ‘선순환의 미술생태계 조성’(목표)으로 ‘미술로 행복한 삶’(비전)을 실현시킬 것을 정책가치로 설정했다. 비전은 우리 사회에서 미술이 어떤 존재이자 역할을 하는 것인지, 나아가 해야 하는지, 즉 미술의 사회적 가치와 용도(의 바람직한 방향 내지 지향점)를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근본적이고도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로부터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 경험 내에서 사회적 논의나 합의는 정책과제 차원에 집중되고, 정책가치 설정은 계획을 수립·집행하는 행정기관이나 행정가의 몫으로 돌려져 왔다. 


‘미술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를 위한, 어떤 행복을 의미하는가? 이 정책가치는 어디로부터 연원하는 것인지, 어떤 이들 또는 어떤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제기된 것인지, 다양한 사상이나 입장, 이해관계들의 어떤 조정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인지, 정의되거나 설명되어 있지 않다. 미술계 내부에서 생산되는 이론들이나 비평들, 미술 및 미술계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논의들은 이 정책가치(비전)를 설정하는 공론장이나 의사결정 과정과는 격리되어, 정책대상이거나 지원대상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책관행의 산물인 ‘미술로 행복한 삶’이라는 비전은 상투어이거나 텅 빈 공론장이며, 미술계와 미술행정, 미술과 국가의 전도된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전의 실질적인 위상이나 성격이 이러하다면, 결국 ‘정책’은 사회적 가치를 초월한 세부 정책과제들과 그에 연계된 이해관계의 문제로 평면화 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는 왜 미술정책이 필요한가, 왜 국가가 미술을 지원해야 하느냐는 정당성에 관한 질문들에 끊임없이 직면하는 악순환이며, 예술가가 일체의 사회적·공공적 가치로부터 발가벗겨진 채 일차적인 생존과 생계의 곤란을 증명해야 하고, 빈곤과 이해관계의 셈법만 남은 듯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 인식 개선’은 ‘캠페인’이라는 세부 정책과제로 국한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미술 인식 개선’은 우선적으로 미술행정의 몫이다. 미술계와 미술행정 사이의 전도된 관계 및 역할, 행정적 상투어로 화한 정책가치(비전)를 바로 세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미술계의 공론장과 정책적 의사결정을 적극적으로 연계하고, 정책결정 및 집행 과정에 대한 정책당사자들(미술의 창작, 유통, 향유 주체들)의 정당한 참여와 개입의 몫을 확보하는 일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중장기 계획이 세부적인 정책과제나 사업, 그 행정적인 집행기구의 신설이나 대대적인 확대 재편을 제시할 뿐, 정책수립과 집행과정에 대한 정책당사자들(미술의 창작, 유통, 향유 주체들)의 참여를 위한 제도적 장치, 거버넌스 구조를 결여하고 있는 점은 문제적이라 할 것이다. 또한, 비전의 상투성은 결국 중장기 계획의 실질적 무게중심을 정책목표 이하의 층위로 옮겨놓는다. 


이때 목표는 추진전략 및 핵심과제를 통해서 달성되어야 할 정책성과로서, 측정 가능한 정책평가의 지표로 제시된다. ‘선순환의 미술생태계 조성’(목표)은 미술 일자리 수(청년에게 희망이 되는 미술), 미술 전시 관람률(삶 속에서 누리는 미술), 시장 규모(함께 성장해나가는 미술)라는 구체적인 성과·평가지표로 가늠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지표는 창작=일자리 수, 향유=전시 관람률, 시장=시장규모라는 형태로 대응된다. 이로써 ‘미술생태계’ 개념은 이 세 개의 영역을 통칭하는 것에 불과하고, ‘선순환’은 각 영역에 대응하는 세 지표들의 양적 성장으로 치환된다. 그럼으로써 여기에서도 정책가치의 문제는 생략된다.  




