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 선택
“이것은 뿔에 대한 전시이다. 이것은 뿔에 대한 전시가 아니다. 우리는 ‘형태’라는 단어를 ‘뿔’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획은 형태가 도출되는 ‘선택’들에 대한것이다. 이 전시에서는 ‘( )의 선택’들을 보여준다. 이 선택들을 가시화하는 건 가능한가?”
<뿔의 자리> 서문 재인용, 김한나, 노은주, 윤지영, 전현선 기획 노트 중
<뿔의 자리>는 아르코미술관에서 매년 진행하는 작가/큐레이터 워크숍 참가자 중 같은 고민을 공유하는 네 명의 작가(김한나, 노은주, 윤지영, 전현선)의 기획으로 진행된 전시이다. 전시의 기획자이자 참여작가인 이들은 워크숍을 통해 각자의 작업에서 우연히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등장하는 ‘뿔’을 발견했다. 서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뿔’이라는 공통된 형태를 발견한 후 이들은 각각의 ‘뿔’이 등장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매번 설명하거나 보편적으로 이해시킬 수만은 없는‘뿔’을 좌우하는 자신의 선택은 어떤 것들인지 질문했고, 그 대화를 이번 전시에 담았다. ‘뿔’이라는 단어로 치환된 시각언어의 결과적 ‘형태’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전시 서문에도 언급했듯 너무나도 근본적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전면에 다루기에는 진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형태를 위한 선택들을 전시라는 가시화된 매체, 또 다른 ‘뿔'로 형태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이를 위해 작가와 작가가 초대한 기획자 장혜정이 각자 나름의 기준에 따른선택을 반복하면서 이 과정을 어떻게 전시-또 다른 ‘뿔’로 구조화하는지 그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전시는 크게 1, 2층에 전시된 네 명의 작가들이 ‘뿔’을 더듬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시도로서의 신작과 작가들이 선정한 10명의 필자가 이들의 요청에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형(태)을 결정한다는 것의 의미’를 담은 출판물과 지하 1층 공간의 초대된 기획자 장혜정이 <뿔의 자리>를 재해석한 전시 속의 전시로 이뤄졌다. 특히 전시에서 ‘+장혜정’의 등장과 개입은 작가들의 고민이 전시라는 ‘뿔’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네 명의 작가는 장혜정과 자신들의 대화를 공유했고, 그에게 <뿔의 자리>를 재해석한 시각 매체로서의 전시 속의 전시를 제시하도록 요청했다.
장혜정은 과제와 같은 이 제안을 받고 작가들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조건을 바탕으로 뿔을 제시하기를 다시 제안했다. 이렇게 지하 1층 공간에는 장혜정이 작가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들의 작업실에서 선택적으로 취한 오브제의 이미지들과 이 오브제로부터 도출한 수치를 대입할 수 있는 수식, 그리고 수식에서 도출된 수, 이 숫자를 조건으로 작가들이 만든 원뿔이 전시되어 있다. 굉장히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연산으로 도출한 듯한 지하 1층의 네 뿔은 작가적 상상력과 순간순간의 판단으로 제시한 1, 2층의 뿔과 대구를 이루며 서로를 지시하는 듯하다. 지하 1층에 있는 네 뿔은 흡사 매우 객관적 결정에 의한 것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작가와 장혜정의 이름 획수를 더한 ‘이름점’이라는 엉뚱하기 그지없는 계산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시도는 네 작가의 진지한 고민에 장혜정이 던지는 일종의 쉼표와도 같다. 전시에서 이 공간은 ‘뿔’에 관한 작가들의 지난한 고민과 질문의 고리를 심화할 수도, 손쉽게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요소로써 맥락을 잠시 끊어주는 환기의 역할을 한다. 동시에 장혜정의 역할과 그 소임을 수행하는 과정으로서의 지하 1층 공간은 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집약된 공간이기도 하다. 형태를 도출하기 위한 선택의 과정을 반복하여 집대성한 공간이며, 작가들이 뿔의 자리를 더듬는 방식을 따라 전시라는 큰 덩어리의 매체가 또 다른 뿔이 되도록 한다. 이 전시는 각자가 만든 ‘뿔’의 자리를 더듬는 과정을 공유하고, 그러면서 형태를 좌우하는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그 질문에 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더는 가능하지도 유효하지도 않다는 것을 인지한다.
답을 찾기보다는 이들의 대화를 열어 다른 이들의 방식을 살펴보고, 이 추상적이며 설명될 수 없는 과정을 어떻게 다시 전시라는 ‘뿔’로 가시화하는지, 그 시도를 살펴보면서 뿔의 자리를 더듬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 ‘뿔’을 찾는 방식이 출판물과 장혜정의 개입을 통해 전시라는 더욱 큰 구조로 이어지는 이 흥미로운 방식은, 답도 없고 끝도 없는 고민과 질문의 고리를 끊어 틈을 벌리면서제 3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러한 전시의 구조는 이들의 대화를 외부로 확장하면서, 결국 질문하는 작가의 태도 자체에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 전시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