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마침표의 공간 2016.12

마침표의 공간 

<지희킴_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전 11.7-11.27 디스위켄드룸 
 
 


<새벽을 헤엄치는 드로잉> 2016 기부된 책 페이지 위에 과슈, 잉크, 홀로그램 종이, 펜


 
하얀 입방체는 그 안의 작품에, 하얀 종이는 그 위의 문장에 집중하게 한다. 지희킴이 보여주는 북드로잉은 흰 벽에 걸린 종이를 이중 배경 삼아 자신에게 몰입하게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놓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벽에 걸린 ‘이것은 마침표에 대한 이야기이다’는 관람객의 동선에 따라 마주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기부받은 책의 페이지에 다양한 색의 과슈로 원을 그리고, 흐르는 잉크 자국을 더하기도 한 이 시리즈는 마치 문장이 이어지듯 벽면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다만 단정하게 연필로 쓴(혹은 그린) 시리즈의 제목은 글자라기보다는 이미지로 박제되어 ‘마침표’라는 기호에 관해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영화가 시작할 때 올라가는 타이틀처럼 인트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하지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 문장은 오프닝타이틀이 될 수도, 엔딩타이틀이 될 수도 있다. 어디에 점을 찍는지가 문장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희킴은 지난 몇 년간 서울, 런던, 타이베이에서 기부받은 책을 캔버스로 삼는다. 도서관, 헌책방, 소셜네트워크 등 출처는 다양하다. 그렇게 모험은 시작된다. 여전히 활자가 남아있는 페이지에는 그 흔적을 덮는 드로잉이 더해진다. 대부분이 절단된 신체인데 그들은 눈물이든, 피든 무언가를 쏟아내는 중이다. 그렇게 쏟아낸 것들은 응고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흐르는 듯해 마침표 없이 개별 작품을 이어 보게 하는 효과를 낸다. 마찬가지로 휘장처럼 걸린 천에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해 천장에서부터 내려뜨린 <당신의 나무>(2016)나 리소그래피와 과슈로 그린 그림을 나무 지지대에 걸어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2016)은 흡사 끝없는 이야기의 공간을 유영하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2016 콜렉티드 글라스볼 28개 가변설치 


 
중세 서양에서는 책에 삽화 장식을 넣을 때 과슈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운 색감이 나오는 과슈는 아마도 세월과 함께 바래게 마련일 종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다. 하지만 ‘파국을 맞은 책’과 그에 더해지는 드로잉은 태생적인 나이 차를 갖는다. 책의 저자를 알 방법은 없고, 내용 또한 존재감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는다. 일러스트나 디자인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선과 색의 사용은 과슈 특유의 성질 덕분에 묘한 서정성을 띈다. 반면 글자는 완전히 또는 일부가 가려져 명확하게 읽히지 않는다. 책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삽화와는 달리 글과 그림이 서로를 돕지 않고, 그저 같은 공간을 나눠 쓰고 있을 뿐이다.  
그 공간의 질서를 부여하는 사람이 바로 지희킴이다. 관람객이 볼 수 없는 온전한 형태로 책을 먼저 만났고,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도 있었고, 그 위에 어떤 형태로 시각적 요소를 덧칠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도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총지휘 아래 책의 운명은 일대 전환을 맞이한다. 드로잉을 담은 물리적 도구이자, 동시에 영감의 원천으로써 미술의 영역에 편입되는 것이다.  
전시 제목의 모태가 된 소설을 쓴 김연수 외에도 김영하,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 폴 오스터(Paul Auster) 등의 이름이 전시장에 머문다. 그러나 이 전시 속에서 분명한 이름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들의 문장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 모두 이미 팔레트에서 미술가의 상상력과 한데 뒤섞였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결국 이야기의 파편이 물감과 만났을 때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이다. 문학의 세계를 떠난 책은 자유를 얻었고, 수많은 마침표도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하여 흩뿌려진 28개의 유리구슬처럼 공간을 점유한 채 시각 언어와 조응하고 있었다.             
●  이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