함경아 <당신이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섯 개의 도시를 위한 샹들리에> ‘아트바젤홍콩 2016

(Art Basel Hong Kong 2016)’ 앤카운터(Encounters) 설치 전경 

Photo: Sebastiano Pellion di Perrsano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미술생태계’ 개념 및 모델을 채택하는 것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가치를 채택하는 것이다. 그 가치란 다양성이다. 생태계 모델에서 다양성은 유적 존재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자 전략이다. 그것은 먹이사슬과 같은 가치사슬(창작-유통-향유)의 긴밀한 연쇄 관계를 강조하고, 각 가치사슬 단계에서의 종(種)다양성을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이 생태계 모델의 장점은 우선적으로 예술가의 창작을 국민의 향유를 위한 필수요건으로 설정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미술의 사회적 가치 및 역할, 국가가 미술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 예술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 및 권리 보장 등을 그 자체로 해결해 주는 데 있다. 또한, 종다양성이라는 규범적 가치는 창작, 유통, 향유의 각 단계에서 일관되게 적용되는 것인데, 미래세대의 생존을 위한 문화유산의 다양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역사적 시간에 기반한 지속가능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생태계’ 모델은 국가나 시장에 의한 다양성의 침해 또는 훼손을 거부하며, 국가의 역할은 이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대시키는 제도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미술생태계’ 모델에 입각해서 본다면, 2014년에 수립된 중장기 계획은 상충되는 가치들을 병합시킨 한계를 안고 있다. 당시 중장기 계획은 미술계의 정책수요나 미술정책과 관련된 공론장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미술시장 활성화’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로 중장기 계획의 실질적인 대전제이자 지향점은 ‘미술시장 활성화’에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중장기 계획의 수립이 ‘미술생태계’ 모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승자독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으로 평가되어온 미술시장과 ‘종다양성’ 개념을 근간으로 하는 미술생태계 모델이 긴장이나 갈등 없이 공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양자 중 어느 한쪽을 우선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전 계획은 미술시장 활성화라는 대전제를 우위에 두고 선택적으로 실행되었다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미술생태계 모델에서 도출된 정책과제들이 계획 또는 정책연구 단계에 머물거나, 실행되었다 하더라도 생태계 모델이 지향하는 다양성의 가치를 충분히 구현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번에 공청회에서 발표된 중장기 계획이 이러한 기존 미술정책의 ‘경로의존성’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왜냐하면, ‘지속가능한 창작 환경 조성’, ‘일상에서 누리는 미술문화 향유 증진’, ‘투명하고 공정한 미술시장’, ‘미래를 위한 법·제도 정비’라는 네 가지 핵심전략은 시장적·경제적 가치를 바탕으로 ‘미술생태계’ 개념을 적용한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미술생태계의 가치사슬에서 시장을 중심에 둔 ‘창작-유통(시장)-향유’로 인식한 소산이다. 하지만 창작 활동은 오랜 기간의 교육을 필요로 하고, 창작 활동이나 그 결과물은 금전적 가치로만 환원되거나 시장에서만 유통되지 않으며, 향유는 소비 활동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런 점만 고려하더라도 미술생태계의 가치사슬은 ‘교육-창작/취업/연구/비평-전파(비경제적 공개·설치·순환)/유통(경제적 거래)/교육-접근(소비(구매)/학습/감상/사회문제 해결/창·제작 등)’과 같이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당연히 각각의 가치사슬에 관련된 주체들도 단일하지 않고, 공공과 민간 영역이 중첩되어 있다.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며, 디지털 환경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복잡성과 다층성은 ‘미술정책’이라는 틀을 현재 정부 부처 간 역할분담이나 문체부의 조직구조에 대입시키는 순간, 충분히 고려되기 어렵다. 미술생태계의 가치사슬을 ‘창작-유통(시장)-향유’라는 시장 중심 모델로 설정하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행정분업에 따른 주무부서의 기능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타 부서나 타 부처, 공공기관, 지자체, 기업, 시민사회 등과의 적극적인 정책 협의와 협력이 주무부서 본연의 핵심 업무로 정착되어 폐쇄적 행정 칸막이를 넘지 않는 한, 미술생태계의 가치사슬과 종다양성을 충실하게 반영한 ‘미술정책’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양혜규 <An Opaque Wind> 2015 ‘제12회 샤르자비엔날레’ 

