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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26, Mar 2017

예술의 윤리학

Ethics of Art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윤리학과 미학은 전혀 다른 체질의 것이다. 규범·원리·규칙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학문과 ‘미(美)’라는 하나의 가치에 방점을 두는 학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이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이 분명 존재하며 그곳에서 논쟁이 발생한다. ‘예술이냐 외설이냐’부터 생명윤리, 종교윤리, 정치윤리 등 윤리학은 여러 형태로 예술에 개입한다. 예술 역시 인간의 태도와 인식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과연 ‘올바름’이라는 단어는 예술과도 어울릴 수 있을까. 반대로 예술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무한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지금, 윤리학을 소환하며 예술과, 당신에게 묻는다. 이 시대의 예술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느냐고.
● 기획·진행 이가진 기자

진기종 '자유의 전사' 2015 혼합매체 150×90×150cm(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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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국 미술평론가,남인숙 대구예술발전소 소장, 정수경 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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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의 윤리학: 광대와 광인이 생활인의 삶에 돌아왔을 때_안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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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윤리의 경계_남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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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지켜야 할 약속, 미술이라면._정수경





빔 델보예(Wim Delvoye)

 <TIM & Tattooed pigs> 

2006-2009 돼지와 사람피부에 문신 

Tim courtesy de Pury & Luxembo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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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발의 윤리학: 광대와 광인이 생활인의 삶에 돌아왔을 때

● 안진국 미술평론가

 


‘미메시스’와 윤리적 논란


최근 일반인에게 낯선 의학전문용어인 ‘카데바(cadaver)’가 윤리적 논란의 중심어로 국내를 한 차례 휘감아 돌았다. 해부실습용 시신을 일컫는 ‘카데바’가 회자된 것은 5명의 의사가 해부용 시신 앞에서 ‘인증샷’을 찍어 SNS에 ‘카데바’ 해시태그를 걸어 올린 사건 때문이다. 해부용 시신을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생명경시 태도와 그것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몰상식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다. ‘카데바’에는 죽음의 엄숙함, 기증의 숭고함, 인간 존중 등이 스며있다. 하지만 수술이 일상화된 의사에게는 그 의미가 옅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념사진을 찍은 의사들은 아마도 직업적 환경에 의해 무감각해진 윤리의식을 드러낸 극단적인 예일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성향도 작용했을 것이다. ‘카데바’ 사건도 결국 현실을 담는 시각매체인 사진이 발화점이 되었다. 지금까지 사진은 유사한 윤리적 논란을 자주 발생시켰다. 전문 사진작가도 윤리적 논란에서는 예외일 수 없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케빈 카터(Kevin Carter) <독수리와 소녀>를 들 수 있다


이 사진은 아프리카 수단의 참혹한 상황을 극적으로 찍은 사진으로, 오랜 굶주림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힘없이 무릎 꿇고 엎드려 있는 어린아이와 마치 그 어린아이를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듯 뒤편에서 아이를 노려보는 독수리를 함께 찍었다. 1993 3 23일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1면에 실린 이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작가에게는 다음 해 ‘퓰리처상(Pulitzer Prize)’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이후, 지속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어린아이를 사진에 담기 이전에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작가의 윤리의식을 비난한 것이다. 카터가 사진을 찍은 후 바로 그 아이를 구해서 구호소로 갔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윤리적 비난은 계속됐다.1)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저널리즘 사진이나 일반인의 사진은 그나마 윤리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저널리즘적 사진과 달리, 초과 현실을 다루는 현대미술에서 윤리는 암흑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때로 현대미술에서 윤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미술에서 윤리는 무엇인가? 현대미술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미술의 윤리와 표현의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다양한 의문이 떠오른다. 결국, 이 문제의 첫 단추가 되는 것은 현대미술가의 정체성일 것이다.





 

패트리시아 크로닌(Patricia Cronin) 

<Shrine for Girls, Venice, Hijabs and Photograph> 

2015 ‘제 56회 베니스 비엔날레(56th Venice Biiennale)’ 

사진 마크 블로어(Mark Blower) 





광대/광인(狂人)으로서 현대미술가, 카니발로서 현대미술


현대미술가는 본질적으로 광대이며, 광인이다. 과거 사회가 미술가에게 바라는 것이 세계를 아름답게 작품으로 보전하는 기술, 바로 기능적 차원의 ‘미메시스(mimesis)’였다면, 현대사회는 미술가에게 신선한 사유와 통념을 뛰어넘는 가치를 제시하길 갈망하는 눈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미술가를 생활인에서 유리시켜 일종의 대문자로서 ‘예술가’, 즉 독특하고 열정적이고 섬세하고 감정적이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소위 괴짜나 별종으로서 ‘예술가’라는 이데아 상을 형성해 놓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심연에는 사회적 관습에 대한 면제 특권까지도 부여하는 것 같다. 현대미술가는 이러한 이데아 상에 대한 사회적 압박을 받으며 소위 대문자 ‘예술가’에 몸을 맞추려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점점 더 생활인과 예술가의 간극을 벌리고, ‘새로움’, 혹은 ‘신선함’이라는 미명 아래 작가에게 사회 부적응자 놀이를 강요하기도, 금기(터부; taboo)를 깨뜨리라는 임무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강요와 임무는 현대미술가에게 광대/광인의 외피를 입히고 일상의 영역 바깥으로 이끌어낸다. 


