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동물성 루프

화사한 사물들의 수행적 기록
<동물성 루프>


2019.11.12-2019.11.30 공-원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표현은 대개 긍정적으로 쓰인다. 이는 그 반대편에서 ‘죽은 것 같다’거나, ‘움직임이 없다’는 표현이 수반하는 부정적 함의를 떠올리면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서 아도르노(Theodor Adorno)처럼 박물관, 또는 미술관을 뜻하는 ‘museum’이 납골당을 뜻하는 ‘mausoleum’과 갖는 선택적 친화력을 떠올리거나, ‘물화(物化)’라고 번역되는 루카치(Georg Lukács)의 ‘Verdinglichung’ 개념을, 독일어 문자 그대로 영어로 옮기면 ‘thingification’이 된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따라 얼굴이 화사하신 게 물건 같아요!’라는 칭찬은 하기도 듣기도 쉽지 않다.) 움직이는 것과 살아있는 것을 연관 짓고 그 대척점에 멈춰 죽어있는 것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인디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나 무당의 ‘굿’으로 전시를 여는(이제는 지루할 정도로) 수많은 사례가 입증하듯, ‘퍼포먼스’를 둘러싸고 21세기의 글로벌 미술 씬(Scene)이 보여준 일종의 신열(身熱)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난 11월 자못 조용히, 마치 ‘사물’처럼 공개되었던 <동물성 루프>전은 이러한 전통적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던 드문 사례들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는 전시장 입구에 걸린 박보나의 퍼포먼스 작업이 ‘라이브 퍼포먼스’가 아니라 해당 퍼포먼스에 대한 문자적 요약과 사진 한 장으로 단출하게 제시되었던 것에서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하나의 화면 안에서 ‘복사된 작가의 신체가 연이어 등장’하는 임정수의 <6개의 프레임>(2018)은 이른바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이라 불리는 범주에 무리 없이 포함되는 것처럼 보이고, 차미혜의 <면, 날, 숨은 것>(2016)과 하상현의 <아이소메트릭>(2018), 그리고 자그마한 아이패드의 다소 어두운 화면 속에서 재생되는 <무제(구걸하는 사람)>(2015) 역시 ‘퍼포먼스에 대한 영상 기록’이라 해도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세워진 일련의 조각 작품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전시를 기획한 이민주와 허호정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하상현의 작업이 “정지의 수행 속에서 역설적으로 생동하는 인체”를 드러낸다고 보며, 사진 기록으로 제시되는 <2’33’’>의 이미지를 “움직임을 내재한 제스처”로 간주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1960-1970년대, 특히 여성 작가들에 의해 수행된 퍼포먼스 작업을 기록행위(documentation)로 봤던 아멜리아 존스(Amelia Jones)나, 이를 뒤집어 다큐멘테이션 자체를 퍼포먼스로 파악할 필요를 역설한 필립 아우스랜더(Philip Auslander)와 같은 이들의 시각을 이어받는 시도이면서, 점점 더 많은 작업이 온라인에 업로드되다 못해 ‘특정 현장에서 일회적으로 거행’되는 작업의 유일무이함과 현장성의 지위를 위협, 또는 대체하는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환경을 이차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작업 자체의 일부로, 보다 적극적으로 사유할 것을 촉구하는 세스 프라이스(Seth Price)와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요청과도 공명하는 입장이다.
물론 모든 기록물이 퍼포먼스가 되는 것은 아니며, 기록물이 갖는 행위, 또는 퍼포먼스적 ‘삶’의 차원이 반드시 ‘동물성’으로 수렴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식물성 루프’라는 아이디어는, ‘야수들조차 식물보다는 고귀하다’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적 이해 속에서 기각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퍼포먼스와 다큐멘테이션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일부로 포함되거나 등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해당 작품의 향유와 평가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작동적 토대(operational foundation)로서, 즉 퍼포먼스와 다큐멘테이션 자체의 (불)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사유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벡터의 궤적을 10여 년간 자신들의 작업 근간으로 삼아온 팀은 파트타임스위트인데, 지난 2019년 여름의 끝과 가을의 초입, 그들이 합정지구에서 선보인 전시 <에어>, 특히 <오토>(2019)는 내가 ‘수행적 기록 (performative documentation)’이라 부르는 범주의 작업에 대한 가장 빼어난 예술적 성취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성 루프>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범주와 아이디어에 살을 붙인 최신작들을 그러모은 ‘시대착오적 신작 전시’가 아니라, 근과거에 유배된 것처럼 보였던 작업의 위상을 그 어느 것보다 ‘당대적’인 것으로 읽어내고 공표하는 퍼포먼스, 혹은 아카이빙이라는 점에서, 2019년의 대차대조표에 제대로 기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앞에서 드물다고 말했던, ‘화사한 사물’로서. ● 곽영빈 미술평론가·영화학박사


[각주]
* 이에 대해서는 전시 도록에 수록된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곽영빈, ‘디지털 클라우드 시대의 비, 혹은 바닥의 끝없는 와해에 대한 수행적 기록: 파트타임스위트의 <에어>(2019) 전시의 근거.’




 차미혜 <면, 날, 숨은 것: 기록 읽기> 2019 2채널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29분 사진: 강신대