설치 전경 혼합매체 설치 Commissioned 

by Sharjah Art Foundation Courtesy Galerie Chantal Crousel, 

Paris; Greene Naftali, New York; Kukje Gallery, Seoul; 

Galerie Wien Lukatsch, Berlin; and the artist Image courtesy 

of Sharjah Art Foundation Photo by Deema Shahin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와 같은 장르별 입법·정책체계의 가능성과 한계도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이 상위계획들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미술 분야에 특화된 법률의 제정이나 진흥기구의 분립 역시 전체적인 문화 관련 법체계 및 행정체제의 정비,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의 정책협력이나 협의구조, 정책결정·집행·평가에서의 거버넌스 구조 정립 등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요청되고 있는 ‘미술정책’의 확장성과 전문화는 닫힌 ‘미술정책’의 구조 내에서는 선언적 차원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미술/공예/공공디자인’이나 ‘마을미술’/‘건축물 미술작품’과 같은 행정적 분류체계가 현실의 장르를 왜곡된 형태로 재생산해 온 점만 보더라도, ‘미술정책’이라는 행정적 분업은 미술 및 미술계의 다변화 및 확장성, 실험과 비판, 예술과 생활과 산업 사이의 유기적 관계 등을 제한적인 장르 개념으로 구속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중장기 계획은 이번 정부 들어 이루어진 문체부 조직개편과 블랙리스트 범죄로 인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의 기구개편 논의가 미술정책에 초래할 변화 역시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가령 한 차례의 조직개편에서 미술관 업무가 문화기반과로 이관되면서, 시각예술디자인과가 수립한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은 국립현대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문화역서울284, 예술의전당 내 미술관들 정도를 제외하곤 미술관 전반에 관한 계획을 담고 있지 못하다. 대신 ‘전시’ 관련 사업이나 제도 구축으로 관련성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미술생태계’ 개념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칸막이 행정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교육-창작/취업/연구/비평-전파(비경제적 공개·설치·순환)/유통(경제적 거래)/교육-접근(소비(구매)/학습/감상/사회문제해결/창·제작 등)’라는 복잡한 가치사슬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공영역이 담당하는 역할과 비중은 크다. 당장 미술관은 시장의 중요한 구매자이며, 미술향유나 교육의 핵심적 기관이니, 이를 제외하고 ‘미술생태계’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셈이다. 미술관의 주무부서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미술정책’을 수립할 때에는 주무부서와의 협의 및 협력을 통해 관련된 계획을 포함시키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사정도 작용해서인지, 미술시장과 소비 관련 제도의 신규 도입 및 미술은행의 기능 강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경영지원센터·마을미술프로젝트 등의 기존 미술사업 인력 40명에 신규인력 20명을 더한 미술진흥전담기구의 신설, 통합전산망 등 디지털 정보인프라 구축, 신규 문화기반시설의 건립 등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 점이 눈에 띈다. 대신 정책 한계점으로 지적했던 미술 관련 예산이나 지원금 규모가 체감 가능한 수준으로 증가할 수 있는 정책과제가 과연 이 중장기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된 정책목표나 관련된 지표 역시 부재하다. 중장기 계획의 이러한 구성은 현재로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이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기까지 수차례 거듭 개최된 회의들을 통해 제기된 다양한 목소리들이 중장기 계획 수립이라는 행정행위 내지 행정문서의 상투어로 퇴색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미술정책에 대한 공론장이 보다 활발하게 열리길 기대하며, 또한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안)’이 조금은 더 개선된 모습으로 발표되길 기대해 본다. 