만약 윤리의 반대항을 찾는다면, 반윤리나 비윤리보다 ‘카니발’이나 ‘터부(금기) 파괴’가 알맞을 것이다. 그리고 ‘카니발’과 ‘터부 파괴’의 주인공은 광대/광인인 될 것이다. 윤리가 사회적 행동규칙들의 총체인 ‘관습’, 혹은 ‘습관’을 뜻하는 ‘에토스(ethos)’를 어원으로 한다고 봤을 때, 공식적인 삶과 사회의 외부에 세워진 또 다른 세계로서 ‘카니발’(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신성한’, ‘기괴한’, ‘금지된’ 등의 뜻을 가진 ‘터부’(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파괴는 윤리를 위반하는 양상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교 지역의 사육제(謝肉祭)에서 유래된 카니발은 다가올 금욕적 상황, 40일 동안의 금욕적인 삶을 목전에 두고, 그동안 일상생활에 제약을 가하던 금기와 구속과 제재 등의 모든 터부를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축제였다





길버트 앤 조지(Gilbert & Geroge) <Black Jesus> 

1980 혼합매체 181×250cm Private collection





한마디로 일상생활의 질서가 무너지고 일상적인 논리가 전복되는 시기이며 공간이다. 왕은 거지가 되고 거지는 왕이 된다. 성직자는 모독당하고 광대는 추앙받는다. 현대미술의 생성 공간은 일종의 카니발의 공간과 유사하다. 이곳에서 현대미술가는 광대이며, 광인이 된다. 일상의 행동규칙인 윤리는 이곳에서 일시적으로 제거돼야 하는 어떤 것에 포함된다. 하지만 카니발은 일시적이다. 절대 영속되지 않는다. 사회 체제 외부에 존재하는 광대/광인도 카니발이 끝나면 인간적 조건 아래에서 생활인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카니발의 종료는 생활인과 예술가가 일치되지 않은 이중 인격적 상황에서 윤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듯하다


카니발적 생성 공간을 거친 현대미술은 카니발이 끝났을 때, 즉 예술적 사유나 예술적 표현의 시간이 끝났을 때 결국 일상과 조우하게 된다. 일상의 규범에 예술적 사유나 작품이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예술가는 생활 언어와 예술 언어의 불일치를 겪게 되는데, 만약 예술가의 자의식이나 언어가 생활인에 가깝다면 일상의 규범적 언어(더 좁게는 윤리적 언어)로 카니발의 열기를 정제하여 예술작품으로 조직할 것이다. 하지만 생활인과 예술가의 간극이 크고, 대문자 예술가의 이데아 상이 뚜렷한 작가는 카니발의 열기를 정제하지 못한 채 ‘표현의 자유’라는 형태로 예술적 사유나 작품을 일상에 ‘시연(試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결국 윤리적 논란을 일으킬 잠재성을 가지고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윤리적 논란; 진리가 아닌 당위적 명제


윤리는 ‘당위적(當爲的) 명제’로, 옳고 그름의 판단만 가능할 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윤리는 ‘진리’가 아닌 ‘당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미술의 윤리적 논란은 분명한 판결로 매듭짓지 못한 채, 대부분 ‘표현의 자유’와 대치되는 상황에서 갑론을박하게 된다. 생활인과 달리 예술가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가능한’ 사회적 규범에 대한 면책 특권이 암묵적으로 주어진다. 하지만 이 면책 특권은 경계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통용되는 것도 아니며,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윤리적 논란을 잠재울 해법으로 온전히 기능하지는 못한다. 특히 공적 자금의 지원된 상태에서 발생한 윤리적 논란은 표현의 자유보다는 공공적 가치가 쟁점을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다대표적으로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 <오줌 예수(Piss Christ)>(1987) 사례를 들 수 있다. NEA(국립미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전시된 작품인 <오줌 예수>는 예수가 달린 십자가상을 오줌통에 넣어 찍은 사진 작품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미국 의회와 표현의 자유라는 미국 미술계의 상반된 견해가 서로 대립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국 의회가 권력으로 압도했다. 그들은 다음 해 NEA 삭감안을 통과시켰고, 이 기금을 정치적, 이념적, 외설적, 사회적 이슈를 표현한 작품에는 지원하지 않겠다는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예술의 검열’ 문제가 다시 한번 제기되기도 했다


<오줌 예수논란의 핵심은 신성모독이었다신성모독은 미술의 윤리적 논란을 일으키는 쟁점 중 하나로그 외에도 생명경시와 외설관습 등이 윤리적 논란의 주요 이슈라 할 수 있다신성모독은 미술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논란이다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9번째 계시(The Ninth Hour)>(1999)도 그 한 사례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에 맞아 쓰러진 순간을 그대로 재현한 이 작품은 폴란드 의회는 물론 교황청으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또한 크리스 오필리(Chris Ofili) <성모 마리아(The Holy Virgin Mary)>(1996)도 들 수 있다이 작품은 1998년 뉴욕의 <센세이션(Sensation)> 순회 전시에서 코끼리 똥과 포르노 이미지로 뒤덮인 흑인 여성으로 성모마리아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줄리아니(Rudy Giuliani)에게 작품 철수 명령을 받았다.2) 미술의 윤리적 논란에 자주 거론되는 또 다른 중요 쟁점은 생명경시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La Nona Ora> 1999 Résine polyester, gomme de silicone,

