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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15, Apr 2016

젠트리피케이션과 공공미술

Gentrification and PUBLIC ART

젠트리피케이션은 예술의 공공성과 도시화, 그리고 자본이라는 거대 담론이 모이는 지점에 교묘히 자리한다. 그리고 이런 이슈가 언제나 그렇듯 궁극에는 모든 요소들이 자본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대개 예술이 낙후된 도심으로 들어와 정착하는 동기는 순수하게 출발한다. 그러나 예술이 일궈놓은 독특한 풍광은 사람을 유인하고 자본은 용케 자기증식의 수단으로 사람을 이용한다. 결국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사상가인 기 드보르(Guy Debord)가 지적하듯 자본은 예술로 고급화된 기존의 낡은 동네를 독특한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자본으로 환수 한다.
● 기획 편집부 ● 글 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대표

카스틴 홀러(Carsten Holler) 'Golden mirror carousel' 2014 Powder-coated and painted steel, gold-plated stainless steel, tinite-plated stainless steel, brass, mirrors, light bulbs, electric motors, control unit, power unit, sandbags 480×745cm Diameter(variable) Collection of the artist, Stockholm and Gagosian Gallery, New York ⓒ Carsten Holler Courtesy Gagosian Gallery Photo Christian Mark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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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주 ㈜소프트아키텍쳐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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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으로 밝아진 해방촌 거리에 인파가 북적인다. 낙후된 거리는 다양한 예술작업으로 채워져 있고 속속  들어선 이색 길거리음식이나 외국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으로 활기 넘친다. 해방촌 풍경의 생경함을 새로운 경험으로 즐기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로분주하다. 그 동안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던 동네는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프로그램으로 환경개선에 성공한 듯하다. 몇 년 전 해방촌의 공공미술을 안내하는 홈페이지가 열려 그 어느 때 보다 특별해진 동네정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야단스러운 블로거들은 해방촌 골목길을 찍어 연신 퍼트리고, 반복되는 지루한 도시생활을 환기시켜줄 그 무언가를 찾던 사람들은 너도나도해방촌의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찾아 성지 순례하듯 모여든다. 그러는 사이 신문이나 방송은 새로운 도시현상을 부동산 재테크와 연결시켜 발 빠르게 보도한다. 심지어 어느 매체는 해방촌 거리의 상가를 얻고 인테리어를 하는 비용대비 얼마만큼의 수익을 남길 수 있는지 일목요연한 표를 만들어 제시한다. 표의 말미에는 어김없이 기대이상의 큰 금액이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숫자를 진한 글씨체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부동산 전문가는 해방촌이수익형 부동산 투자수단으로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언급한다. 올라도 너무 올라 이미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하는 현지인들은 속속 건물을 팔고 떠나버렸고, 새로운 주인은 기존 세입자와 만만치 않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큰 수익을 기대하며 무리한 거래를한다. 그 어디에도 도시환경에 기여한 공공미술의 가치와 관계를 언급하는 곳은 없다. 새로운 주인의 관심사가 주로 수익에만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Dan Webb) <Gnome> 2010 Cast aluminum, stainless steel, paint, completed 

131×80×50inch Located in Bellevue Washington, funded by King County 


 



예술에 의해 가치가 달라진 도시환경에서 불어난 자본만을 달콤한 열매로 여긴다. 그러는 동안 예술은존재의 의미가 사라지고 자본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호에 언급한대로 이러한 것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보이는 도시의 곳곳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낙후된 곳이 정치나 행정의 권력 없이 자생적으로 환경개선 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잘 살고 있던 세입자가 내몰려야 하는 현실은 간과할 수 없는 사회문제다. 극단의 양면을 지닌 이 도시현상 앞에서 우리는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도시현상으로 치부하며 좌시해야 하는지 혹은 행정적 개입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막아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정말 상생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대다수의 관련 전문가들은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타의에 의한 거주지 이동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서울시나 구청단위에서 여러 가지 대책으로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 사이에 개입하는 문제를 해결책으로 제안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비자발적으로 이사  일을 줄여주겠다는 취지로 중재하는 것은 행정당국이 제안하는 해결책 중에 하나다. 그래서 월세를올려 받을  있는 범위를 조정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건물주는 일단 개축이나 신축을 내세워 기존의 세입자를 몰아내 버리는데 더욱 주력한다. 기존 세입자에게 변화된 부동산 가치를 기준으로 월세를 받을  없기 때문이다사실, 시간과 공간이 압축적으로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 거주지를 이동하는  자체가 엄청난 타격이라 단정 지을  없다. 직장을 옮기거나 혹은 개인적 사유로 인해 거주지 이동은 수반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걸까? 엄밀히 말하면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에서 중대하게 다뤄야 하는 초점은 새로운 인간소외다. 