 

글쓴이 박소현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도쿄대학 문화자원학 협동과정(문화경영전공)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문화예술정책 전반에 관해 연구하였으며,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 정책전문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전공 교수이다. 예술정책/제도와 예술실천 사이의 문화정치에 관심을 갖고 문화예술정책, 박물관/미술관학, 근현대미술사 등의 영역을 넘나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최정화 <Chaosmos Mandala> 2016  





Special feature -

 미술 분야 중장기 계획에 대한 몇 가지 제안

● 안규철 미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I. 미술계 바깥의 미술 


작가에 대한 전시 지원과 작업공간 지원은 현행 미술지원제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열악한 창작환경 속에서 시장의 취향과 트렌드를 넘어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이런 지원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정해진 예산과 공간을 나눠주는 지원사업의 혜택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작가에게 돌아간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전시지원 공모는 엄청난 경쟁 속에서 수많은 지원자를 탈락시킬 수밖에 없다. 제안서를 잘 쓰고 전시 기대효과를 똑 떨어지게 설명하는 능력과 주요 레지던시를 차례차례 거친 경력이 작가적 성공의 필수요건처럼 되었다.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해서 더 많은 미술가가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지만, 이런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미술정책에 대한 논의에서 지금의 미술지원제도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관점의 전환을 제안한다. 한마디로 현재의 미술지원제도는 ‘작가주의적’ 고정관념에 근거하고 있다. 미술가 개인의 창작과 발표활동에 대한 지원 사업들은 전적으로 ‘미술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수한 신진미술가의 미술계 진입과 안착을 돕거나, 이미 미술계에 속해있는 기성작가의 활동을 뒷받침한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신진작가 700만 원, 기성작가 1,000만 원 가량, 그러니까 전시장대관료와 카탈로그 비용 정도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런 취지가 얼마만큼 구현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미술계’는 미술과 관련되는 여러 영역들 중 하나이고, 무한정으로 확장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미술관과 미술시장으로 이루어지는 그 세계 역시 수요공급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미술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예비미술가 대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미술계 안에서 활동하는 현역작가들조차 창작 활동만으로 생계와 창작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저소득층 구제 차원의 창작지원금 배분보다 더 절실한 것은, 미술가의 사회적 활동영역을 확대하고 다변화하는 것이다. ‘문화융성’을 내세웠던 지난 정부는 미술시장을 키우는 것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 했다. 초기에는 심지어 정부가 수백억 단위 아트펀드를 조성한다는 아이디어까지 나왔을 정도로 그 정책 방향은 ‘시장’ 중심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장이 커진 것도 아니고 시장의 ‘낙수효과’가 미술가들에게 돌아간 것도 아니다. 시장을 키우는 것은 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국가 차원의 미술 중장기 정책이라면 미술을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더 큰 그림이 있어야 한다. 체육에서 올림픽 국가대표선수만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미술가에게 ‘대안공간>갤러리>미술관>국제 미술계’라고 하는 단선적인 목표를 향한 배타적 무한경쟁을 요구할 것이 아니다. 미술의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만들어내고 미술가와 사회의 접촉면을 넓히는 노력이 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도시재생사업과 미술가들의 연계, 지역 단위 공방시설 및 커뮤니티 공간을 이용한 교육프로그램 운영과 같은 사례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여 미술가들의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정지현 <Demolition Site 01_ Inside> 2013 