 pigment, cheveux naturels, tissu, vetements, accessoires, 

pierre, moquette 사진 제노 조티(Zeno Zotti) Maurizio Cattelan

 <Not Afraid of Love>(2016.10.21-2017.1.8, 파리조폐국설치 전경





특히 생명경시의 경우, 그 대상이 인간과 동물로 나뉘는데, 인간의 경우에는 사회윤리와, 동물의 경우에는 생명윤리와 관계 맺는 경향이 있다. 2004년에 밀라노의 공공광장인 마지오24(Piazza ⅩⅩⅣ Maggio)에 설치한 카텔란의  <목매단 아이들(Hanging Kids)>-큰 나무에 소년 인형 3개를 매달아 마치 소년 3명이 목매달고 자살하거나 교수된 장면처럼 연출했다-이나, 1997 <센세이션>전에 등장한 마커스 하비(Marcus Harvey) <마이라(Myra)>(1995)-어린이들의 손바닥에 물감을 발라 찍어 희대의 어린이 연쇄살인범의 대형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회윤리와 관련된 생명경시 논란을 일으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미술에서 생명윤리와 관계된 생명경시 논란은 동물 학대와 트랜스제닉 아트(transgenic art, 유전자 합성을 이용하는 바이오 아트의 한 부류)에서도 발생하곤 한다. 동물 학대에 따른 윤리적 논란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손꼽힌다. ‘상어’란 약칭으로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1991)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작품을 제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진짜 생명인 나비를 붙인 페인팅이나 동물들을 절반, 혹은 10조각 이상으로 나눠서 작품화하는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해 동물보호협회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트랜스제닉에 따른 논란은 에두아르도 카츠(Eduardo Kac) 작업이 대표적인데, 알비노(albino) 토끼에게 초록색 형광 단백질인 GFP(Green Fluorescent Protein)를 이식하여 <GFP Bunny>(2000)라는 형광토끼를 탄생시킨 사례나, 자기 혈액의 DNA를 피튜니아(Petunia) 식물에 이식해 자신의 피부와 유사한 붉은 꽃잎을 가진 <에두니아(Edunia)>(2003-2008)를 탄생시킨 사례는 유전자 사용에 대한 생명윤리 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국내에서는 근래에 미술에서 정치적 윤리성이 쟁점화되는 모습도 보인다. 작년에 미 대사관 피습을 다룬 홍성담의 <김기종의 칼질>과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을 소재로 한 이구영의 <더러운 잠>이 대표적이다


이는 신성모독과 유사한 형태로 정치적 신성의 모독이 논란을 일으킨 사례로 보인다논란의 작품들이 성역으로 여겨지는 ‘미국’과 ‘대통령’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느낀 듯하다. 특히 <더러운 잠>의 경우 페미니즘 이슈까지 개입되면서 큰 사건으로 증폭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봤을 때, 이 작품들은 ‘서울시립미술관’과 ‘국회 의원회관’이라는 장소의 특수성과 정치적 상황이 결합하면서 논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논란이 윤리적 범주와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 외에도 외설과 관련된 미술의 윤리적 논란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익숙한 논란이다.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 <Piss Christ> 

1987 Cibachrome, plexiglass, wooden frame 

40×60 inches Courtesy of the artist and Nathalie Obadia gallery

 




교체와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


광대/광인의 외피를 입고 대문자 ‘예술가’를 꿈꾸는 현대미술가에게 윤리는 ‘신선함’과 ‘새로움’을 발현하기 위해 전복해야 할 터부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윤리의식이 존재하지 않아야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카니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권위를 조롱하는 것만을 추구하는 카니발에 대해 “천박한 보헤미안적 이해”라고 했다. 그는 긍정을 위해 부정하고, 존중을 위해 조롱하며, 상승을 위해 하강하는 것이 진정한 카니발로 봤다. 모든 부정적 의미가 긍정적 의미와 등을 맞대고, 상생과 공존의 원리가 존재하는 공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카니발을 ‘교체와 변화, 죽음과 갱생의 파토스’라 부른다. 부활과 소생의 축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금기의 전복과 표현의 자유를 ‘영감’으로 포장하여 무책임을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활세계를 무시하고 스스로도 생활세계에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홀림의 상태일 뿐이다. 카니발이 끝나면 생활인의 언어, 윤리적 언어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홀림이 아닌 신념을 지닌 행동이라면 모르지만, 자신의 자유가 타인이나 사회에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각주]

1) 케빈 카터가 퓰리처상 이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함으로써 이 사진은 사진 윤리의 대표 사례로 거론된다. 비난을 못 이겨 자살을 택했다는 식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나 주변의 여러 정황으로 봐서 꼭 이러한 비난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2) 다행히 당시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이 전시를 강행했지만, 시장은 미술관 지원금 중지라는 강수를 두면서 문제가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정치 공방으로까지 확대됐다.

3) 결국 <목매단 아이들>은 전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42세의 한 남자가 나무에 올라 인형 2개를 잘라 떨어뜨렸고, <마이라>는 살인마에게 희생된 아이들의 가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분노한 관람객이 달걀과 물감을 던져 작품이 손상되었다. 그런데도 두 작품 모두 표현의 자유라는 우산 아래 전시가 진행되었다.

 

 

글쓴이 안진국은 동시대에 일어나는 다채로운 사건들의 이면에 흐르는 사유체계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인의 보편적 사유방식을 탐색하고 있다. 대학에서 판화와 국어국문학을 공부했으며, 2015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에 당선되어 미술비평을 시작했다. 현재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의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및 「국제평론가협회(AICA)」의 회원이다.