콘래드 쇼크로스(Conrad Shawcross) <The Dappled Light of the Sun> 2015 Weathered steel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at The Royal Academy, London 

Photograph by Marc Wilmot Courtesy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London 





20세기가 들어오면서 산업화의 생산성에 초점을 맞춘 조직과 체계는 도시일상의  틀이 되었다.  안에서 인간은 전체 조직의 부품과 같이  짜인 생산 공정의 부분으로 전락함으로써 확산된 도시화로 붐비는 도심에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소외를감당해야 한다. 일찍이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같은 철학자가 지적하듯 소외를 짊어지고 있으나, 예상치 못하는 시기에 벗어나게 될까 두려운 산업주의의 일상은 인간소외를 더욱 악화시킨다. 21세기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내는 인간소외는 자본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산업화의 소외와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조직의 일부로써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상이 예술의 지리학이 만들어낸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결국은 원치 않는 자본의 논리에서다시 배제되어야 하는 점은 다르다. 이런 지역에서 비자발적으로 이사를 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거주지 이동  자체보다는 자본의 잔치에서 배제되는 소외에  아파한다. 


우리가 판교에서 주거지 개발 때문에 땅을 보상받고 떠나는 이들을 보고 거주지 이동에 따른 사회문제라고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건물 값이 올랐는데 그것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제안을   무력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예민한 상황에서 그들을 공감해주는 어떠한 장치도 없어 느끼게 되는 소외감이 가장  문제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한 이태원의 테이크아웃 드로잉 사안은 이러한 소외감에서 비롯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새로운 건물주가 마침 유명한 가수인 바람에 뭔가    바람을 관철하기 위해 우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제  뿌리를내리기 시작한 예술정착지를  떠나야 하는 테이크아웃 드로잉 입장을 공감하지 못하고 법을 앞세워 자본의 논리로 밀어붙였다는데 있다. 소외된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켜 막다른 길로 몰아버린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만들어낸 인간소외는 얼마간쥐어주는 이사비용과 같은 금전보상으로 해소되기 힘든 사회문제다. 그렇다고 건물주가 떠나는  세입자의 마음을  공감해주라는 것을 어떻게 법으로 만들  있겠는가.





리차드 메이어(Richard Meyer) <Maxalot> 2007 비디오작업 네덜란드 헤이그시 청사

 




최근 서촌 지역에 관해 서울시는 음식점이나 프렌차이즈가 들어올  없도록 하는 규제책을 내놓았다. 성동구청은 성수동 일대에 젠트리피케이션을 감시하기 위해 앵커시설을 세우고 있다. 예술이 개입된 자생적 도시재생이라고 선전을  때는 언제고 소외된 세입자의 그림자를 지우기에 급급하다.  깊은 소외 앞에서 행정가들은 규제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근본적인 대책일까? 본질적으로 낙후지역의 고급화는 결국 인간 사이의 문제다. 예술을 자본의 공모자로 몰아 경계하는 것은 사안을 얄팍하게 보는것이다. 어찌 보면, 예술가도 피해자다. 