피그먼트 프린트 120×160cm ⓒ 정지현  




II. 국제화


한국미술의 국제화, 정확히 말하면 해외 진출은 언제나 미술정책의 주요의제였다. 비엔날레, 해외전시, 아트페어 지원사업들은 모두 이를 목표와 근거로 하여 진행되어왔다. 우리는 이런 사업들을 통해서 한국미술이 ‘국제적인 위상’을 얻게 되고, 제2의 백남준 같은 작가를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현대미술 후발국가로서 우리 미술의 성과를 해외에 알리고 대한민국 국적 미술가가 합당한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한 의제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과연 우리의 기대처럼 제대로 기능해왔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이제까지 국제적인 이름을 얻은 몇 안 되는 한국작가 중에서 국내에서 먼저 제대로 인정되고 평가된 작가가 거의 없다는 것, 하나같이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현지의 평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국내에 알려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구해왔던 ‘한국미술의 국제화’ 정책이 무엇을 놓쳐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서울, 광주, 부산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열리고 있는 수많은 비엔날레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과는 엄밀히 말해서 한국미술의 해외 진출이 아니라, 국내의 미술에 대한 인식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고 봐야 한다. 국제 비엔날레를 통해서 수많은 해외작가와 큐레이터들에 의해 소개되어온 해외 현대미술의 동향은 국내 미술계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지난 20년 사이에 한국 현대미술의 급속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변화된 한국 현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작가들을 해외로 진출하도록 하는 것은 또 다른 노력을 요하는 문제다. 무엇보다도 한국 동시대 미술의 체계적인 계보를 만들고, 차별화된 담론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최근 해외 미술계의 주목받은 ‘단색화’는 이런 담론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안타깝게도 이 담론을 만들고 작가들의 계보를 만든 것이 국가기관이 아니라 개인 화랑이었다는 것은 심각하게 돌이켜볼 문제다. 바로 이러한 동시대 한국미술의 담론 구축이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예술위원회 등 미술 관련 핵심기관의 중심과제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미술비평과 미술사 연구 및 전시기획 지원에 대한 정책이 체계화되어야 한다.



III. 공공미술


지난 30년간 시행되어온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이른바 ‘공공미술’의 중심적인 제도인 동시에 가장 시급하게 변화가 요구되는 제도이다. 건축주, 중개업자, 미술가의 이해관계가 절충되어 관행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건축물 미술작품’들은 주류미술계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일부 중개업체와 전문작가들의 독점 사업 분야가 되었다. 서울에서만 매년 200점 이상의 ‘건축물 미술작품’들이 설치되는데, 그중 상당수가 예술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키치 장식물의 수준이어서 도시환경을 오히려 해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와 아울러 지자체나 각종 민간단체 차원에서는 기념비와 동상 건립사업이 우후죽순으로 추진되고 있다. 건축물 미술작품이든 동상, 기념비든 공공공간에 세워지는 미술작품은 시민의 공간을 점유하는 반영구적 시설물일 뿐 아니라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미래상에 부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민적 공감과 합의, 도시공간과 환경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요하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이에 대한 합리적 절차와 기준을 포함하는 공공미술 정책이 마련되어 근본적 개선이 시작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는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 토론회를 위한 발제문으로 작성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임



글쓴이 안규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계간미술』 기자를 거쳐 독일 슈투트가르트국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49개의 방> (2004, 로댕갤러리),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201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 개인전을 열었고, 『그 남자의 가방』(현대문학),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현대문학) 등 저서를 냈으며, 1997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있다. 


 


강태훈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2010 부산비엔날레’설치 전경





Special feature -

중소(中小) 갤러리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 권미성 갤러리조선 대표 

 


갤러리스트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어떻게 그렇게 전시를 계속하세요?”라고 묻는다. 갤러리가 전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요즘은 그조차도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2017년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상위 3개의 화랑이 미술품 판매 전체매출의 52.6%, 상위 2개의 경매회사가 81.8%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상위 화랑을 제외한 400여 개의 갤러리는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거나 수익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며, 수익성과 작업관이 충돌하는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은 전시할 공간을 찾지 못한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반복되고 있다이번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안에 포함된 중소갤러리 지원제도는 이러한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중소화랑이 작가와 갤러리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적 관계를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갤러리는 전시와 아트페어, 국제프로그램을 통해 작가를 소개하는 등 작가 육성을 위한 장기적 투자를 할 수 있고, 작가와 갤러리가 서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 불공정 계약이 되지 않도록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언리미티드 에디션(unlimited edition)’ 당시 입장을 위해 길게 줄을 섰던 이들과 같이 신선한 연령층의 컬렉터들이 등장했고, 이들을 미술시장에 포섭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그들은 심적/경제적 이유로 대형 화랑보다 친밀한 중소 화랑을 통해 첫 미술품 구매 경험을 할 가능성이 크고 이에 응답하듯이 우후죽순 많은 작가 직거래장터가 열렸다. 이를 통해 대중의 소비 경험확대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미술품의 가격을 하향평준화시키고 미술품에 대한 구매욕을 단순유행으로 단축해버렸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하여 앞으로 작가 장터는 실험적, 대안적 성격의 미술품을 위주로 작가와 갤러리를 이어주는 플랫폼으로써 작동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한국미술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시점에 와 있다. 