 



오노 요코(Yoko Ono) <War Is Over> 1969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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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윤리의 경계

● 남인숙 대구예술발전소 소장

 


1. 일련의 사건들


근자에 창작활동과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이슈가 공론의 장으로 떠오르는 사례가 비교적 많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회적 통념에 반하거나 정치적 이념과 첨예한 갈등을 빚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인데, 사실상 작품의 내용과 무관한 일이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해 정작 중요한 내용이 온갖 비난 속에 묻히기도 한다. 소아 성애폭력 범죄자의 초상을 아이들의 손으로 프린팅해서 거대한 작품으로 만든다거나, 교황이나 십자가, 예수의 형상을 불경스럽게 다루거나 카인(Cain)과 같은 악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정밀 묘사한다든가, 하나님의 얼굴을 물질로 표현하는 등 종교적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수치심과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성적 차별을 노골화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에 해당되는 사례들은 사실상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가볍게는 축음기를 들은 우리의 선대들이 예인의 목소리를 기계에 의탁하는 그 천박함에 진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축음기의 경우처럼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하나의 공동체나 특정 인물 등이 뿌리째 흔들린다거나 심각한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나치(Nazis)에 의해 자행된 소위 ‘퇴폐예술’ 청소 행위라든가,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죄의식 없이 작품에 표명함으로써 적대라고 설정한 대상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경우, 분서갱유처럼 정치적 이념에 의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애초에 말소하려는 행위 등등.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은 사소하거나 심각하거나 그 대상, 예술작품이나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의 자유 그리고 그 타당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사실, 설명하는 문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얼마나 타당한가 하는 점도 입증되어야만 한다. 내가 장미를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추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장미를 멋있고 아름답다고 틈만 나면 주장하고 설득하고 싶어진다





윌리엄 켄트리지 <I am not me, the horse is not mine>

 2008 Installation of 8 film fragments

 




이점을 확대해보면, 개인과 사회, 혹은 개인과 국가가 맺고 있는 협정의 근간을 무엇이 뒷받침하고 있는지와 같은 문제이다. 물론, 개인과 국가, 개인과 사회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법’이지만, 이 법 역시 호주법이나 간통죄의 사례에서처럼 한 공동체의 심기와 분위기, 통념을 적극 반영해가며 변해가는 것이다. 심지어는 안티고네(Antigone)처럼 실정법을 어기고 인륜을 좇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안티고네에게 쉽게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는 한 공동체나 집단이 유지되기 위한 최종 판단의 근거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모두 연결된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근거 있는 조정과 설득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권한을 국가가 제한할 경우, 이는 정당한 논리가 있어야만 하듯이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과 자유의 권한을 제한하거나 양보할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무슨 근거일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돈한 이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이다. 칸트는 판단의 능력을 ‘취미(趣味; taste)’ 개념으로 정리하여, 한 개인이 느끼는 쾌감이나 불쾌감, 이러한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가 어떻게 객관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장미가 좋다는 것을 어떻게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관념적인 질문이 전혀 아니다. 이런 질문이 아니라면, 나는 장미가 좋고 너는 백합이 좋으니, 그냥 서로 다른 채로 인정하자고 하면 되지만 이는 곧 상대주의에 빠져 아무런 설명을 할 수도 없거니와 이 문제와 연관된 문화, 예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논의할 수 없게 되기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험 끼리 내통하는, 천박을 벗어날 수 없는 길이라는 점을 잠깐만 되돌아봐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역사 속에 많은 증거가 산재해 있다. 아무튼, 칸트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사태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일까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는 무엇보다 인간이 ‘감성적인 존재’라는 점을 그 시대정신으로 드높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칸트는 ‘이것은 아름답다’는 논증을 4가지 계기(, , 관계, 양상)의 분석을 통해 수행한다. 결론은 경험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 주관적인 입장을 갖지 않는다면, 말하자면 내용을 텅 비우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발생되지 않을 것이므로 누구든 흔쾌히 합의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은 아무 성질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사심 없이 대할 수 있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이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 안장이 소머리가 되듯이 말이다.





미야기 후토시(Miyagi Futoshi) <Flower Names> 2015 

Single-channel video with color and sound  20min. 59sec. 





그렇다면, ‘그 무엇으로 될 수 있는 그것’에 대해 우리 모두가 어떻게 용인할 것인가 하는 점이 남는데, 이는 마치 가상의 인물인 사악한 ‘이야고(Iago)’가 어느 시대이든 실존 인물로 존재할 수 있듯이, 이러한 방식으로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 현실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서 기꺼이 용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능한 형식이나 설득력 있는 형식임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주관적인 사태는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객관적인 사태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형식은 우리가 이해관계에 얽힐만한 내용이 없는 텅 빈 형식이지만 말이다이를 위해 요청한 것이 바로 ‘공통감(common sense)’이다. ‘이것이 아름답다’는 이제 경험의 영역으로서 주관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공통감을 토대로 객관의 사태로 이해될 수 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다. 경험적인 존재인 우리가 경험을 뛰어넘게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는 경험의 존재에 당위가 개입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취미판단의 객관적 근거로서 공통감이 요청되고, 공통감은 취미판단의 당위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경험이 전해주는바, 그 내용을 우리가 이해하고 보다 높은 관점에서, 즉 추상화의 길을 따라 초월의 관점에서 이를 다시 한번 정돈하는 일을 인간이 할 줄 안다는 것인데, 안티고네가 죽음을 불사하고 인륜을 따른 것은 보다 높은 관점에서 관계를 바라보고, 당위로써 행위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경험과 무한(혹은 초월) 이 양자의 사이를 왕래한다는 뜻으로서 경험 속의 인과관계 사슬이 당위의 개입으로 끊어지고 새로운 행위의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취미판단은 이 경험과 당위 양자의 관여를 받으며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자전거 안장이 원인이 되어 자연스레 그 결과로서 소머리가 형성되지는 않는 것처럼, 인과율의 필연의 사슬에서는 어떤 선택이나 행위의 근거가 자연스레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넘어서는 것에 비추어 그로부터 전해오는 명령을 토대로 할 때, 어떤 행위나 선택의 근거가 설명되는 것이다. 이를 당위의 문제라고 하며, 당위의 문제는 바로 윤리의 핵심문제이다. 취미판단 역시 공통감이라는 당위의 원리가 개입되는 것이고, 문화나 예술 역시 필연의 입장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변종들이다.