거식증에 걸린 자본이 무엇이든 먹어 치우는 바람에 저렴한 비용으로 작업실을 얻어 사람들 사이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해온 예술가들도 한때 그들의 작업과 작업실, 심지어 예술가 자신들마저 낙후지에 등장한 구경거리의  요소가 되어 자본을 증식시켜주는 배지로 사용된 , 다시 작업실을 옮겨야 하고 소외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렇다고  지역을 계속 있던 그대로 두고 새로운 건물주인을 무조건 배척해야 할까자본이 관심을 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낀다는 것과 같다. 개발되지 못한 동네에서 공공미술이나 예술가들의 활동으로 매력지수가 높아진다면 활력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알려져 있듯이,  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순기능이다. 여기서우리가 소외라는 문제에 신경을 쓴다면 이러한 사회현상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순기능을 취할  있을 것이다. 양면성을 지닌 문제를 다루는 묘안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누는 것이다.  동안 나눔에 관한 사안은 사회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거론되고 정책에 반영되어 왔다. 기부를 독려하기도 하고 대기업이 기업이익을 예술과 관련된 분야에 지원하면 세제혜택을 주기도 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나누는 방식을 경제활동의 부수적 기능에서 본격적인 활동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자 제레미리프킨(Jeremy Rifkin) 얘기하는 협력적 공유관계로 만드는 3 산업혁명과 같은 것이 있다. 





시그리드 칼론 <KANTEN HUIS (LaceHouse)> 2009 3×7×10m Crocheted tubular netting Tilburg NL





낙후된 동네의 세입자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새로운 경제 모델을 얘기하는 이유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할 있는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언급처럼 21세기 인간소외는 금전적 보상으로 해결할  없다. 공감과 공유로 해결해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의 문제를 건물주와 세입자의 대치국면으로 해석하기보다 공감과 공유의 필요성으로 봐야 한다. 그러한 관점 안에서 우리는 공공미술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있다. 공감과 공유가 앞으로의 공공미술에 중요한 핵심어가   있다. 


새로운 건물주가 세입자를 몰아낼 궁리만 한다면  동안 공공미술로 만들어진 도시마을의 환경은지속되기 힘들다. 낙후된 지역에 들어온 예술가도 높아진 월세를 감당하기 힘든 세입자 중에 하나가  테니 말이다. 갈등 안에서 예술은 상호간의 자극적인 선언과 선전에 동원될 것이다. 다시 도구가 되어 본질은 왜곡되고 사라질  있다. 이해 당사자 간에 공감이 있다면 공유는 쉽게 성사될  있다. 예를 들어  개의 상가를 예술가와 다른 사업자가 시간대별로 나누어 사용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영업시간  외의 시간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영업장에 예술작업이 자연스레 전시 되어 있다면 세입자가 내는 금액도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상승한 월세를 충당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몇몇 재래시장에서  상가를 예술인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빌려주고 대신 예술가들은 시장 상인의 마케팅을 예술프로젝트로 진행해 상생의 효과를 거두는 사례도있다. 임대료가 비싼 도심에서는 시간적 켜를 구분하여  세입자가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다른 도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본을 탐하는 모습으로 드러나 있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여 인간관계에 집중해 본다면, 공감이나 공유와 같은 이전과 다른 패러다임에서 해결책을 찾을  있을 것이다. 예시대로 도시 공간의 시간대별 프로그램이 달라진다면  또한 색다른도시공간의 매력으로 유효하다. 이런 관점에서 공공미술은 결과물로 나오는 예술품도 중요하지만 도시공간과 인간을 연결하는프로그램으로써의 예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감과 공유 안에서 공공미술이 우리 일상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날을 기대해 본다.  



글쓴이 한은주는 공간건축에서 실무  영국 왕립예술대학원에서 도시공간에서의 위치기반 인터렉션디자인 연구로 박사학위를받았다. Siggraph 2009에서 건축과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작품을 발표했으며, 2011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초대작가다SPACE 편집장을 지냈으며현재 ㈜소프트아키텍쳐랩의 대표한양대 겸임교수SPACE 편집위원  건축평단으로 예술작업글쓰기디자인공학 등의 작업을 통해 혁신적 도시디자인과 건축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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