수십 년을 세계아트페어를 돌아다니며 고군분투했던 갤러리들에겐 벅찬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세계시장의 장벽을 넘으려면 단단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작가와 갤러리, 미술관 그리고 정부의 지원 모두가 합심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야지만 그 벽을 넘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지난해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한 KIAF(Korea Inter-national Art Fair)의 예를 들어 보고자 한다. 화랑협회는 백여 명의 컬렉터와 미술관, 갤러리 관계자를 초청하였다. 예술경영지원센터도 같은 기간 동안 ‘코리아 갤러리 위캔드(Korea Gallery Weekend)’를 주관하여 해외 패널과 작가들, 미술계 VIP들을 한국에 초빙해 미술계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공유하였고, KIAF와 한국의 갤러리들을 방문할 수 있게끔 하였다.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과 열기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고, 그 성과 또한 컸다. 그러나 각각의 행사는 형식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때문에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KIAF뿐만 아니라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행사도 마찬가지로 기관과 화랑, 작가와 같은 주체들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야 일반에게는 축제의 장이, 주최 측에게는 수확의 기회가 될 것이다. 정부가 작가 직거래장터, 코리아 갤러리 위캔드 등 많은 아이디어를 내며 미술의 진흥을 위해 애쓰고 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동안에도 미술정책이 없었던 것이 아닌 만큼 늘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좋은 작가와 좋은 갤러리에 대한 분별력을 갖고 그들을 지원하기 바란다. 예술성 있는 작가가  작업에 집중할 수 있고 중소 갤러리가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때 새로운 컬렉터가 창출되며 이 시스템이 잘 정착되어야 세계 미술시장과 견줄 수 있는 한국 갤러리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다. 그래야 지속해서 새로운 작가들이 세계시장에 진출하게 될 것이다. 

 


글쓴이 권미성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갤러리조선을 운영하고 있으며, 젊은 작가들의 동시대미술 전시를 주로 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이준 <Bias> 2015 혼합매체 33×23×16cm(각각)





Special feature -

몫 없는 자들의 몫 찾기, 그 가능성에 대한 의문

● 안진국 미술비평가

 


예술가는 자본주의의 상품화 체계에서 셈해지지 않는 ‘몫 없는 자들(les sans-parts)’이다. 노동과 자본을 등질화하려는 자본주의 전략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성경 구절을 ‘몫 없는 자’를 색출하는 계명으로 활용하고 있다. 여기서 ‘일’은 오직 판매 가능한 노동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창작은 무엇인가? 노동이 아닌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가사와 돌봄은, 학생의 교육은, 실업자들의 구직과 재교육은? 이것들은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것들은 ‘일(노동)’이 아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노동(창작, 가사·돌봄), 혹은 공동체 재생산을 위한 공동체 내부의 수행노동(구직, 교육)을 마치 자연물처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 것인 양 취급한다. 오직 상품화할 수 있는 것,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유통이 가능한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에서 예술가의 노동은 오직 그의 작품이 판매될 때만 인정된다. 다시 말해, ‘작품’이 ‘상품’으로 전환되었을 때 비로소 ‘일’한 것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 정부가 추진하는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은 과연 지금까지 셈해지지 않았던 예술가의 ‘몫’,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았던 예술가의 ‘일’에 대한 고민과 고려가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가 추진하던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2014 9 24일 발표)을 리뉴얼하여 5개년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을 수립 중이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 이전 정부의 3대 추진전략(‘창작 활성화 여건 조성’, ‘전략적 미술시장 육성’, ‘국민의 미술문화 향유 증진’)에 ‘법·제도’가 하나 덧붙여진 형태라 할 수 있다. 두드러진 점이라면 방향성인데, 이전 정부가 ‘전략’에 방점을 두었다면, 새 정부는 ‘투명’과 ‘공정’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새 정부의 계획 또한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 안에서 맴도는 것은 여전하다. 지난 2017 1213일에 있었던 ‘미술 정책 종합 토론회’에서 계속 거론되었던 단어는 ‘미술시장’, ‘판매’, ‘유통’, ‘위작’, ‘작품 감정’ 등이었다. (아쉽게도 이번 2 7일에 있었던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수립 관련 공청회’는 참여하지 못했다) ‘미술정책 종합 토론회’였기에 법과 관련된 논의가 주를 이루었으며, ‘추급권(미술품 재판매권), ‘미술시장’, ‘위작 미술품’, ‘건축물의 미술작품 설치’ 등이 주제였다. 큰 흐름은 미술 거래의 투명성과 건축물 미술작품의 합리성이었다. 