장샤오강(Zhang Xiaogang) <My Ideal> 

청동 조각(2008)과 캔버스에 유채(2003-2008, 279×500cm)

  Zhang Xiaogang





그런데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 내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경험의 내용들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 감정도 갖지 않는 텅 빈 것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적극 고려했던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 Georg Gadamer)는 이 지점에서 칸트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다시, 역사에서 지혜를 빌어 적극적으로 역사 내 존재로서 혹은 경험의 존재로서 우리의 판단근거를 정돈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주장한 바, 자본주의 시대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경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직업군이 농부와 어부라고 했던 말을 유념해볼 필요가 있다. 칸트처럼 한 자리를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지혜를 갖추는 농부, 멀리 낯선 곳을 탐사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어부, 이 둘의 경우를 예로 들어 경험을 기반으로 한 설득력이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니는 객관적인 타당성으로 인한 허용과 합의가 얼마나 인간성의 이해에 필수적인가 하는 점을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 가다머는 경험의 내용을 충분히 인정하고 확장하면서도 당위로써 선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3. 가능한 세계의 구성과 역사적 상상력


이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잠시 정리하고 가다머 말을 들어보자. 창작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생명의 문제, 성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 등 윤리적인 문제와 충돌할 경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말하자면 본 글은 예술과 윤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을 환기하고,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한 뿌리라는 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 예술에 당위의 문제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다머에게 문제는 인간이 경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영역으로부터 구축된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과 초월의 관점 즉 지성의 눈으로 제출된 당위의 문제를 어떻게, ‘경험의 영역’에서 만나게 할까 하는 점이 가다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경험의 내용이 관여되면서도 지성의 관점에서 선택하여, 이로부터 어떻게 주관을 넘어 객관의 문제로 제출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해결하려는 것이 가다머 자신이 창시한 해석학의 핵심내용을 이룬다. 해석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것이 최선이고, 이 지평을 어떻게 넓혀갈 것인가,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 설명의 관건인 것이다. 해석학적인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기 위해 가다머는 경험적인 영역과 초월적인 영역 양자의 작용을 받아들이되, 우리가 경험의 영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달리한다. 바로 전통과 권위의 문제를 적극 개입시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경험을 조회하기 위해 전통과 권위를 호출하여 해석의 근거를 넓혀간다는 착상은 다시 한번 경험에 갇히게 될 뿐 아니라, 전통의 무게에 현재의 문제가 처분당하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파행적인 방식이 아닐까하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을 비판했던 대표적 예는 장례식장에 참관한 인상기에서, 과거라는 시간의 퇴적이 얼마나 현재에 불감한지를 통찰한 발터 벤야민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가다머에게 전통과 권위를 통해 해석의 지평을 넓혀간다는 점은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마이크 파(Mike Parr)<Primitive Gifts>(2006.4.11) 

Colour photograph from closed performance 

The Lab Studio, Waterloo, Sydney Private Collection 

퍼포머 마이크 파(Mike Parr) 사진 폴 그린(Paul Green) 

포토샵 펠리시티 젠킨스(Felicity Jenkins) 메이크업 

치즈코 사이토(Chizuko Saito) 





현재 경험을 해석하는 문제는 바로 지금까지의 전통과 권위를 조회함으로써 해석의 경계를 지속해서 넓히는 문제인데, 이는 우리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으로서 경험을 통해서만 비축되는 ‘노하우’ 즉 지혜의 문제가 경험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다머가 전통과 권위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지혜’이며, 이것이야말로 경험 내부에서 취미판단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시 돌이켜보면 축음기 때문에 화를 냈던 분들은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비축된 지혜로부터 판단의 근거를 취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고여 있던 불감증의 고정관념으로부터 판단을 끌어냈기 때문에, 현재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상력의 구성에 실패했던 것이다엄밀하게 말하면, 역사적 상상력의 최전선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 전통과 권위에 조회해서 결국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지혜를 토대로 현재에 작용하고 있는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가다머와 함께 다시 안티고네로 돌아가 보자. 안티고네는 세속 경험의 질서, 크레온(Creon)의 법을 인륜의 법 즉 전통과 권위로부터 다시 조회하여, 그 점을 신의 명령으로 성찰한 끝에, 그 당위의 명령 앞에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실의 크레온 법의 위반으로부터 안티고네는 실정법 외부에서 아직 법의 옷을 입지 않은 가능한 영역을 인륜의 빛으로 밝히고, 그곳으로 걸어가는 행위를 당위적인 명령으로 받들었던 것이다예술작품은 전통을 대변하든, 새로운 경험을 대변하든, 특정 주의·주장을 실어 나르든 어떤 경우든 선택과 행위의 산물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필연의 질서 외부에 있다. 또한 예술작품과 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예술가는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의 치외법권에 있는 자들로서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의 근거를 따져 묻는 실험의 순례를 거듭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윤리적인 것이 개입되지 않은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예술과 윤리는 바로 이런 관계로 한 묶음이자 한 뿌리라 할 수 있다. 

 


글쓴이 남인숙은 경북대학교 자연과학대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詩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며, 결국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미학과로 진학해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주제는 「라깡의 주체이론과 현대미술」로, 이를 정리한 저서를 준비 중이다. 예술의 근본문제와 공공성의 문제에 주된 관심이 있고 다수의 비평문, 논문과 공저가 있다. 현재 대구예술발전소 소장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동체에서 예술의 기능이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삼고 있다.

 


 

김구림 <삶과 죽음의 흔적>

(2016.8.30-10.16,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설치 전경 






Special feature

여전히 지켜야 할 약속, 미술이라면.

● 정수경 미학자

 


“예술은 행복에 대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미술의 처지를 이보다 잘 나타낼 말이 또 있을까? 독일의 미학자 아도르노(Theodor Adorno)가 남긴 이 말은 비록 미술을 특정한 진술은 아니었지만, 사회에 대한 미술의 책임 그리고 그 책임과 연관해 미술이 처한 난국까지 선명하게 압축한다. 약속이란 이행의 책임을 부과하는 사회적 행위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했다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예술의 사회적 책임이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단언한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예술이 했다던 행복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누가 어떤 약속을 했던 것이며, 그것은 어쩌다 깨지고 만 것인가? 한 번 깨어진 그 행복의 약속은 이제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는, 돌이킬 수 없이 엎질러진 물과도 같은 것인가?



약속의 시작


이 약속을 이해하려면 사회로부터 공적 가치를 승인받은 대상/활동으로서의 미술과 가치중립적인 대상/활동으로서의 회화, 조각 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미학 자체가 낯선 우리로선 그 구분이 왜 필요한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서양미학사는 ‘미술’이라는 명예로운 분류 개념이 16세기에 와서 싹텄고 18세기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그 전까지 회화는 회화, 조각은 조각이며, 대단해봤자 한순간을 즐겁게 해줄 눈요깃거리를 만드는 천박한 기술(vulgar arts)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는 논외로 하자.) 그리고 그 천박한 기술의 반대편에 인간을 진정한 즐거움과 지고의 삶으로 인도해줄 구원의 기술, 리버럴 아트(liberal arts)라 불리는 일곱 가지 인간 활동이 있었다. 리버럴 아트는 자유민의 학예인 동시에, 실존적 제약에 구속된 인생의 구원과 해방, 즉 유토피아적 삶을 지향하는 활동, 그러한 삶으로의 일보전진을 보장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서 오래도록 ‘행복을 약속하는 기술’의 주어는 미술이 아니라 리버럴 아트였다


따라서 미술이 행복에 대한 약속이 되었다는 것은 미술이 찰나의 말초적 즐거움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진정한 즐거움과 지속적 좋음을 주는 기술, 즉 제8의 리버럴 아트가 되겠노라 서약하고 그 서약을 미술계 밖 사회가 추인했음을 뜻한다. 그것이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생긴 일이었다. 알베르티(L.B. Alberti)의 『회화론』(1436)에도 일찌감치 등장했던 제8리버럴 아트의 개념이 “미술은 행복에의 약속”이라는 명제의 역사적 시원인 셈이다. 예술 개념의 대중적 확산의 보증서 격인 달랑베르(dAlembert)의 『백과사전』 서문(1751)은 미술을 포함한 예술 일반(Beaux-Arts)이 마침내 리버럴 아트의 새로운 편제 속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미학적으로 보자면 이 서약, 리버럴 아트로서 ‘행복에의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서약이 한갓된 그림과 미술작품으로서의 그림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다. 그런데, 인간을 구원하고 행복으로 이끄는 기술로서의 미술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회화, 조각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마리 레이드 캘리(Mary Reid Kelley) 

<Masks from Priapus Agonistes> 2013

 Painted neoprene, synthetic fibre wig

 

 


오래된 약속


미술이 리버럴 아트가 되기로 했다는 것은 한편으론 찰나적인 즐거움 대신 지속적인 즐거움 affection1)을 추구하는 기술이 되기로, 다른 한편으론 개인적 행복을 넘어 공동체적 행복을 추구하는 기술이 되기로 서약했음을 뜻한다. 이 원대한 서약의 첫 세대는 인류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 삶, 그 유토피아적 상태를 시각적으로 선취하여 보여줌으로써 미술을 개인적인 행복뿐 아니라 공동체적 행복까지도 약속하는 기술로 만들려 했다. 이는 실은 니체(F.W.Nietzsche)가 고대 그리스 조형예술에서 이미 감지했던 오랜 꿈이기도 했다. 비루하고 척박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라는, 영원히 해소될 수 없을 우호적인(!) 조건 속에서 미술가들은 누구보다 명민한 시각적 상상력을 가지고 인간과 인생과 그 모두를 둘러싼 세계의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감각적이고 환영적인 이미지로 구현해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현실과 닮았으되 현실에는 없는 미술의 아름다움이 현실의 부조리와 힘겨움을 견디고 극복하여 인류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노력을 경주하도록 하는, 결승점에 꽂힌 깃발과도 같은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약속의 파열