청중의 대부분은 법조인, 공무원, 화랑 및 미술 유통 관계자, 미술 감정 관계자였으며, 정작 몫 없는 자인 예술가는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몫 없는 자의 존재가 흐릿한 곳에서 진행된 논의는 결국 미술작품의 ‘상품화’와 ‘화폐 계량주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 대다수 시각예술가는 작품을 거의 팔지 못한다. 아니, 판매와 무관하게 작업을 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미술시장’을 위한 ‘추급권’, ‘유통’, ‘위작’ 등의 논의나 ‘건축물 미술작품의 합리적 제도’에 대한 논의가 대다수 작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다. 이것은 사실 판매가 왕성한 소수의 예술가, 미술품 유통과 연관된 화랑 관계자나 유통업자, 감정업자 등과 건축물 미술작품 공모가 가능한 관계자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안이다.





이수경 <Translated Vase Nine Dragons in Wonderland>

 2017 조각 400×201×190cm 57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 - La Biennale di Venezia, Viva Arte Viva 

사진: 안드레아 아베주(Andrea Avezzu) Courtesy La Biennale de Venezia





정부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의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판매 지형을 확대하여 작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임을 안다. 혹은 작가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지속적인 창작에 도움을 주려는 것임을 안다. 하지만 이 도움은 결국 자본주의적 상품화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전자인 판매 지형 확대는 ‘작품의 상품화’를 부추길 여지가 다분하다. 후자인 예술가에게 일자리 제공은 작품 창작 시간 확보를 어렵게 할 뿐 아니라, 창작활동은 ‘일’이 아니라는 관념, 돌봄노동이나 가사노동처럼 대가를 바라면 안 되는 노동이라는 관념을 더욱 깊게 각인시킬지도 모른다. 미술은 문화 지형을 바꾸고 풍성하게 하는 정신적·감정적 노동의 산물이다. 화폐로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미술이다. 


하지만 새 정부의 미술진흥 중장기 정책은 결국 미술작품을 상품으로, 창작활동을 몫 없는 노동으로 전제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인상이 강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과 ‘예술인 산재보험료·사회보험료 지원’ 사업, 서울문화재단에서 작년부터 실행한 ‘민간 창작공간 운영 지원 사업’ 등 예술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사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어쩌면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튼, 미술진흥 중장기 계획이 대다수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찾아 주기 위해 자본주의의 상품화 논리를 벗어나 대다수 작가의 창작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업으로 계획되길 간절히 바란다. 

 


글쓴이 안진국은 동시대에 일어나는 다채로운 사건들의 이면에 흐르는 사유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인의 보편적 사유방식을 탐색하고 있다. 대학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으며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되어 미술비평을 시작했다. 현재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및 국제평론가협회(AICA)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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