그러나 미술이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현하면 할수록, 인류가 단일한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는 뜻밖의 실상 또한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유토피아는 머릿속에 막연한 이념으로 존재할 때에만 모두의 유토피아일 수 있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가 꿈꾸었던 보편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듯이, 근대는 진작부터 유사성 논리에 근거한 본질주의보다는 차이의 논리에 근거한 실증주의를 더 큰 동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근대 개인주의의 탄생과도 궤를 같이하는 이 차이의 감각은 인류라는 거대 공동체 개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인류 보편’이라는 단일 범주가 민족과 인종, 계급 등에 의해 분화되면서 행복에의 약속은 복잡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국면, 즉 공동체의 분화 혹은 분열은 지금까지도 사회와 예술을 아우르는 윤리 문제의 핵이다. 공동체주의가 약화되고, 인류가 다양하게 차이 나는 주체들로 나뉘면서 보편적인 아름다움에 기초한 행복의 약속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속을 깨뜨린 것은 차이가 만들어낸 균열이 아니었다. 차이가 불가피하다면 균열 또한 불가피할 것이므로, 이는 약속의 제한 조건을 형성할 따름이다약속을 정말로 훼손하고 망가뜨린 것은 균열이 아니라, 그 균열을 억지로 봉합하여 균열을 감추려 한 전체주의였다. 행복에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라는 아도르노의 원망 어린 질책의 배경이 아우슈비츠(Auschwitz)의 홀로코스트(Holocaust)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인종이 지닌 차이들은 수평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이분법적인 본질주의의 위계질서 속으로 강압적으로 수렴되어 억압되었을 뿐 아니라, 미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윤영석 <Bone Gun> 2014 인조대리석, 

아크릴 118×30×79cm 자작나무합판좌대

(50×50×90cm) 





게다가 강요된 통합조차도 제대로 성취되지 않으면서 미움과 혐오에 의한 테러가 횡행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조차 없었던 것이다. 끔찍하게도, 테러는 왜곡된 민주주의 절차와 사이비 과학적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어 테러의 주체들은 죄의식과 거리낌조차 없이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이 리버럴 아트가, 예술이 그토록 꿈꿔왔던 “행복에의 약속”이 깨진 장면이다그러나 “예술은 행복에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라는 명제는 한 가지 사태를 더 함축한다. 예술이 바로 그러한 전체주의의 만행에 부역하고 복무했다는 사실이다. 뜻밖에 매우 고전적인 취향을 지녔던 히틀러(Adolf Hitler)는 그의 그 끔찍한 유태인 혐오, 그 무자비한 군국주의적 테러리즘을 순수 게르만 민족의 이상국가인 대게르만제국의 건설이라는 유토피아적 청사진으로 은폐하면서 미술과 영화, 다양한 예술 매체들을 동원하여 전방위적인 선전선동에 힘을 쏟았다


지금껏 선전선동의 대가로 꼽히는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조력 하에 그의 전략은 대다수 독일국민들을 눈멀게 하는 데 성공했고, 종전 이후로도 오랫동안 독일미술가들은 전범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인류를 해방하고 구원하여 행복으로 이끌리라 서약했던 예술이 인류를 대참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드는 조력자가 된 것이다. 8리버럴 아트 1세대의 서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예술은 행복에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폐허에서 건진 것이 심미적 예술은 정치의 심미화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잘못된 정치 이념에 부역할 수 있다는, 벤야민(Walter Benjamin)같은 비판적 지성들의 뼈저린 반성적 성찰이었다. 심미적 미술에 대한 다소 부당한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도 덤으로 남겨졌다.

 


새로운 약속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물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불가능하다”고 화답했다. 예술의 목적성은 재고되어야 했고, 그리하여 “행복에의 약속”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새롭게 갱신되었다. “전체주의에 전면전을 선포하라” 전체주의의 표면상으로만 매끄러운(seamless) 봉합에 저항하고 그 억지 공동체주의에 파열을 일으켜 전체주의의 환상을 깨는 것이 타의에 의해 통합된 수많은-실은 절대 다수일-차이의 주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새로운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약속의 제2세대는 다소 거칠고 공격적인 양상을 띤 미술을 약속의 증표로 내밀었다. 그들은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을 그만두었다반대로 아름다운 가상들이 문제 많은 현실상을 가리고 은폐하는 스크린 노릇을 할 뿐임을 깨달으면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기법 역시 예술에의 몰입이 현실의 문제를 망각하게 하는 효과에 대한 반성에서 탄생했다)그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아 실상을 놓치게 만드는 표피적 아름다움을 공격했다. 형식적 조화와 아름다움은 파괴되었고, 주제는 시적이고 예술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이고 정치적인 쪽으로 옮겨졌으며, 억압적인 기존 질서를 파열시키기 위해 때로는 외설이라는 자극적인 경로를 경유하기도 했다. 결과물로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가히 당황스럽고 낯설기 짝이 없는, 많은 경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유형의 작품들이다. ‘이것이 과연 미술인가?’라는 질문은 최근 미술에 관해 가장 많이 던져진 물음일 것이다. 





박불똥 <코火카炎콜甁라> 1988 포토 콜라주 

 




아름다운 가상, 아직 도래하지 않은 유토피아 미래상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그 가상의 베일에 가려져 소외되고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문제적 상태로 보는 이들을 이끌려는, 그리하여 작품 대신 우리 사는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건전한 의도와 맥락은 작품의 거칠고 공격적인 외양에 가려 잘 전달되지 않았다. ()의 형식과 공격적 내용은 그들을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 정치적 반달리스트로 간주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작품이 다시 한 번 스크린이 된 것이다. 이번에는 그들의 의도를 가리는 달을 보라는 부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부처의 손가락만 보는 이들이 있었듯이, 추의 전략을 통한 새로운 약속의 실천들은 약속의 깊은 속내를 보게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이들의 문제로만 치부해도 좋을까? 그렇게 한다면, 전체주의에 전면전을 선언한 예술가들이 전체주의자들의 반만큼도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 셈이다. 옛 성현들이 그토록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하였거늘.

 


더 새로운 약속을 위하여


미술에게 여전히 사회를 향한 윤리적 책임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행복에 대한 기술이 되기로 했던 그 약속, 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지켜질 수 없을 지도 모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래도 애쓰는 것일 테다. 하지만 애씀 자체만큼이나 ‘어떤 식으로’ 애쓸 것인지가 중요하다. “아름다운 가상은 눈속임이다! 우리는 그 속임수를 꿰뚫고 진실을 마주보아야 한다!”고 제아무리 바른 말을 외친들, 그 외침이 공격적이고 추한 작품을 보는 이들의 느낌과 생각을 쉽사리 바꾸어주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선전선동이, 그리고 그 흐름을 이어받은 선진자본주의의 광고 전략이 인간 본성을 꿰뚫어보고 영악해지는 만큼 차세대 서약자들도 인간에 대한 보다 솔직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욱 영리해져야 한다


인간에 대한 솔직한 이해란 무엇일까? 인간이 대체로 추를 싫어하고 차이에 대한 관용과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행복의 새로운 약속이 기만적 스펙터클의 파열, 잘못된 봉합의 해체에 있다 하더라도 작품은 ‘미적(aesthetic)’이어야 한다‘미적’이라 함은 보기에 예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마음이 행복을 향한 마음의 반향 affection을 지킬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작품의 거친 외면이 약속의 방향성을 상실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직설적인 추와 공격성으로 출발하여 그리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러려면 굉장히 강력한 매혹이 동반되어야 한다. 라캉(Jacques Lacan)이 ‘미끼(lure)’라고 불렀던. 라캉이 암시하는 더 나은 전략은 좋은 추로 나쁜 미를 공격하는 대신 미가 미를 공격해 스스로를 허물게 하는 내파(implosion)의 전략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작가들의 몫이다.





토마스 도일(Thomas Doyle) <Infinite regress> 

2015 혼합매체 38×186×80inches




또한 차이에 의한 공동체의 균열이 불가피하고 서로 다른 다양한 행복 추구 방식들은 충돌을 낳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에겐 관용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인간이 차이를 견뎌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 즉 차이의 수용에 관한 인간 의식의 임계점(liminal point)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똘레랑스(tolérance). 그 일차적 의미는 관용과 인내지만, 우리는 그 단어가 허용오차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임계점에 대한 적절한 이해야말로 관용을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이에 대한 인식 부족이 표현의 자유와 관용을 손쉽게 한 쌍으로 묶어 방종을 낳은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문화적 테러리즘을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문화적, 민족지학적, 인종적 차이의 무한 수용을 당위로 제시하는 미술은 또 다른 유형의 전체주의, 쁘띠-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미술의 “행복에 대한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러한 미술에겐 한 가지 윤리적 책임이 더 남아 있는 셈이다


그것은 행복을 위한 기술에는 보편 기술이 없으며, 다만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기술만이 가능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미술이 갖추어야 할 윤리의식이며, 따라서 과도한 자기 정당성에 도취하여 타인을 공격하는 불행의 기술을 일발장전하지 않는 절제와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그것이 미술이 품격 있는 저항을 통해 여전히 행복을 위한 약속을 지키고자 할 때 필요한 애씀 아닐까이제 오래된 약속과 새로운 약속의 변증법적 종합이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매혹이 매혹을 무너뜨리게 하는 방식,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반성케 하는 방식. 화려함이 화려함을 의심케 하는 방식. 언캐니(uncanny;unheimlich)가 최근 서구미술의 개념적 키워드가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 같다. 낯익은 것으로 낯익은 것을 전복시키는 그 영리한 방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실천은 작가들의 몫이다. 

 

[각주]

1) affection은 그 자체가 즐거움을 뜻하는 개념은 아니다. affection은 통상 정감(情感)으로 번역하는 개념으로서, 희노애락의 결을 다 품을 수 있지만, 그 개념이 어원상 함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체험의 순간을 지난 후 뒤따라 일어나는 정서적 반향, 영향’이라는 것에 있다. , 어떤 대상은 순간적으로는 강렬한 즐거움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대상은 처음에는 별 즐거움을 주지 못하거나 불안이나 불쾌를 주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새록새록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다른 어떤 대상은 처음에도 즐거움을 주고, 시간이 지나면서도 계속 그 즐거움의 결을 유지한다. 서양미학은 affection의 차원에서 좋음을 지닌 후자의 두 경우를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미적 쾌’로 구분해왔다. 그런 의미를 전하기 위해 필자는 지속적 즐거움 뒤에 affection을 덧붙여 보았다.

 


글쓴이 정수경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J.-F.리오타르의 숭고미학과 아방가르드미술론」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등에서 미술이론을 가르치면서 비평과 전시기획 활동을 겸하고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삼성미술관 등의 초청을 받아 다양한 미술관 교육프로그램에도 참여하고 있다. 공저로 『생각하는 십대를 위한 토론 콘서트 : 예술』(꿈결, 2016), 공역서로 『미술을 넘은 미술』(북코리아, 2015)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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